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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운 Jul 12. 2021

장마와 함께 살아지기도 하겠습니다

   “기상청은 7월 2일 제주에서부터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될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역대 가장 늦은 장마는 1982년 7월 5일로, 이번 장마는 39년 만에 가장 늦은 장마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장마가 늦게 시작되었지만 올해도 여지없이 장마는 찾아왔다. 최근 잦은 비로 ‘이미 장마가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관측도 있었지만 지금부터 시작이란다. 기나긴 장마 소식에 누군가는 삶의 터전을 위협받을까 걱정하기도 하겠지만 또 누군가는 낭만적인 감성에 젖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장마의 기억은 기기묘묘했으며  장마가 한창이던 1996년 서울에서의 여름은 특별했다.

 





   참 이상도 하지? 장마가 계속되던 어느 날 아침, 비가 나에게 섣부른 안부를 물어왔어.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 다가왔을까? 짐작하겠지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야. 나, 지금부터 슬슬 발동을 걸고 할 일 할 테니까 너도 게으름 피우지 마! 하면서 기습적으로 머리를 들이밀더라고. 그러더니 창틀에 걸터앉기도 하고 현관에 발을 들여놓기도 하고 급기야는 좁은 단칸방에도 들어오려는 거야.


   “톡! 톡!”

일어나라는 신호야. 오늘은 일찍 하루를 시작할 거거든. 어제 하루 꾀를 부리고 쉬었더니 몸이 무거워졌어. 반기는 사람은 없어도 할 일은 해야 하는 거니까. 오늘, 너도 할 일이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맞지?

- 음, 맞아, 할 일이 있어... 어? 그런데 누구야, 뭐야? 뭐지? 이야기할 사람이 없는데... 누•구•니, 넌?


   “토독 토독 토독”

안녕? 나도 너처럼 힘들고 우울해서 말이야, 얘기나 할까 하고. 난 그제도 어제도 내렸던 지겨운 장맛비란다. 오늘도 죽죽 내릴 거야. 매일매일 똑같은 일을 하는 건 재미없는 일이지만 지금은 열심히 일할 때거든.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말이야.

- 그래? 그런 것 같구나.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 같아. 요즘 자주 보게 되어 별 감흥은 없지만 오늘도 죽죽 내릴 작정이라니 속은 시원하다, 다행이야. 누구라도, 뭐라도 옆에서 지껄여줘야 마음이 편해지거든. 조용하면 불안해져. 불안하면 회피하고 도망가고 싶어 지니까. 아쉽고 안타까운 일들만 생각나서 답답해지기도 하고. 그렇지만 좀 늦게 시작하면 안 될까? 일어나기 정말 힘들어. 난 요즘 좀체 힘이 나지 않는단다. 이러면 안 되는데 말이야.



   “후드득후드득!”

엄살 부리지 마. 하루를 늦게 시작하면 하루는 금방 가버리고 말아. 잔소리하는 사람, 채근(採根)하는 사람이 없다는 걸 명심해야지. 인간은 게으른 동물이라 가만히 놔두면 한 없이 늘어지고 쳐지게 돼 있어. 인간의 본성이 그런 거라고. 일어나, 창문 닫아야지. 나갈 준비도 해야 하고.

- 마음대로 해. 죽죽 내리든 좍좍 퍼붓든 쏴아 쏴아 쏟아내든 어차피 네 마음대로 할 거잖아. 너도 똑같구나! 생각해주는 척해놓고 네 할 건 다 할 거잖아. 뒤통수나 안치면 다행이지. 나도 지금껏 할 만큼 했어. 곁눈질하지 않고 주어진 일에 열심이었다고. 결코 게을러 본 적이 없어. 야근에 밤샘, 남들 하기 싫어하는 일까지 솔선해서 떠맡았다고. 다른 사람이 내 맘 같지 않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어. 일이 잘 풀리지 않을 거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고. 오죽하면 다 꼴 보기 싫어서  하루아침에 서울로 올라왔겠느냐고.


   “쏴아아~ 쏴아아~”

내가 비의 장막을 쳐줄게.

아무 말 말고 일어나 벽에 등을 기대. 그리고 10분 정도 나만 바라봐. 아니, 20분, 30분 하염없이 나만 바라보라고. 처음엔 쏴아아 소란한 내 소리에 네 마음도 소란하겠지만 점차 몽롱해지면서 가라앉을 거야. 지나간 일들은 이미 지나간 거야. 이유를 생각하고 곱씹어봐야 너만 손해야. 잊을 건 잊어야 해.

