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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운 Oct 25. 2022

물금에 대(對)하여

그리움의 실체에 닿아도 그리움은 남아

  막연했던 그리움이 어느 순간 돌출하여 조급해질 때가 있다. 그리움이 가슴 깊은 곳에서 오랫동안 발효와 숙성을 거듭해 온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그리움의 끝자락에 손이 닿았다고 생각할 즈음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허무의 느낌과 바스러지는 소리를 동시에 들었다면 조급함의 강도는 커지고 갈망으로 이어지고 만다. 갈망은 그리움의 실체에 닿아야만 비로소 해소되는 것이다.

 

  문득, 어릴 적 다니던 국민학교엘 가보고 싶다고 생각 든 것은 그런 이유였다. 송정 바다의 짜고도 비릿한 냄새를 맡은 게 화근일 수도 있었다. 부산역에서 출발하는 열차 시각은 오후 3시 50분. 언니와 나는 송정 바다를 지나 양산의 댑싸리 밭과 황금색 코스모스 밭을 구경하고 있던 중이었다. 오후 2시쯤 되었을 거다. 양산까지의 일정이 계획된 것이었으니 천천히 부산역으로 가서 차 한 잔 마시다 열차에 오르면 될 일이었다.

 "여기서 10분이면 되는데 국민학교에 가보면 안 될까?"

 "그러지, 뭐"

나는 한마디를 불쑥 던졌고 언니는 너무도 쉽게 받아들였다. 언니도 그곳에 가보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추억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고작 3학년의 한 달을 지날 무렵 부산으로 이사를 갔는데, 그 후로 45년이 흘렀는데, 기억인들 건재할 것이며 학교의 옛 모습인들 남아 있는 게 있을까. 그저 학교를 둘러보며 이곳이 내가 사회로의 첫 발을 내디뎠던 곳이구나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예전에는 없던 뒷문을 통해 학교로 들어서는 순간, 옛 기억들은 생생히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래, 그래, 여기 건물의 중간 길을 따라가면 수돗가가 있었어. 물을 먹기도 손을 씻기도 했던 곳이야. 본관 왼쪽에는 1, 2학년 교실이, 오른쪽에는 3, 4학년의 교실이 있었지. 오른편 건물 끝에는 꽃밭과 놀이터가 있었고 왼편 건물 끝에는 화장실이 있었는데, 푸세식 화장실은 없어졌네..."

나는 뛰는 듯 한달음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중얼대고 있었다.

 "특히 그 화장실 말이야. 냄새가 아주 지독했잖아. 숨을 참고 볼 일을 보다가 끝내 못 참고 훅 내쉬고 들이마시기라도 하면, 윽~ 생각만 해도 끔찍해. 게다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화장실 귀신 이야기가 있었잖아. 밑에서 하얀 손이 올라와서 빨간 종이 줄까? 파란 종이 줄까? 한다는... 하하하. 그런데 야, 너는 기억력이 참 좋다. 그게 다 생각이 나니?"

 "그럼, 내가 무용 연습을 했던 곳이 본관 뒷건물이었고 교무실은 본관 가운데였어. 엄마가 감자며 옥수수를 삶아서 선생님들 오후 간식하시라고 들통째 들고 나를 때 자주 따라다녔거든."

 "그래, 그건 생각난다. 노란색 들통..."

치맛바람이니 촌지니 하는 것들이 없던 시골 학교라 가능한 일들이었다. 선생님들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히 웃어주시던 얼굴을 기억한다. 엄청 맛있다며 뜨거운 감자를 호호 불어 드시던 모습도 떠오른다.


