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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Oct 11. 2021

상처 준 사람은 없었다.

상처는 누구나 똑같이 아프다

“나는 나, 너는 너.

나는 너의 기대를 채워주려고 세상에 태어난 게 아니야. 

너 역시 나의 기대를 채우려고 살아가는 게 아니지. 

우리가 마음에 맞는다면 그건 놀라운 일이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상관없어.”

                                                                                       - 프리츠 펄스-


  의도치 않게 누군가에게 ‘개새끼’가 될 수 있다. 정말 잘해주었다고 자부했는데 어느 날 돌아온 “너 때문에 상처받았어”란 말은 뒤통수를 강하게 내리쳤다. 어째서일까? 무엇 때문에 상처받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배려하고 아끼고 챙기느라 수고했던 내가 그동안 상또라이짓을 했다는 후회감부터 들었다. 혼자 잘해주고 결국 상처받는 꼴이라니. 밤마다 나 때문에 상처받았다는 말은 가위에 눌린 듯 힘들고 아팠다. 마음은 데였고 억울했고 화가 났다. 한참 동안 자신을 괴롭힌 후에야 이유가 궁금해졌다. 진작에 물었어야 할 질문을 뒤늦게 하고서야 의문은 풀렸다.  

   

 친구 Q는 취미활동을 통해 알게 됐다. 동갑내기인 데다 같은 동네 그것도 엎드리면 코 닿을 거리에 산다는 것만으로도 친해질 이유는 충분했다. 좋아하는 것도 비슷하고 말도 잘 통하는 친구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Q의 흥 넘치는 밝은 에너지가 좋았다.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은 자꾸만 챙기고 싶은 마음도 들게 했다. 좋아하는 사람에겐 유독 이것저것 챙기는 성격상 나는 Q를 가족 이상으로 아꼈다.


 우정에 금이 간 건 무심코 던진 나의 충고 한마디 때문이었다. 자신을 부정하는 듯한 말은 Q가 느끼기엔 충고가 아니라 비수였다고 했다. 친구라면서 이해는커녕 존재 자체를 거부당한 느낌이 들게 했다고 자기는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게 없다며 상처받은 이유를 설명했다.    

 

 완벽한 친구의 모습으로 잘해주었다고 생각한 것은 말 그대로 착각이었다. 세상에 완벽이란 존재하지도 않지만 설사 존재한다 해도 기준은 오롯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잊었다. 친구 입장에서 생각한 적이 있었던가? 어쭙잖은 충고가 상처가 될 것을 과연 몰랐을까? 내 생각만이 옳다고 생각한 근거는 뭐였을까? “너를 위해서야.”라는 귀신이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해대며 나에게 맞추려 했던 것은 아닌지.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아파했던 나였다. 참으로 뻔뻔하게도 ‘나는 너를 너무도 잘 알아.’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가까운 친구라 무엇이든 다 알 것이라는 착각. 가족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속속들이 그 속내를 알 것 같지만 자신의 마음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내가 누구 맘속을 알 수 있을까? 어쩌면 알고 있다가 아니라 알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닌지.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영역 안에 산다. 자신의 영역만이 옳다. 누군가 내 구역의 법이 틀렸다고 하는 순간 상처받는다. 정작 상처 주는 사람의 나라에선 또한 그것이 맞지만 말이다. 서로 다른 영역에 살고 있으니 각자 구역의 법이 어떤지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자신의 법이 옳다고 주장하며 서로를 공격한다. 상처받은 사람만 있을 뿐 아무도 상처 준 사람은 없다.   

   

 가족 중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만든 나머지 가족은 상대의 상처와 아픔을 이해하지 못한다.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희생일 것이라는 생각은 눈꼽만큼도 하지 않는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상대의 감정을 쥐락펴락했던 많은 사람이 자신이 상처를 준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게 상처였다고?”라고 반문하며 “뭐 그랬다면 미안.” 정도로 쉽게 넘긴다. 작년 이맘때 날씨가 어땠는지 기억 못 하는 것이 당연하듯 누군가의 상처는 그저 지나가는 소나기가 되어버린다. 수많은 날을 눈물 흘려가며 참아냈던 아픔이 타인에겐 그저 별것 아닌 일이 된다는 사실에 화가 나기도 한다.      


