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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이령 Oct 21. 2022

시뮬레이션만 50번째

비행기는 대체 언제 타?

처음 해보는 일에 대한 불안감은 왜 어른이 되었는데도 사라지지 않는 걸까?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상상을 했다. 면접이나 첫 출근과 같이 새로운 일을 앞두었을 때면 머릿속이 그날에 대한 예측 상상으로 가득 차 넘실거렸다. 그리고 그러한 상상들은 잠을 자려고 누워도 사라지지 않고 내 머릿속을 점령하고는 했다. 내가 '잠 좀 자게 제발 나가!'라고 소리를 질러도 상상들은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계속해서 그 크기를 키워나갔다. 나는 상상들로 인해 밤잠을 설치는 날이 많았다. 그래도 나는 그것들이 싫지 않았다. 나는 예측할 수 없는 부분을 상상으로나마 예측해보는 것이 좋았다. 상상을 하면 할수록 나의 불안감은 점점 줄어들어 갔고, 나는 그것이 상상이 나에게 주는 긍정의 힘이라 생각했다. 




그날은 매서웠던 겨울바람이 채 가시지 않았던 2월의 어느 날이었다.


"저 부산으로 이사를 가야 할 것 같아요"

남자 친구의 갑작스러운 이사 소식이 나에게 전해졌다.


"그동안 이직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최종 합격 연락을 받았어요"

이직 준비를 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부산이라니? 나는 낯 썰은 그 도시의 이름을 입안에서 여러 번 되뇌어보았다. 인천에서만 평생을 살아온 나에게 있어 부산은 가본 적 없는 미지의 세계 그 자체였다. 


남자 친구의 부산행 소식을 들은 후 내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부산으로 가는 최적의 교통편을 찾는 것이었다.

KTX가 없는 인천, 고속버스로 가기에는 너무나도 먼 거리 등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 보았을 때 비행기를 타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내면 깊숙이 숨겨두었던 불안이란 그림자가 내 마음에 노크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비행기를 마지막으로 타 본 게 언제였더라?

나는 여행이란 것에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여행 갈 돈이 있으면 저축을 하는 타입이랄까? 그랬기에 국내선은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국제선은 회사 해외 출장 때 타본 것이 전부였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비행기를 혼자 타고 다녀야만 했다. 어른이 되었지만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일에 대한 불안은 항상 나를 따라다녔다. 그리고 국내선 비행기 혼자 타기는 내가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일 중 하나였다.


남자 친구의 장거리 이사가 완료되고, 나는 부산에 갈 생각에 들떠있었다.

"저 다음 주에 부산 내려갈게요, 이삿짐 잘 정리하고 있어요"

"혼자서 잘 올 수 있죠? 공항으로 제가 마중 갈게요"

"당연하죠! 걱정 말아요. 다음 주까지 잘 지내고 있어요"


나는 자신있게 말하며 남자 친구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온통 비행기 탑승과 관련된 상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평소에 해보지 않은 일을 시도할 때마다 사전조사에 상상을 곁들이고는 했다. 김포공항의 시설을 사진으로 전부 외운 나는 쉴 새 없이 머릿속으로 탑승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모바일 체크인, 수하물 위탁, 항공권 검사, 보안검색대 통과, 터미널 대기, 비행기 탑승까지 상상 속의 나는 김포공항에서 수십 번이 넘도록 비행기를 타고 있었다. 물론, 보안검색대에 걸려 소지품 검사를 받거나, 갑자기 변경된 비행기 편으로 인해 탑승권을 재발급받는 최악의 상황에 대한 상상도 빼놓지 않았다.


그리고 대망의 부산행 비행기 탑승일. 15년 만에 오는 김포공항이었지만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김포공항은 내 상상 속 모습 그대로였고, 나는 이미 50번의 탑승 시뮬레이션을 마친 상태였다. 실제 탑승수속은 허탈할 정도로 쉬웠다. 내가 예측 상상했던 것에서 한 치의 오차도 발생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도 고개를 끄덕 일만큼 완벽하게 탑승수속을 마쳤고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윙~'하는 엔진 소리가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몸도 마음도 붕 뜨는 듯한 황홀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그 순간 상상의 호수 주민 모두가 나를 향해 박수를 쳐주었다. 마치 '잘했어'라고 칭찬을 해주는 듯이 말이다.




첫 만남, 첫 키스가 달콤한 것처럼 나에게는 '홀로 첫 비행'이 굉장히 달콤한 일이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나의 이야기를 보고 '국내선 비행기를 타는 별것도 아닌 일에 이렇게까지 유난을 떨어?'라는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예측 상상이라는 유난 덕분에 나의 처음은 항상 특별했다. '유난'은 나의 '노력'이었고 내가 맞춘'미래'는 노력에 대한 '보상'이었다. 내가 비행기 탑승 시뮬레이션을 하지 않았더라면, 홀로 첫 비행 날은 공항에서 헤맸던 안 좋은 기억을 가진 날이 됐을지도 모른다. 스스로의 인생을 특별하고 즐겁게 만들어가는 건 결국 나 자신인 것이다. 나는 그렇기에 오늘도 다가 올 미래를 상상하며 유난을 떨어본다. 또 다른 달콤한 처음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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