 어떻게 보면 나는 3년, 2년씩 학교를 더 다닌 오빠나 언니만큼 학교에 다녔던 셈이었다 오빠 언니의 입학식부터 학교 운동회나 소풍 같은 학교 행사에 엄마 손을 잡고 학교 구경을 다녔기 때문이다. 물론 방과 후 간식을 나를 때도 따라다녔으니까. 학교를 다니기 전에 이미 오빠 언니 따라 구구단을 외웠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학교 정문 왼편에서 항상 반갑게 손을 흔들어대던 히말라야시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보고 싶었던 것은 학교 정문 앞, '히말라야시다'라는 나무였다. 내 키 보다 10배는 더 커 보였던 히말라야시다. 엄청난 세월을 간직한 채 학교를 지키는 '당산나무' 같은 존재였지만 근엄하거나 위엄 있는 모습이라기보다는 '안녕, 나는 히말라야시다야.' 라며 반갑고 다정하게 먼저 인사해 주는 친절한 친구 같은 나무였다. 멀리서 보면 교문을 지키는 근위병 같은 꼿꼿한 자세였지만 교문을 지날 때면 항상 '스스스 쏴아~'하고 흔들리며 경쾌한 바람 소리를 들려주었었지. 그래서 그 나무 아래를 지나 등교를 하고 하교를 하는 시간이면 할머니로부터 옛이야기라도 듣는냥 고개를 좌우로 까딱까딱해 보였었다.


 학교를 지키는 수호나무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일까? 학교와 교문을 고치고 길을 새로 만드는 과정 중에도 히말라야시이다 나무 만은 흙에 다리를 굳건히 박은 채 건재했다. 모년 모월 모일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지 않은 채 어느 날 문득, 다시 만나게 되는 일이 이리도 가슴 벅찬 일이던가, 나는 순간 울컥했다. 재회의 순간이 너무 짧아서, 옛날은 너무나 멀어서, 그리고 영영 이별일 것 같아서...


  그래서였다. 학교 정문을 걸어 나오며 나는, 참을 수 없는 허기를 느꼈다. 옛날이 빠져나간 자리는 허허로웠다. 코스모스가 하늘거리던 논둑길이었을 자리에 밀면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거라도 먹어야 텅 빈 마음속을 채울 수 있을 듯했다. 여유롭게 비빔밀면 물밀면을 시켜놓고 뜨거운 육수를 주전자에서 따라 후루룩 마실 때였다.

 "너, 열차 시간이 언제랬지?" 언니가 물었다.

세상에, 한가로이 밀면을 먹고 있을 일이 아니었다. 서툰 감정에 빠져 가야 할 시간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거다. 나는 밀면이 포장되기를 기다렸고 언니는 학교 후문에 세워둔 차를 향해 전력 질주를 했다.

 '세상에,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야. 암수술을 하고 쉬고 있는 언니를 무리하게 달리게 하다니... 철없는 오십 대가 아닌가...'


언니의 말대로 물금역을 지나며 과속 중인 차 안에서 사진을 찍었다. 마음처럼 사진도 흔들렸다.


  "생전 안 하던 과속을 하게 생겼네. 1년 동안 제대로 몰지도 못한 차, 오늘 함 씨게 달려보자!"

내 걱정을 의식한 것인지 언니는 한껏 명랑한 척 소리를 높였다.

 "시간 안에 갈 수 있으니까 저기, 저기 물금역 사진도 찍고 여기저기 다 보면서 가라."

우리는 옛날 11살, 9살  물금을 떠나오던 나이로 돌아가 다시금 옛날이야기를 하며 물금을 지나가고 있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지나가는 가로수처럼 수많은 얼굴이 지나갔다. 동부 일대 논을 대부분 소유하고 있던 상경이네와 현애네는 보상을 받고 큰 부자가 되었을 것이다. 연탄 가게를 했던 순미네는 일찌감치 문을 닫았을 것이고 무용 동작 실수가 잦아 야단을 맞던 진미는 의젓한 중년이 되어있겠지. 이발소를 하던 경훈이네 여관을 하던 원호네도 오래전 그곳을 떴다는 소리를 들었었다. 부산의 고등학교를  다녀야 했던 미옥 언니와 경숙 언니는 통학이 어려워 우리 집 내 방에서 함께 잠을 잤었다. 아침과 점심 도시락만 챙겨주고 야간 자습하고 돌아오는 아이들 잠만 자게 해 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고 1년 간 우리 집에서 하숙을 하였는데, 어머니는 저녁 도시락에 과일 간식까지 살뜰히 챙겨주셨었다.