 상처를 받은 것도 서럽지만 정작 상처 준 사람이 없는 현실은 우리를 더 아프게 한다. 나 역시 Q에게 그랬다. 도대체 왜 상처받았는지 처음엔 이해되지 않았다. 오히려 상처받은 쪽은 나라며 아파하며 억울해했다. 우린 서로 상처 주지 않았다. 상처받은 사람만 존재할 뿐이다. 


 어린 시절 나를 힘들게 했던 아빠 역시 사랑했던 기억만 갖고 계셨다. 내가 원하는 방식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사랑이 아니었다고 부정하기도 어렵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상처받은 사람, 갑자기 실직하게 된 가장, 시험에 떨어진 학생, 가난에 찌들어 돈 많은 사람의 거들먹거림에 아파했던 사람에게 상처 준 사람은 과연 누굴까?      


 타인으로부터 받았다고 굳게 믿었던 수많은 상처는 어쩌면 나 스스로 가져온 것일 수도 있다. 내면에 숨어있던 자신을 향한 비난과 수치심은 적절한 상대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밖으로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상처 주는 사람이 자신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행여 알아차린다 해도 외면해 버린다. 적절한 대상을 찾아 호기롭게 비난과 원망을 쏘아 올린다. 그렇게 우리는 타인이 날린 화살에 한 번 넘어지고, 스스로 던진 돌에 맞아 두 번 쓰러진다.      


 억울해할 필요까진 없다. 우리 역시 타인의 상처를 외면하며 살고 있으니 말이다. 공감과 위로의 말을 스스럼없이 날려보지만 실상 상대의 아픔은 모른다. “괜찮아질 거야. 다 그러고 살잖아. 힘내.”라는 입에 발린 소리를 얼마나 남발하며 살았는가. 


 위로도 되지 않을 말로 상대의 상처를 평가절하한 경우도 허다하다. 유일하게 남의 것보다 내 것이 더 커 보이는 것이 상처다. 자칫 누군가를 위한 말이 또 다른 상처가 되기도 하는 이유는 거짓말처럼 남의 상처는 작아 보이기 때문이다.     


 따뜻한 위로를 받고자 한다면 누군가 넘어진 내게 손을 내밀어 주길 간절히 원한다면 나 역시 다른 사람의 상처는 상대의 안경을 끼고 봐야 한다. 내 눈에 작은 돌멩이로 보였던 상처가 얼마나 큰 바윗덩어리인지 알아봐 주는 것이 바로 위로의 시작이다. 


 간혹 저 사람과는 잘 통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경험으로 볼 때 그 사람은 내 얘길 잘 들어주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어떤 충고도 없이 그저 들어 주는 사람. 사실 그게 전부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해줄 것이 없다. 자신의 아픔을 꺼내어 부수고 조각내어 버릴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 들어주는 것이 가장 큰 위로가 되기도 한다. 실컷 울 수 있도록 어깨를 내어주고 토닥여주는 작은 손길에 상처는 치유된다.    

  

 우리는 살면서 크고 작은 상처를 주고받는다. 실상 주고 싶지도 받고 싶지도 않다. 때론 주는 사람은 없는데 받았다는 기억만 하는 경우도 많다. 인생사 그렇다. 무심코 누군가에게 던져놓고 나 몰라라 하는 상처는 없는지 돌아보자. 각자의 영역에 악의는 없었더라도 침범한 적은 없는지, 상대의 아픔을 위로한답시고 상처를 덧나게 하진 않았는지 질문해 봐야 한다. 


 나도 옳고 너도 옳다. 내가 아프듯 너 역시 아플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인정하고 위로하고 보듬으며 각자의 상처를 달래주어야 한다. 상처는 크기와 상관없이 모두에게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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