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아~ 김혜진 주임님, 박현우 주임님 이 시죠? 반가워요."
"아, 네.. 하하. "
심하게 긴장해서였을까. 흔히 말하는 신입사원의 패기와 열정은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찾아봐도 없었다. 솔직히 아쉬움이 밀려왔다. 좀 씩씩한 모습이면 좋을 텐데. 하고 말이다. 그래도 힘들게 받은 신입사원들이었다. 팀 내 박 대리에게 회사생활에 필요한 기초적인 것부터 가르치도록 부탁했다. 인트라넷 사용법, 전화하는 법, 메일 쓰는 법까지. 신입 둘은 조용하긴 했지만 알려주는 것은 차분히 배워 나갔다.
점심을 함께할 때면 한 번씩 좀 더 적극적이면 좋겠다는 말이 턱밑까지 차올랐으나 꾹꾹 눌러 내려버렸다. 혹여나 그들의 성향까지 이래라저래라 하는 사람이 될까 봐, 또는 나 스스로 너무 과하게 기대하는 건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괜찮았다. 어차피 저기압을 몰고 다니며 사무실에 앉아 있느니, 빨리 이 조직에서 나가 주는 게 전체 팀을 위해 더 낫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한 명이 아닌, 김 주임까지 나간다면? 인시 자체가 부족해져 버린다. 아니 아니 아니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김 주임의 마음도 덩달아 흔들리는 듯 보였다. 안 그래도 힘 없이 인사하는 목소리가 이제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낮아졌다. 하루 여덟 시간 동안 웃는 모습이라고는 휴게실에서 동기와 대화할 때뿐이었다. 팀원들과 거의 말도 섞지 않았다. 함께 일하는 대리님과 업무적인 대화를 나눌 때만 제외하고는.
한 날은 박 대리를 슬쩍 불러 물었다.
"대리님, 김 주임 요새 어때요?"
박대리는 이미 모든 걸 놓아버린 것 마냥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김 주임도 곧 나갈 거예요. 분명해요. 마케팅 쪽 일을 하고 싶다고 몇 번 얘기했어요. 지난번엔 대학원에 가서 다른 공부를 좀 더 할 수도 있다고도 했고요.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면 막상 뭘 하고자 하는지 명확한 것 같지는 않더라고요."
하... 그럼 그렇지. 예상했던 걸 확인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날 오후. 자리에 앉아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나의 풋풋하고도 어두웠던 신입 시절을.
당시 마케팅을 하고 싶다고 이 회사에 입사했지만, 예상했던 것과 판이하게 달랐었다. 기대했던 일의 10 중에 1도 하지 않았다. 매일 데이터 추출하고, 엑셀로 가공하고, 또 데이터 추출하고의 반복이었다. 나 역시 표정이 밝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화난 모습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당시 팀장은 지금의 내가 그렇듯 속으로 생각했을 거다. '휴, 곧 회사 떠나겠구먼."이라고.
그렇게 매일을 지루함으로 채우면서도 딱히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인사에서 전배제의가 왔고, 지금 이곳만 아니라면 괜찮겠다 싶어 받아들였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옳았었다. 새로운 부서에서 만난 나의 선배는 인사쟁이답게 나에게 적절한 칭찬이라는 당근을 주며 일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수준에 맞는 훈련도 시키며 실력도 키우게끔 도와주었다. 그렇게 한 해, 한 해가 지나 17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곳에서 매니저로, 팀장으로 성장해 오게 된 것이었다.
김 주임의 태도에 대한 불만을 싹 빼고 좀 멀리서, 객관적으로 바라보기로 했다. 좋은 점, 특히 이곳은 회사이니 일하는 데 있어서의 장점을 찾아보기로 했다.
내가 한 번씩 참고자료 정리를 부탁할 때면 꽤 완성도 높은 결과를 가져왔다. 지시한 내용이 빠짐없이 반영되어 있었고, 글자 크기, 정렬, 표 모양 등 서식 또한 깔끔했다. 어쩔 땐 자리에서 몇 시간이고 일어나지 않고 일에 몰입하는 모습도 보았다. 일을 맡겼을 때 완벽히 헤 내려는 책임감도 보였다.