 "사람이 어째 야박하게 딱 잘라 그것만 할 수 있냐? 도시락 싸는 김에 더 싸고 우리 먹는 김에 같이 먹는 거지. 사람의 정리가 그런 거지..."

어머니의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하는 그 정 때문에 도시락 9개의 전설이 생긴 것은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나는 덤으로 밤새 졸며 공부하는 미옥 언니를 깨워주는 사감 역할과 가끔 쥐가 나서 힘들어하는 경숙 언니의 다리를 주물러 주는 간호사 역할도 했었다.


  그리고 가슴 아프게 기억되는 선명한 얼굴 하나. 고아원에서 생활하던, 머리카락이 하얗고 눈썹마저 하얬던 아이, 이난영. 깊은 숲이나 늪 어딘가에서 낯선 이의 눈에 띌까 홀로 숨어 생활하는 신비로운 흰 사슴 같았던 아이. 고아원 아이들에게 배급되었던 노란 술빵을 나눠주던 심성 고왔던 아이... 지금은 울지 않고, 주위 사람들로부터 놀림받지 않고 꿋꿋하게 잘 살고 있겠지. 보고 싶다 그립다는 말로도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 울컥울컥 치밀어 올라 먹구름이 되어 하늘을 덮고 있었다.


  물금(勿禁)이란 곳에, 물금국민학교에 발을 디딜 때만 해도 분명 그리움의 실체에 닿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해소되지 않고 앙금처럼 남아있는 갈증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리움의 실체는 내 어릴 적 가졌던 최초의 꿈이 시작되었던 곳, 가족 이외에 처음으로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이 살던 곳, 드넓은 논과 밭과 낙동강이 내 호흡과 함께 뛰던 곳을 가보는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리움은 그 대상을 본다는 행위만으로 해소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움은 만남을 전제로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리움은 그리움만으로도 소중하고 그리움을 가슴 한 편에 간직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그리움 한 조각, 물금에 놓아두고 왔다. 아마 그것은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움이었을 것이다.




<물금역에서>


아홉 살, 엄마 손 잡고 떠나온 이삿길.

더디 오는 완행열차를 기다리며

잘 가라 손 흔드는

아지랑이 무리를 언뜻 보았을 것인데

가게 될 곳이 주는 기대와 설렘에

넘어질 듯 뛰어가 열차에 을 실었다.


길에서, 언덕에서, 강둑에서건

바람이 이끄는 대로 뛰어다녔고

구름이 전하는 그림동화에 마음을 맡겼으며

江이 머금은 오래된 전설을 들으며 자라났는데

떠나며 나는, 아쉬움도 미련도 없이

조용히 버리고 열차를 달려왔을 것이다.


그렇게 버려진 것들은 조용했고 침묵했다.

지워졌고 초라해졌고 쇠락해서는

부서지고 고쳐지고 다시 지어졌으나

아팠겠다.

쓸쓸했겠다.

오지 않는 옛 벗을 기다리며

비 오는 날, 젖은 어깨는 얼마나 처연했을까?

오는 사람 없이 지키는 밤은 얼마나 외로웠을까?

지나가는 열차만 보고 또 보았을 테지.

산자락 휘돌아 내리는 안개라도 잡고

안부를 물었겠지. 무심하다 했겠지.


그러하므로 다시 마주한 오늘,

이 슬픔은 어디에서 오며

어디에서부터 차오르는지 나는 알 수 있단다.


가벼운 아픔은 소리가 나지만

깊은 슬픔은 낮게 가라앉아 침묵하는 법이거든.

나 역시 그동안 침묵해 왔기에 아는 것이거든.

나도 아팠어.

너무 쓸쓸했어.

눈물이 났지만 많이 참았는걸.


이제는

떠나보낼 사람도 만나야 할 사람도 없는

어떻게 지냈느냐 물음도 어색한

물금역에서

너나 나나

정차하지 않고 지나가는 열차만 바라볼 밖에.


분명 그리움도 한 자락 바람에 실려

무심히

지나갔을 터인데.

분명 내 아름다운 청춘의 빛도

반짝였을 터인데.


나는 지금 침묵하는 중이거든.

침묵 속으로 도망가는 중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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