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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이령 Oct 21. 2022

피로의 씨앗

K-직장인의 삶

열심히 사는 것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내가 좋아하던 상상이 하루아침에 피로의 씨앗이 돼버린 건, 직장생활을 하면서부터였다. 사회 초년생 때 나의 목표는 '가늘고 길게'버티기였다.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 없이 물 흐르듯 사는 것이 나의 바람이었다. 하지만 상상이란 녀석은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업무처리를 하다 보면 '이렇게 하면 좀 더 좋을 것 같은데?', '이런 방안이 효율적이지 않을까?'라는 아이디어들이 쉴 새 없이 떠오르고는 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실무에 적용시키다 보니 어느새 나는 굵어져 있었다. 굵어진 나무는 쓰임새가 많아지는 법. 그렇게 나의 업무는 점점 더 늘어만 갔고, 두 번의 조기 진급을 겪었다. 하지만 직급에 맞는 급여 인상은 없었다. 한 마디로 내 노동력에 대한 보상은 없었던 것이다. 그저 큰 책임을 요하는 허울만을 줬을 뿐. 나는 내 상상의 호수가 회사에서 만큼은 그 기능을 멈추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 삶에 노크도 없이 들어온 '피곤한 상상'들이 나를 더 이상 갉아먹지 못하게 말이다.




코로나의 시작과 함께 회사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온라인 사업부'라는 새로운 부서가 설립된 것이다. 당시 온라인 사업부 신설은 나에게 있어 좋은 소식이었다. 그동안 온라인, 오프라인 모두를 담당했던 우리 부서의 업무를 나누어 가져 간다는 취지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드디어 업무를 좀 덜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차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오산이었다.


온라인 사업부에 들어온 경력직 김팀장은 모든 업무를 우리 팀으로 떠넘기기 시작했다.  '할 줄 몰라서' , ' 그동안 너희 팀이 해오던 일이니까'라는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업무를 덜기 위해 만든 부서가 오히려 애물단지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우리 팀 직원들의 업무는 더 가중되어만 갔다. 나는 이 사태를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었고, 분노로 인해 나의 '피곤한 상상'스위치가 자동으로 눌려버렸다. 그리고 머릿속에 쉴 새 없이 이 사태를 수습할 방안에 대한 상상이 맴돌았다. 자려고 누워도 그 상상은 사라질 줄을 몰랐고, 활성화된 교감신경으로 인하여 심장이 계속해서 '쿵쿵'뛰었다. 나는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았다.


"집에서는 진짜 일 생각 안 하려고 했는데.."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머릿속이 어지러웠던 나는 상상의 호수에 마음대로 침입한 '피곤한 상상'들을 글로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온라인 사업부에서 담당해야 하는 업무에 대한 정리 및 그것을 왜 온라인 사업부에서 진행해야 하는지에 대한 합리적인 사유에 대한 것이었다.


다음 날 회사로 출근 한 나는 '피곤한 상상' 뭉치를 들고 온라인 사업부와의 회의에 들어갔다. 논리적으로 정리된 합당한 사유에 회의에 참석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나는 '피곤한 상상' 덕분에 업무 분장에 성공할 수 있었다.




나는 '피곤한 상상'을 하는 것이 정말 싫다.

'피곤한 상상' 덕분에 결국 해피엔딩을 맞은 것처럼 보이겠지만, 결국 업무가 가중된 것은 나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온라인 사업부의 신입 팀장에게 실무 교육을 시켜야 하는 것은 역시나 나였던 것이다. 이미 각오를 했던 바였기에 나는 흔쾌히 수락을 했지만, 문제는 신입팀장 김팀장의 마음가짐이었다. 김팀장은 업무에 대한 열의가 없었다. 나는 김팀장을 위해 업무 매뉴얼을 만들어주고 열정적으로 인수인계를 했지만, 김팀장은 배우려는 생각이 없었다. 일을 대신 해결해 줄 사람을 찾아다니던 김팀장은 결국 팀원 충원을 진행했고 아랫 직원에게 모든 업무를 떠넘겼다.


그런 김팀장은 결국 근무태만으로 인해 2년 뒤 권고사직을 당했다. 그리고 나는 나에게만 가중된 업무의 부당함에서 벗어나고자 스스로 회사를 박차고 나왔다. 열심히 살지 않았던 사람도 열심히 산 사람도 결국은 퇴사라는 같은 결과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나는 보상받지 못하는 곳에서는 열심히 사는 것이 바보 같은 일이란 걸 깨달았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피곤한 상상'을 멈추지 못한다. 그러기에 나는 찾아내고 싶다. '피곤한 상상'에게 '아이디어'라는 원래 이름을 돌려줄 수 있는 새로운 안식처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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