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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Oct 05. 2021

내 인생의 B컷과 공존하기

완벽하지 않으니 인간이다.

    

 수년 전 친구와 오사카 여행을 했었다. 「주택전시관」에서 기모노 체험을 하는 중이었다. 다른 나라의 전통 의상을 입어 볼 기회가 많지 않아 사진에 담아내기 바빴다. 셀카봉이 등장하기 전이라 서로의 사진을 찍어 주거나, 길지도 않은 팔을 멀리 뻗어 셀카를 찍어야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일본인 할아버지가 둘의 사진을 찍어 주겠다고 카메라를 반강제로 뺏어 들었다. 아쉬웠던 차라 쑥스럽지만 포즈를 잡고 활짝 웃으며 사진을 몇 장 찍었다. 되지도 않는 발음으로 “Thank you! 아리가또!”를 연발하며 카메라를 건네받고 사진을 확인하는 순간 뒤로 넘어갈 뻔했다. 


 사진 속의 우리는 러시아의 마트료시카 인형이었다. 약간의 과장을 섞자면 머리 반 몸통 반 5등신 사진이었다. (정말 그랬다.)아무리 키가 작다지만 이렇게 짧게 나올 리가 없다. 더군다나 친구는 나와 다르게 키도 큰 편이다. 사진에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진짜 누가 볼까 무서운 사진이었다. 어쩜 이리도 사진을 못 찍을 수 있냐며 그날 친구와 나는 온통 사진 얘기만 했었던 기억이 난다. 정말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굴욕적인 사진이었다.     


 누구나 흑역사는 있기 마련이다.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혹은 보여서는 안 되는 모습)을 감추고 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다. 나처럼 짜리몽땅하게 나온 사진을 죄다 없애버리고픈 사람도 있을 테고, 길을 걷다 하필 사람들 제일 많은 곳에서 민망한 자세로 넘어진 기억도 있다. 시험에 당연히 합격할 것처럼 큰소리쳤는데 보기 좋게 떨어졌던 순간, 직원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개망신당한 경우도 허다하다. 그때마다 ‘딱 여기까지만. 제발 다른 사람은 몰라야 해.’를 마음속으로 얼마나 간절히 외쳤던지. 


 성공한 사람이라고 다를까? 그야말로 전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거물들을 생각하면 그들에게는 뭔가 영웅적인 특별함이 있을 거로 생각한다. 히어로 영화 속 주인공처럼 특별한 재능, 남들과는 다르게 살아온 배경이 있지 않을까? 영웅들의 인생엔 분명 극적인 사건이 즐비했을 것으로 상상한다. 


 나이키의 창업자 필 나이트는 일본에서 신발을 떼다가 육상 경기장을 돌아다니며 좌판에서 운동화를 팔던 보따리장수였다. 테슬라의 CEO 일론 머스크는 불우한 어린 시절로 유명하다. 스티브 잡스는 괴팍한 성격으로 흑역사가 많기로 유명한데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다. 보이는 모습이 당신의 전체가 아니듯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타인의 모습 역시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니다.      


 과거에 있었던 암울한 사건이 인생의 전체 컷은 아니다. 지금의 성공이 미래에 대한 보장으로 연결되지 않기도 한다. 굳이 아름답게 포장하려 애쓸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힘들고 아프고 초라한 모습을 숨기기 위해 잘 지내는 척 가면을 쓰고 살다 보면 정작 진짜 내 모습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버텨내고 일어서고 치유하는 데 써야 할 에너지를 엉뚱한 곳에 축내서는 안 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들도 자신을 포장하는 것에만 몰두하지 않기에 어두운 과거를 딛고 일어설 수 있었다. 타인보다 더 잘해야 하고 더 멋진 사람으로 보여야 하는 이유는 없지 않은가? 진짜 자아의 모습을 바라보고 조금은 어설프고 어리석었던 나였어도 그것조차 내 모습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고 굳이 날 것 그대로를 보여주라는 얘기는 아니다. 말했듯이 누구나 흑역사는 있기 마련이고 내 인생의 B컷도 나와 공존하고 있다는 자기 인정이 필요하다.     


