23.09.19 팜플로냐 – 푸엔테레이나
대도시를 나가는 길은 늘어진 아침 해의 그림자처럼 길다. 불을 밝힌 가로등을 따라 걷다보면 어느새 도시의 끝에 다다르고, 산티아고 순례길 안내판이 보인다. 그리고 길이 시작된다. 아침마다 걷는 길은 해를 등지고 서쪽을 향해 걷는 길이다. 프랑스길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는 길이어서인지 걷는 내내 아침이면 지는 별을 따라 걸었다.
용서의 언덕을 지나는 날이었다. 피레네 산맥 이후로 맞이한 첫 번째 고개이다. 8시쯤 들린 바르에서는 엄마와 통화를 했다. 루르드에서 택배를 보냈다는 얘기와 이렇게 멀리 있는데 통화를 하는 게 신기하다는 얘기 등등. 낯선 언어 사이에서 낯익은 언어와 익숙한 목소리를 들으니 한결 편안해졌다. 스틱을 쓰는 것도 조금씩 익어갔다. 제대로 사용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앞서 걷는 이들의 스틱 사용을 따라 하며 걸었다.
용서의 언덕으로 오르는 길은 정말 산길이었다. 앞서 수비리 만큼은 아니었으나, 서울의 산으로 예를 들자면 인왕산 등산로 초입을 오르는 정도의 산길이었다. (다르게 느낄 수도 있으나, 나의 경험 안에서는 그렇게 느꼈다.) 새로 꾸린 배낭은 이날도 동키로 보냈다. 작은 언덕을 넘는 일정이기에 지레 겁먹고 보낸 것이다. 초반에는 걷기에 몸이 익숙해지기까지 조심하며 걸었다.
산길을 걸으며 힘들다, 힘들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그러다 문득 내가 지금 오르는 길이 ‘용서의 언덕’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이 길에서 뭐라도 자꾸 의식하고 걸어야 한다고 생각해서인지 그때부터 ‘용서’를 화두로 생각했다. ‘아 힘들다.’, ‘그런데 용서가 뭐지?’, ‘스틱이 자꾸 꼬이네.’, ‘용서할 사람을 찾아볼까.’, ‘아 더워 잠바 좀 벗어야지.’ 생각은 깊어지지 못하고 계속 겉돌았다. 30도를 웃도는 이상고온의 스페인, 용서의 언덕을 오르는 길. 생각은 오로지 ‘덥다’와 ‘힘들다’ 사이만 오고갔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용서의 언덕에 다다랐다.
용서고 뭐고 에라 모르겠다.
언덕에는 나무 그늘 하나 없었다. 용서의 언덕 조형물과 낡은 건물 하나. 건물 그림자가 늘어선 자리마다 순례객들이 앉아 더위를 피하며 쉬고 있었다. 나도 그들 사이에 자리를 찾아 앉았다. 옆 자리에는 그림을 그리는 한국인 순례객이 있었다. 가방에 간식으로 챙겨두었던 오렌지를 까서 옆자리 분들에게 권하며 인사를 건넸다. 나흘 째 접어드는 순례길에서 나는 E(외향형)가 된 것이다. 아니, 본래 그게 내 모습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여튼 잠시 앉아 쉬다가 나도 조형물과 사진을 찍어야 겠다는 생각에 벌떡 일어났다. 마침 한국인 무리가 깔깔 웃으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다가가 사진을 부탁했다. 무릎 생각은 하지 않고 또 버릇처럼 점프 샷을 찍었다. 불어난 체중도 생각하지 않은 점프였다. 묵직하게 땅으로 떨어지는 순간, 아차 내 무릎!
이때까지는 그래도 순례길에서 이런 것을 보면 신나는 마음이 더 컸다. 구름 한 점 없는 땡볕에서 이리저리 사진 찍으며 한참 쉬었다. 그리고 다시 이만큼 오른 언덕을 내려갔다. 길과 작은 마을을 스쳐갔고 잊을 만하면 순례길 표지석이 나왔다. 그리고 곧 도착할 마을인 푸엔테 라 레이나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