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석과 일본. 생각을 거듭했지만 소민에게 떠오르는 답은 없었다. 이 일본인은 왜 한국에 왔을까. 그는 왜 김진석에게 복수를 하려는 걸까. 그녀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았을까. 그나저나 자신의 집에는 어떻게 들어온 걸까. 여자만 사는 보안 철통의 안심빌라니 걱정 말라며 다른 방보다 비싸게 돈을 쳐 받은 주인아주머니의 얼굴이 떠올라 다시 화가 솟구쳤다. 소민은 입으로 씨발을 연달아 발사했다. 교헤이는 신경쇠약증에 걸린 듯한 얼굴로 소민을 노려보았다.
-나 한국말 다 아니까 욕하지 마. 너한테 한 짓이 심한 건 알지만 욕먹는 건 짜증나니까.
-그쪽한테 한 거 아니거든요. 그리고 심한 걸 알면 왜 한 거예요? 앞뒤가 안 맞잖아요.
-이 방법이 아니면 김진석을 불러낼 수 없으니까.
-왜 못 불러내요. 친구도 있고 부모님도 있는데.
-부모님은 좀 아니잖아. 안 그래?
소민은 순간 부끄러워 입을 다물었다. 또 조그마한 소리로 씨발을 연발했다. 교헤이는 아예 침대에 누워 핸드폰만 바라보았다. 슬쩍 보니 CCTV 영상 같았다. 장소를 보니 박물관처럼 보였다. 소민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빠를 불러서 뭘 어쩌려고요? 죽이게요?
-놈이 하는 거 봐서. 일단 날 기억 못했으니까 몇 대 맞아야 되겠지.
남자의 정체에 대해 의문을 품을 즈음 시계는 30분이 지나갔다. 소민은 지루함에 연신 하품을 내뱉었다. 미드도 눈에 안 들어오고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났다. 탁자 옆에 놓인 비닐봉투 속 조각케이크에 자꾸 시선이 갔다. 이 인간은 왜 안 오는 거야. 원망은 일본인에게서 떨어져 진석을 향했다. 여자친구가 납치되었다면 택시라도 타고 재빨리 나타나야 되는 거 아닌가. 진석의 행동반경은 해봤자 역 2개 안팎일 텐데 너무 늦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시간 좀 늘려주면 안 될까요? 뭔가 사정이 있는 거 같은데.
50분이 지나자 초조해진 건 소민뿐만이 아니었다. 일본인의 안면도 잿빛으로 변했다. 그는 계속 일본어로 뭐라 중얼거렸다. 소민은 방광이 쪼여드는 기분이 들었다. 이 일본인 혹시 진석이 나타나지 않으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그녀는 다시 말을 했으나 남자는 핸드폰만 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반복을 거듭하면서 소민의 귀는 점점 빨개졌다.
-저기요, 이 씨발 쪽바리야, 시간 좀 늘리라고요. 내가 왜 그쪽이랑 오빠일 때문에 피해를 봐야 되느냐고요. 너희 둘이 푸세요, 괜한 사람 괴롭히지 말고. 제발 좀!
일본인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한국 여자들은 다 이런 거야? 지금 네 남자친구가 나한테 무서운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그건 걱정되지 않는 거야? 지금 너 굉장히 이기적이야.
-이기적인 건 당신이랑 오빠지. 당신 복수 때문에 왜 내가 묶여있어야 되냐고요. 난 오늘 미드 보면서 조각케이크랑 카페 모카 먹으면서 밤새우려고 했다고요. 네가 뭔데 내 즐거움을 방해하느냐고요. 얼굴이라도 잘생기면 몰라. 내 집에 사카구치 켄타로가 침입했으면 나도 안 이래요. 어디서 말라비틀어진 오징어 같은 게 들어와서 지랄인데 지랄은.
-날 이렇게 만든 게 네 오빠야. 아주 이기적이고 사악한 그놈 때문이라고. 이제 보니 왜 네가 그놈 여자친구인지 알겠다. 끼리끼리 만난다더니만 딱이네. 넌 지금 너만 생각하고 있지? 내가 김진석을 죽이던 말든 신경도 안 쓰이지?
-일본인 아저씨, 섬에서만 살아서 머리도 생선 수준의 지능이 된 거 같은데 잘 들어요. 오빠랑 나는 사귀는 사이지 결혼한 게 아니야. 내가 죽어도 오빠가 다른 사람이랑 연애할 수 있는 거처럼 나도 오빠가 죽어도 다른 사람 만날 수 있어요. 이건 쓰레기 같은 생각이 아니야. 지극히 현실적인 거지. 그리고 이 일은 오빠가 잘못한 거지 난 잘못 없어요. 그러니까 오빠랑 당신 문제야. 오히려 이 문제에 날 끌어들인 당신이 잘못한 거지. 알았어? 그러니까 천천히 기다렸다 오빠랑 만나고 이거나 풀어줘, 빨리!
일본인은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노트북을 닫더니 신경질적으로 탁상을 걷어찼다. 덕분에 새하얀 삼성 노트북은 난생 처음 바닥과 마주했다.
-정말 이기적이야. 한국 사람들, 너무 이기적이고 계산적이야! 어찌 그리 제멋대로지? 자기 유리한대로 해석하고 남에게 훈계하고. 정말 너무 짜증나, 너무!
툭하면 훈계질이나 해대는 건 일본 드라마 아니었나. 소민은 튀어나오려던 말을 삼켰다. 괜히 화를 돋아 봐야 손가락이 손을 떠날 확률만 높아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대를 칼로 쑤시던 남자는 램프를 걷어차고 발로 비닐봉지를 밟아댔다. 차마 조각케이크가 뭉개지는 걸 볼 수 없었던 소민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잘 들어. 김진석은 말이지, 정말 쓰레기 같은 인간이야. 내가 말해줄까, 그놈이 나한테 어떤 짓을 했는지. 왜 내가 그놈을 찾아 한국에 왔는지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