- (30분쯤이 흘렀다) 정말... 울컥 치밀었던 화가 조금 가라앉은 거 같구나. 그런데 이번엔 걱정이 앞서.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데 부산 촌놈에 지금까지의 경력은 별거 아니라고 우습게 보잖아.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이야. 멋있게 살고 싶었거든. 멋있게 살고 있다고 뿌듯하기도 했고. 펜을 칼처럼 휘둘러대기도 했지. 그래서 뭐? 무슨 상관이야? 난 지금 멋있는 일을 찾는 게 아니잖아. 그냥 내가 일할 수 있는 곳을 찾고 있는 거라고.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 거야?


   “쓰스스스 솨솨솨 퐁퐁퐁 통통통”

네 마음 충분히 이해해. 나도 말이야, 처음에는 타는듯한 대지를 적시며 풍성한 수확을 기도했어. 사람들 마음에도 낭만을 채워주고 싶었지. 그런데 내 꼴을 봐, 딱딱한 지붕과 시멘트 바닥을 지나 하수도 시궁창으로 처박혀 쓸모없이 강으로 바다로 쓸려가 버리잖아. 사람들도 투덜대며 나를 원망해. 나도 꿈이 많았어. 지금도 최선을 다해 나를 버리고 있는 중이지만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걸. 내 일을 열심히 할 뿐이지만 계속할 수가 없어. 난, 조금 있으면 끝이 나겠지. 그렇지만 너는 희망이 있잖아. 다시 시작하면 되는 거니까.

- 네가 왜 쓸모없다는 거야? 그래도 너는 바다로 가잖아. 너는 어려운 순간들을 참고 버텨서 마침내 바다를 만나는 거잖아. 너는 드디어 자유를 찾는 거라고. 자유라는 고요 속에서 마음껏 유영하다 어느 날 너는 다시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오를 거잖아. 너는 또다시 쓸모를 찾게 될 거고. 너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또르르 통통 통통”

히히, 웃긴다. 조금 전까지 힘들다고 툴툴대더니 나를 위로하는 거야? 내게 다시 시작하는 거라고, 그동안 잘 참았고 자유도 누리는 법이라고 얘기하고 있는 거냐고? 말 아주 잘했어. 그건 네게도 해당하는 말이니까. 희망을 가져. 무사히 일 보고 오라고 잠시 쉬어줄게. 히히, 너 참 재미있는 친구로구나!

- 하하하, 내가? 감히 내 주제에 누굴 위로한다고, 참. 그래, 재밌다 재밌어. 회피할 수 없으니 즐겨야겠지? 그렇지 않으면 투쟁을 해야 할 텐데, 그건 너무 힘든 일이야. 그나저나 오늘은 좋은 일자리가 눈에 띄어야 할 텐데... 나, 갔다 올게...


   (나는 먼저 PC방으로 향했어. 구인광고를 뒤져보고 메일도 확인해. 경력에 맞는 자리가 있으면 거기에 맞게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수정해 제출하지. 그리고 도서관으로 향했어. 책도 찾아보지만 무엇보다 정기간행물실에서 할 일이 많아. 신문과 잡지를 볼 수 있고 정보도 얻을 수 있어. 내가 쓴 기사를 찾아 카피를 해놓기도 해야 해. 그걸 요구하는 데가 있으면 자료를 보내야 하거든.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어. 시간이 좀 있는 날은 한국외국어대학교 캠퍼스를 가거나 중랑천변을 걸어 다녔겠지만 비가 오기도 하고 배가 고파서 서둘러 집으로 왔어)



   “타닥 탁탁 후드득 통통”

왔어? 야야야, 그런데 여기 옥탑방 베란다 지붕이 석면 슬레이트야? 플라스틱이야? 와,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춥고, 완전 날림이잖아. 여기 무허가지? 세상에 어쩜, 이런 데를 세를 주니? 어이가 없네... 참참참, 빨리 온 거 보니까 네가 기대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은 모양이지? 힘내라고. 그나저나 오늘도 또 똑같은걸 사 왔네? 어쩌려고 그래?

