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9.19 팜플로냐 – 푸엔테레이나
순례길에서 만난 여러 마을 중 강을 끼고 있는 마을은 모두 아름다웠다. 스페인은 물이 맑고 좋았다. 그래서 땅이 비옥한 걸까. 푸엔테 라 레이나는 마을 이름에도 보이듯, 여왕의 다리가 유명하다. 숙소에 짐을 풀었다. 알베르게는 대부분 혼숙인 2층 침대이다. 내가 묶은 곳도 그러했다. 여러 순례객이 나이, 성별, 국적 상관없이 다 섞여 있다. 씻고, 빨래하고 대충 짐을 정리해두고 나가려는데 누군가 따라 나왔다. 그는 짧은 영어로 저녁에 대만, 홍콩, 한국 같이 식사하자고 했다. 그러자고 하고 약속을 잡고 나왔다. 굳이 같이 먹지 않아도 되었을 저녁인데 그 순간에는 외국인과 같이 식사를 한다는 것마저 신기하고 좋았다.
마을 이곳저곳을 보다가 여왕의 다리로 가던 길에, 미음씨를 다시 만났다. 우리는 그제야 왓츠앱 아이디를 교환했다. 순례길에서는 그러했다. 첫만남에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교환하지 않았다. 같이 걷는 그 순간을 나누고, 또 만나면 통성명을 하고 또 만나면 왓츠앱을 교환했다. 예를 들면 그러했다. 나는 앞서 저녁 약속이 잡혀 있어서 그날 미음씨와 같이 식사를 하진 못했다. 우리는 아마 또 만나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연락하자고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마을 성당에 들어갔다. 순례길 넷째날이 되어서야 편안한 마음으로 성당을 찾았다. 무슨 행사가 있는지 아니면 그날이 성가대 연습날이었는지, 성당에는 성가대의 성가가 울렸다. 불꺼진 성당, 스테인드글라스 창으로 오후의 햇볓이 들어오고 낯선 언어이지만 어딘지 익숙한 음의 성가가 울린다. 나는 그 한자리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았다. 시간이 멈췄으면 하고 느낀 첫 번째 순간이었다. 이후에도 여러 번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싶었다.
저녁 약속 시간이 되어 식당으로 갔다. 나는 나 말고 다른 한국인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건데 아니었다. 대만, 홍콩, 한국의 한국이 나였던 것이다. 한국 드라마를 나보다 더 좋아하는 대만인 아저씨와 순례길 뿐 아니라 세계여행 중인 홍콩인 아저씨 그리고 마찬가지로 한국 문화를 좋아하는 홍콩인 아가씨. 셋다 서로 길에서 만난 이들이라고 했다. 셋다 영어가 짧았다. 나를 위해 애써 K-드라마 얘기를 꺼내주었지만 애석하게도 내가 드라마를 잘 보지 않아 대화를 이어가기가 어려웠다. 대만인 아저씨는 그 당시 막 오픈했던 ‘무빙’ 전편을 다 봤다고 할 정도로 진심이었다. 그러다 보니 대화는 자주 끊겼고, 그들은 자주 그들의 언어로 대화를 했다. 나는 조금이라도 들어보고자 번역 어플을 켜서 대화내용을 실시간 번역을 해봤으나, 짧은 번역기가 내게 보여준 내용은 중국의 홍콩 제재에 대한(당시 큰 이슈) 것이었다. 어이쿠. 잘 모르기도 하고 짧은 언어로 끼어들 내용이 아닌 것 같아서 그냥 식사만 했다.
그들은 친절했지만 언어와 대화 주제의 벽은 높았다. 대만인 아저씨와는 왓츠앱을 교환했다. 이것이 이후 조금 피하고 싶은 일이 되었다. 이때까지는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해서 그대로 하루를 마무리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