아.. 내가 너무 한쪽 면만 보고 있었구나. 이대로 다른 팀으로, 혹은 다른 회사로 가도록 두기에는 아까워졌다. 지금 이곳에서 교육이라는 일의 재미와 가치를 느끼게 해 주고 싶어졌다. 나의 선배가 나에게 그랬듯이.
차장님은 이미 장성하여 회사에 다니는 딸 둘을 두셨다. 그만큼 소위 말하는 MZ 세대의 성향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다. 무엇보다 밝고 긍정적인, 업무에 있어서 그 누구보다 적극적인 차장님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본다면, 배우고 깨닫는 점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김 주임 한 번 잘 성장시켜 보자고 부탁하며 차장님께 드린 말씀이 떠오른다.
"차장님, 일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가장 먼저 되어야 할 건 딱 하나 일 것 같아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가치 있는 일이라는 걸 알게 하는 거요. 우리가 직원들이 일을 잘할 수 있도록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에요. 한 가지 더한다면 일에 어느 정도의 진심을 담고 정성을 다 하느냐에 따라 그에 합당한 결과가 나온다는 것도요. 그냥, 그것만 느끼게 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말이 쉽지, 어려운 부탁이었다. 한 사람의 마인드를 바꾸는 영역이니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차장님께 맡기기 참 잘했다는 생각이 두터워졌다. 차장님은 일을 지시하기 전에 김 주임이 느끼게 될 감정까지 미리 예상하려고 애쓰셨다. 자신이 꼰대인 건지, 아니면 김 주임의 태도가 잘못된 건지 의아해질 때면 따님들에게 가서 물어봤다고 한다. 이해해야 하는지, 혹은 고치도록 도와줘야 하는지에 대해. 한 번씩 김 주임의 말과 행동에 고쳐야 할 점이 보일 때면 본인이 그 앞에서 먼저 더 나은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잔소리를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게끔 만들고 싶었던 거다. 그렇게 한 달, 두 달, 반년이 흘렀다. 달력이 한 장, 한 장 넘어갈수록 김 주임의 태도도 천천히, 하지만 눈에 띄게 달라졌다.
어느 날 차장님이 나를 조용히 불러 말씀하셨다.
"팀장님, 김 주임이요. 많이 밝아졌어요. 요새는 다른 팀원들한테도 먼저 가서 도와 드릴 거 없냐 묻기도 하고, 일 하나 맡기면 궁금한 점도 많이 물어보고, 욕심이 좀 생긴 것 같아요. 그래서 말인데요. 제가 봤을 때 일 하나를 온전히 맡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해 냈을 때 보람도 느끼고 더 열중할 것 같거든요. 그동안에는 박 대리나, 제 업무를 옆에서 도왔기 때문에 성취감을 그만큼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을 거예요. 어쩌면 그게 일에 집중하지 않는 것처럼, 혹은 지루해하는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고요."
차장님의 조언을 들은 후, 김 주임에게 직접 보고하게끔 일을 몇 가지 지시했고, 역시나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확인했다. 이제 단독으로 일을 해 봐도 되겠다 싶어 영역 또한 넓혀 주었다. 차장님과 함께 교육과정을 준비하며, 교육생들에게 보여줄 운영 장표를 혼자 책임지고 작성해 오도록 했다. 이 또한 예상보다 잘해왔다. 이후에 꽤 중요도가 높은 매니저 승진자 과정을 맡겼다. 혼자 하되, 모르거나 소통하기 어려운 영역이 있다면 차장님께 도움을 청하라고 했다.
이후 김 주임의 태도는 놀랍도록 달라졌다.
자신이 맡은 일을 해 내기 위해, 모르는 것을 다른 팀원 분들께, 혹은 다른 부서에 먼저 가서 물어보았다. 자신이 작성한 자료를 검토해 달라는 요청도 했다. 기존에 진행해 온 교육과정을 리뷰하고, 개선점을 찾았으며 해결 방법까지 들고 왔다. 현장을 잘 모른다며 자신이 그곳에 직접 가서 경험해 보고 싶다는 의사도 밝혔다. 자연스레 교류가 많아지니 팀원들과의 스몰토크도 늘어났다. 긴장하거나 혹은 관심 없어 보이는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정말이지 놀라운 발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