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아니다. 지나온 길이 지뢰밭이어도 어떤 방식으로든 무사히 지나오지 않았나. 이런 부정적인 생각은 나를 끌어내리기만 할 뿐이다. 가끔 느끼는 우울감은 자기 연민이라는 감정을 통해 보다 밝은 미래를 동경하여 꿈꾸게 하였지만 습관적인 우울감은 반대로 자기 연민에 깊게 빠져 허우적거리면 더 깊은 곳으로 밀어 넣는다. 그래서 지금과 같이 아주 잠깐의 방심에도 우울감은 친근히 존재를 드러내어 회생되지 않을 어두운 바닥으로 나를 끌어내리려 한다.
한 순간의 감정에 휩쓸리지 말자. 이미 지나간 일, 구태여 쓸데없는 가정을 해가며 아쉬워도 말고, 후회도 말자. 과거의 일들이 마냥 미워도 직시하고 받아들이자. 이미 힘든 일들은 모두 지나왔으니 그때의 나를 외면하려 하지도, 마냥 불쌍해하지도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보자.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뇌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언제까지고 어두운 과거에 갇혀 스스로를 불쌍히 여길 수만은 없었다. 어릴 때야 그렇다 치지만 이제는 내 몸 하나 건사해야 하는, 어쩌면 또 다른 가정을 이룰지도 모르는 어엿한 성인이지 않나.
멋 모를 때 세상은 나에게만 잔인하다고 속으로 원망했지만 그럴 때마다 정말 내 인생이 불행해지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 허송세월하다가 시간을 흘러 보냈다. 세상에 맞부딪혀 보니 사람들에겐 저마다의 사연이 있었다. 그 슬픔의 색 또한 가지각색이었다. 과거가 어둡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마냥 우울에 잠겨 있지 않았다.
그 누군가는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비로소 마음이 평화로워졌다고 했고, 또 누군가는 독한 마음으로 살아남았더니 덕분에 지금의 본인이 있을 수 있었다고 오히려 감사하다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당시에는 너무도 아팠던 기억들이기에 감사한 단계까지는 못 가도 아무렇지 않게 흘러 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적어도 더 이상 힘들지는 않을 것 같다. 보잘것없는 인생이라도 난생처음으로 쥐어 본 유일한 나의 것이니까. 상처 주는 이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나의 작은 세상을 안전하게 지키고 싶다.
무조건 이겨내야 한다는 자기 강제적인 생각은 아니다. 그저 이 세상에는 아직 우리가 할 수 있는 다양한 일들이 있고, 재밌는 것들 천지니까 과거가 아닌 미래를 보고 살다 보면 과거를 덮을만한 행복한 추억들이 생길 것이라는 희망 정도. 그러니 그 머지않은 미래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대담하게 과거를 마주 보는 연습과, 더 나아질 것이라는 지금의 상황과 나 자신을 향한 믿음뿐.
간신히 우울의 늪에서 빠져나왔다. 그깟 말 한마디에 또다시 과거에 얽매이기에는 오늘은 행복한 날이잖아. 그동안 수고한 나 자신을 위해 오늘만큼은 아무 생각 하지 말고 푹 쉬자. 그래 난 최선을 다했고 앞으로도 더 최선을 다 해 과거 따윈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행복할 거야.
그제야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졌다. 확 풀어진 긴장에 눈이 다시 한번 감겼다. 안 그래도 실컷 울어서 진이 빠져 있던 터라 금방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그날, 꿈에서 과거의 기억들을 훑듯 지나온 것 같다. 행복한 기억은 아니었지만 악몽도 아니었다. 그 기억들은 더 이상 나를 괴롭힐 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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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나한테 그랬잖아. "이기적인 년"이라고.
이제 정말 이기적이게 살아보려고.
과거의 나 자신을 양분으로 삼아,
그리고 당신을 거울로 삼아.
여태와는 다른 삶을 한 번 살아보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