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민은 어설프게 묶인 밧줄이 더 풀기 힘들다는 걸 깨달았다. 매듭이 얼마나 개판인지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손으로 만져봐서는 알 수가 없다. 1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오랜 다툼 끝에 밀린 과외 아르바이트 비용을 받아냈고 그 돈으로 딸기 조각 케이크와 카페 모카를 사는 사치를 부렸다. 자취방에 도착하면 다운받아둔 미드를 보며 다음 날 아침까지 밤을 지새울 계획이었다. 그런 부푼 꿈은 이 깡마른 일본인 때문에 끝나고 말았다. 화장실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더니 식칼을 들이댔다. 그녀는 저항 따윈 포기했다. 달리기도 느리고 근력도 약하다. 괜히 저항해 봤자 본인만 다치겠다는 계산이 먼저 따랐다. 조용히 의자에 앉아 남자가 오랜 시간 밧줄을 묶는 걸 기다렸다.
-차라리 테이프를 칭칭 감아요. 지겨워 죽겠어요.
-좀 조용히 좀 해봐. 이런 걸 해봤어야 알지.
-그러면 제 노트북으로 미드 좀 틀어놔 줘요. 그거 보면서 조용히 있을 게요.
남자는 예상보다 순진했다. 아니, 순진하다고 믿었다. 미드를 틀어주고 땀을 흘리며 밧줄을 묶는 걸 보며 소민은 별 피해 없이 끝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은 뭐 또 벌면 되니까. 몇 푼 가지고 도망가겠지 그리 생각했던 것이다. 그가 그녀의 전화기에 대고 손가락을 다 잘라버리겠다고 말하기 전까지 그런 안도에 빠져 있었다.
-잘 들어. 1시간 안에 김진석이 오지 않으면 네 손가락을 다 잘라버릴 거야. 알겠어?
억울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케빈 스페이시의 얼굴 따윈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갑자기 예전에 보았던 영화가 떠올랐다. 자른 손가락을 믹서기에 넣고 가는 영화가. 생과일주스를 해먹는 믹서기가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정신이 몽롱해졌다. 시퍼런 칼날이 아리게 느껴졌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요, 죄송한데 왜 저를 인질로 잡았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남자는 일본어로 뭐라 지껄이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넌 인질이잖아. 그냥 잡혀 있기만 하면 그만이야.
-그래도 이유를 알아야 덜 억울하죠. 제가 협조도 충분히 했는데.
-닥쳐. 1시간 안에 녀석이 학교로 오기나 바라라고. 아니면 다 잘라버릴 테니까.
공포보다는 화가 밀려왔다. 가만 보니 자신의 힘으로도 충분히 이길 수 있을 만큼 남자는 병약한 외형의 소유자다. 차라리 덤벼들걸. 괜히 가만히 있다 이게 뭐야? 그녀는 분노를 참지 못해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새끼야! 너 같으면 손가락이 잘린다는데 가만히 있겠냐? 이 씨발 새끼야!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왜 이러는 거냐고!
-닥치라고 했잖아!
-미친 새끼야, 너 같으면 닥치겠냐? 닥치겠냐고, 어? 누가 손가락 자른다는데 닥치고 있냐고!!!!
남자는 한숨을 내쉬더니 식칼을 침대 위에 박고 그 옆에 앉았다. 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손가락 안자를 거야. 그러니까 조용히 좀 있어. 넌 김진석 여자친구잖아. 어차피 녀석이 올 텐데 무슨 걱정이야. 난 그 녀석한테 복수하면 그만이야. 그러니까 조용히 좀 있어줘,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