 카를 구스타프 융은 자기 인생의 B컷을 마음 놓고 전시해도 되는 공간을 ‘테메노스(Temenos, 심리적 그릇)’이라고 불렀다. 자신의 열등한 자아가 신나게 놀 수 있는 공간인 자기만의 방을 말한다. 

 자유롭지만 보호되는 공간인 ‘테메노스’는 고대 연금술에서 기원한다. 연금술사들이 사용했던 ‘헤르메스의 그릇’은 재료를 담고 잘 밀봉하여 열을 가하면 금으로 변하게 만드는 비밀 용기였다. 여기서 핵심은 그릇의 입구를 빈틈없이 막는 것이다. ‘헤르메스의 그릇’과 ‘테메노스’의 공통점은 바로 밀봉이다. 어떤 불순물도 섞이지 않아야 순금을 얻듯 우리 내면의 공간에서도 자신의 의지와 감정이 불필요한 것들에 오염되지 않도록 잘 숙성시켜야 한다. 

 융이 이야기하는 ‘테메노스’에서는 어떤 행동도 비난하는 사람이 없으며 잘못을 저질러도 용서된다. 다른 사람의 눈치도 볼 필요 없으니 그 안에서의 나는 솔직할 수밖에 없다. 자아는 더욱 건강해진다. 진짜 자아를 건강하고 풍성하게 만드는 것은 안 좋은 모습을 숨기는 것이 아닌 함께 데리고 가야 할 또 다른 나의 모습임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한동안 곁을 떠났다 부활한 싸이월드를 기억할 것이다. 당시 잘 나가는 가수들의 BGM과 서로 주고받았던 도토리에 대한 추억 그리고 자신만 볼 수 있었던 일기장도 기억난다. 지금도 자신만의 또 다른 공간에 감추고 싶은 비밀을 숨겨 놓은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감춰놓은 모습을 부정하는 데에만 급급하다면 진짜 자아와는 영영 결별하게 될지도 모른다. 


 열등 페르소나를 벗어버리고 그다지 아름답지도 우아하지도 훌륭하지도 않은 작고 초라한 자신의 모습까지 인정할 때 삶의 권리가 온전히 자신에게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흑역사면 어떠한가? B컷이면 또 어떤가? 어차피 완벽한 삶이 없듯 A컷만 존재하는 인생도 없다. 어둠이 있어야 빛의 값어치가 올라가며 조연이 받쳐줘야 주연도 돋보인다. 인정하고 함께 살다 보면 내 인생의 B컷도 꽤 괜찮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느 구석진 사진 파일에 조용히 감춰뒀던 오사카 여행 사진을 꺼내 본 날 몇 년 만에 깔깔거리고 웃었는지 모른다. 다시 봐도, 누가 봐도 웃긴 사진이 분명했다. 그날 이후로 우울할 때마다 사진을 꺼내 봤고, 그때마다 위로까진 아니어도 배꼽 잡고 웃을 기회를 줬다. 지나간 사진 속의 몽당연필 같은 나는 우스꽝스럽지만, 그 모습도 나다(좀 왜곡되긴 했지만). 

 웃음을 주고 잠시지만 우울함을 떨쳐버리게 만드는 대단한 B컷이지 않은가? 지우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게 뭐라고. 어차피 지나간 사건이고 지금도 또 다른 흑역사를 만들고 있는데 말이다.


 당신 인생의 B컷은 무엇인가? 잘 들여다보면 흑역사가 아니라 데리고 살아도 나쁘지 않을 또 다른 자신의 모습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누가 아는가? 당신을 웃게 할 힘이 되는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      


“누구나 그래. 너만 그런 거 아냐. 정신없이 흔들리고 실수하고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웃어. 청춘은 원래 그래. 미숙해서 아름다워.” -정민선, 「어떻게 숨길까, 지금 내 마음을!」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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