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껏 경직된 표정으로 서 있던 차장님이 포디움 앞에 셨다. 볼을 부풀려 크게 '후-' 하고 숨을 내시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오프닝 멘트를 시작했다. 그러나 평소 차장님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긴장이 되었는지 목소리 톤이 높고 살짝 빠르기까지 했다. 중간중간에 '네, 아.'와 같은 추임새도 자주 반복되었다.
회사의 임원들이 참석하는 리더십 과정 소개 세션이었다. 서른 명가량의 머리 굵은 상무들의 눈이 한 곳에 몰리는 강단 앞에 섰으니 부담도 컸을 테다. 그래도 너무 안타까웠다. 차장님의 실력은 10분의 1도 발휘되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도 그 아슬아슬함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차장님은 세미나 룸 뒤에 서 있는 내게 마치 늪에서 구해 달라는 듯한 눈빛을 보내셨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해 드릴 수가 없었다. 그저 '괜찮아요, 잘하고 있어요.'라고 속으로 외칠뿐.
과정을 시작하기 전, 차장님과 몇 번을 고민했었다. 오프닝을 차장님과 나, 둘 중 누가 할 것인가에 대해서.
사실, 이번 교육은 차장님이 A부터 Z까지 모두 준비했다. 사전 설문조사는 물론이고 강사 섭외, 교육 안내, 그리고 과정 소개 자료 등 모든 준비의 90% 이상을 맡았다. 또한, 차장님은 교육 운영에서 가장 중요한 스킬인 퍼실리테이팅 실력이 우수했다. 마치 목소리와 제스처, 표정으로 교육장 분위기를 들었다 놨다 한다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이번 과정의 진행은 차장님이 맡아보시는 걸로 결론을 지었다. 임원들 앞이라 어려울 테지만 한 번 해보겠다고도 하셨다. 내심 드디어 기회를 잡으셨구나 싶었다. 그간 숨겨왔던 능력을 인사 부서의 수장인 전무님께 보여드릴 수 있는 절호의 순간이 될 거라고 기대했었다. 그랬었다.
하지만 너무 긴장을 한 탓이었을까. 평소의 자신감 넘치던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런 자신을 인지했는지 더 높은 톤으로 과하도록 빠르게 말을 이어나갔다. 조금만 페이스 조절을 해야 함을 알려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스피치가 시작된 상태에서 톤을 조금 다운시켜 달라는 손짓을 한다 한들 오히려 말을 주저하게 되는 역효과를 낼 것이 분명했다. 차장님 스스로 안정감을 찾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저 덜 긴장하도록 연신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 내 핸드폰이 울렸다.
이번 과정의 환영사를 하러 오신 전무님이 도착한 것이다. 초행길이기에 내가 주차장에서부터 모시고 오기로 했었다. 엘리베이터를 누르고 주차장에 도착할 때까지, 반갑게 인사를 하고 다시 세미나 룸이 있는 층에 도착해서 문을 열 때까지 내내 마음속으로 바랬다. '제발, 차장님이 원래 페이스를 찾고 계시기를. 제발.'
세미나실 안으로 들어가 뒤쪽에 놓인 테이블 앞에 전무님과 나란히 앉았다. 차장님은 전무님과 눈이 마주쳤는지 간신히 진정되었던 긴장감이 다시 올라오는 듯 보였다. 전무님의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해 커피와 쿠키를 가져다 드리고 앉으려는 찰나, 전무님이 나를 툭툭 치시더니 한 말씀하셨다. 살짝 찌푸려진 미간을 보니 그리 좋은 말은 아닐 거라 예상되었다.
“솔직히 말할게요. 이 차장 지금 말하는 거 임원 대상 오프닝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요. 마치 주니어 대상 말하듯이 하는데 아닌 것 같아요. 클로징은 김 팀장이 하면 좋겠어요.
초반에 교육팀이 자리 잡고 성과를 내는데 이 차장이 큰 기여를 한 건 알겠지만, 그리고 김 팀장이 한 평가는 믿겠지만, 교육 팀에서 과정 운영 실력은 기본 아닌가요? 내가 봤을 때는 더 이상의 성장 가능성은 보이지 않아요. 여전히 퀘스천입니다.’
아.....
순간 마음이 와장창 무너져 버렸다. 그동안 힘겹게 쌓아온 평가가 또 한 순간에 날아가는 건가 싶었다.
사실, 이 차장님은 입사 20년 차다. 그리고 전무님은 흔히 말하는 만년 차장, 그러니까 팀장이 아닌 팀원으로 오랜 기간 근무하는 분들에 대한 평가가 박한 편이다. 연차가 오래되었으면 그에 준하는 성과를 내야 하며 성장 가능성 또한 높아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다. 그리고 전무님 눈에 차장님은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평가되어 있었다.