- 오는 길에 동네슈퍼에 들러 막걸리 2 통과 두부를 사 왔지. 배 고파, 오늘의 유일한 끼니야. 돈이 없으니까 할 수 없지. 백수생활이 의외로 길어질 수 있으니 돈을 아껴야 해. 근근이 생활할 수 있는 돈만 들어오는 상황이니까. 그리고 술은 말이야, 취하지 않으면 말똥말똥 긴긴밤이 너무 길어서 힘들더라고. 그리고 옥탑방은 당연히 무허가일 거야. 그나마 지방에는 가정집의 문간방 하나를 세 주곤 하는데 서울에선 지하와 옥탑방을 세를 주더라. 수평과 수직구조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야.


   “쓰쓰쓰 쏴아아~콸콸콸”

하여튼 힘들겠다. 서울은 힘든 곳이구나. 많은 차별이 존재하는 것 같아. 어~이, 촌놈, 잘 버틸 수 있겠지? 네가 선택한 길이잖아.

- 그럼, 어떻게든 해야겠지. 자신감 하나는 짱짱했는데 말이야.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라고, 항우의 기세처럼 하늘을 찔렀었지, 하하. 그런데 서울살이 한 달만에 자꾸 마음이 가라앉아. 자신이 없어. 두렵기도 하고 말이야. 물속 깊이 내려가면 바다는 더 이상 푸른빛이 아니래. 하늘은 기억 속에만 존재하고... 나도 가끔 그런 느낌을 받아. 내 마음이 너무 조용해지거든. 그 고요 속에 머물고 싶어져.


   “스으으 스으으”

오호! 한 달만에 득도를 하셨네? 불안하고 두렵다더니 오히려 고요를 배우셨다? 나, 참... 내가 가장 힘든 게 그거였어. 가장 힘들 때가 바다로 흘러가 바다 맨 밑에 있을 때야. 왜냐하면 다시 올라와야 할 이유를 찾아야 하거든. 완벽한 때를 기다린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야.*) 너는 그때를 찾을 수 있을 거야.

- 그래, 맞아. 다시 올라가야 할 이유를 찾으러 지금 여기 내가 있노라! 완벽한 때는 머지않아 올 것이니 조금만 버티자! 나의 진가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을 거야. 나는 비상할 수 있다! 나는 잘될 거다!



   “톡톡톡 톡 톡톡톡 톡”

왜 아니겠어? 살짝 기분이 오르셨네? 나도 너와 이야기하다 보니 기분이 좋아졌어. 나이스~, 아주 좋아. 몸도 가벼워졌고. 일주일을 쏟아냈더니 말이야. 그 말은 곧 나는 물러날 때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해. 너는 다시 올라갈 때! 나는 물러날 때!

- 그렇게나 됐나? 섭섭한걸. 나는 너와 이야기하기 전부터 네가 좋았어. 유일한 친구였지. 너를 바라보면 편안했고 네 소리의 다른 결과 질감은 멋진 음악이 되었어. 너는 훌륭한 오케스트라야. 정말 고마웠어. 게다가 이런 멋진 대화라니... 잊지 않을게. 너랑 이렇게 살아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충분히 살아질 것 같단 말씀이야, 하하하.


   (밤새 도란도란 비와 나의 이야기는 계속되었어.)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날은 이미 개었고 하늘은 말갰어. 무슨 일이 있었냐고 누군가 물어오는 듯 했지. 장마가 그쳤으니 더위는 기승을 부릴테고, 나는 이 빌어먹을 옥탑방에서 벌겋게 익어갈수도 있겠어. 그나저나 이 녀석은 아직 바다에 당도하지 못했을테지. 힘든 시간을 버텨내고 있을거야. 우리가 이야기한 것처럼 이것만 기억하자, 다시 올라갈 이유를 찾자. 완벽한 때를 기다리자. 그리고 마음의 고요를 즐기라. 한참을 되내었어.
1996년 여름이 장맛비와 함께 지나가고 있었어.






*) 표지 사진 : 폴 킴의 Rain 커버 이미지.

*) 1988년 제작된 <그랑블루 (원제: Le Grand Bleu)>의 오마주.

가장 힘든 것은 바다  밑에 있을 때야. 왜냐하면 다시 올라와야  이유를 찾아야 하거든. 물속 깊이 내려가면 바다는  이상 푸른빛이 아니고, 하늘은 기억 속에만 존재하고, 남은 것은 오직 고요. 고요 속에 머물게 되지."   ‘자크'역의  마르바의 명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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