그러던 중 차장님은 나와 팀장과 팀원으로서 만나게 되었고, 본인보다 공채 후배인 나를 팀장으로 '모시게'되던 날 회사를 그만두려고 까지 하셨다. 조직이 보이지 않는 사직을 권하는 거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 차장님은 우리 팀을 꾸려가기에 반드시 계셔야 하는 분이었다. 인사에 대한 경험과 지식이 풍부했고, 무엇보다 뛰어난 업무 처리 속도와 일에 대한 열정이 월등히 높았기 때문이었다. 여태껏 이러한 자신의 실력을 인정해 줄 상사나 뽐낼 만한 일을 만나지 못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승진 기회는 출산과 육아휴직과 함께 조용히 뒤로 넘길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여러 번의 면담 끝에 차장님은 팀에 함께 있기로 했다. 그리고 나에게는 또 다른 과제가 주어졌었다. 차장님이 연차에 합당한 성과를 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일부러 주요한 프로젝트를 맡겼고, 차장님은 보란 듯이 우수한 결과물을 보여주셨다. 성과 또한 인정받았다. 이렇게 되기까지 약 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오늘 전무님으로부터 또다시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은 것이다.
오프닝이 모두 끝나고 자리에 돌아온 차장님은 만족스럽지 않은 모습이었다. 축 처진 어깨와 경직된 얼굴에서 스스로에 대한 자책과 후회가 묻어나는 듯 보였다. 고생하셨다는 말에도 그저 씽긋 웃기만 하고 말았다.
이후 강사의 강의가 이어졌고, 차장님은 세미나룸 밖으로 자주 나가셨다. 속이 별로 좋지 않다고 했다. 스트레스가 몸으로 나타난 모양이었다. 많이 힘들어 보이기도 했고, 전무님 말씀도 있었기에 조심스럽게 생각을 전했다. 클로징을 내가 하겠다고.
그렇게 교육을 마친 후에도 차장님의 표정은 그리 개운치 않아 보였다. 솔직히 나도 전무님으로부터 들은 차장님에 대한 의견으로 종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교육장을 정리하고 각자의 차에 올라타 서로 수고했다는 말속에 각자의 불편함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차장님으로부터 문자 한 통이 왔다.
‘팀장님, 아무래도 다음번 임원 분들 교육 오프닝은 팀장님이 하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차장님의 마음이 다칠까 한참을 고민한 뒤 답장을 보냈다.
‘오늘 엄청 긴장되셨죠, 몸도 좋지 않았는데 정말 고생하셨어요. 힘드셨을 텐데 주말 편히 보내시고, 다음 주에 다시 말씀 나누어요.”
그날 밤, 그리고 주말 내내 많은 물음표들이 떠다녔다.
'이번 임원 과정 오프닝은 내가 하는 게 맞았을까. 차장님이 잘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고, 그걸 전무님께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내 판단이 잘못되었던 걸까. 만약 차장님이 오프닝을 하지 않았다면, 전무님이 차장님의 긴장된 모습을 못 보셨을 거다. 너무 의도적으로 보여주려 했기에 역효과가 난 걸까. 이번 상황이 아니었더라도 결국 차장님에 대한 전무님의 평가가 똑같았을까. 아니면 전무님이 이미 차장님의 업무 능력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고 있기에 이렇게 결론이 난 걸까. '
어쨌든 일은 벌어졌다. 바꿀 수 없는 일을 혼자 되돌려감 기를 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앞으로를 생각하자. 그래도 2년 전보다는 낫다. 지금은 갖고 있는 실력에 대해 인정이라도 받은 상태다. 잘하는 것을 더 드러낼 수 있는 기회가 아직은 있을 거다. 차장님이 이 조직에 필요한 사람임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이 꺼림칙한 상황이 편치 많은 않다. 왜일까.
한 사람이 조직에서 매번 중요한 존재, 그렇지 않은 존재로 평가받고 있다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다. 어떨 때는 없어서는 안 되는 핵심 인재로 여겨지다가도 한순간에 저 성과자로 낙인찍혀 버리는 경우를 수없이 보아왔다. 게다가 개인이 갖고 있는 프레임을 잣대로 삼아 '판단당한다'라고 여겨질 때면 더없이 씁쓸하기만 하다. (이런 경우가 생각보다 많고, 어쩌면 수많은 '회사 사람'을 보아온 그들의 프레임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문득, 이 조직의 일원인 나도 늘 평가받고 있다는 압박이 숨 막히게 다가왔다. 말 한마디, 행동, 이메일, 보고서, 그리고 표정까지도 매 순간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니.. 알고 보면 참 무서운 공간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뿐만이 아닐 거다. 직장에 소속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은 매 순간 조직에 필요한 사람, 아닌 사람으로 저울질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알면서도 직장에 다니고 인정받기를 바라는, 그리고 인정을 받으면 신나서 도저히 못할 것 같은 일들도 해내는, 인정을 받지 못하면 삶의 축이 무너진 것 마냥 힘들어하는, 그런 우리네 직장인들이 짠하고 대단하고 그런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