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헤이의 손이 소민의 뺨을 툭툭 친다. 소민의 시야에 얼굴을 찡그린 교헤이의 모습이 보인다. 그녀의 입가에는 침이 줄줄 흐르고 있다. 교헤이는 손에 묻은 침을 닦으며 정색한다. 소민은 허리에 힘을 주고 축 늘어진 몸을 세운다. 발음이 어설퍼서 제대로 집중하지 못한 건 물론 들은 내용도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래, 너한테 뭘 기대한 내가 바보지. 동정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왜 이런 선택을 해야 했는지 이해해주길 바랐어. 그런데 잠을 자?
-잔 거 아니거든? 약간 졸은 거거든. 그리고 그 발음 좀 어떻게 좀 해봐. 진짜 어설퍼, 너.
-일본인인데 어설픈 게 당연하지. 아무튼 그날 이후로 난 녀석을 잊으려고 그랬어. 이젠 갔으니까, 자기네 나라로 떠났으니까 다 끝났다고 여기려고 했다고. 그런데 잊히지가 않아. 녀석한테 당한 게 자꾸 생각나서 학업이고 뭐고 이어갈 수 없었어. 니시자와 그 이기적인 녀석은 내가 밤마다 흐느끼는 걸 정신병이 있다고 소문을 내버렸지. 내가 예민해지니까 같이 방을 쓰기 싫어서 그런 거야. 밤마다 꿈에 녀석이 나타났어. 노란 머리에 뿔테 안경! 그 개 같은 자식이 했던 가장 끔찍한 놀이가 뭔지 알아? 숨바꼭질이야. 밤새 기숙사 안에서 도망 다녀야 했어. 녀석은 자기한테 잡히면....... 잡히면 누나 사진을 찢는다고 그랬어. 핸드폰이랑 노트북에 있는 사진을 싹 다 지워버리고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 남은 거로 날 협박했다고! 심장이 터질 거 같고 뜨거운 침이 흘러내리는 고통을 알아?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냐고! 학교에서는 휴학을 제안했는데 생각해 보니 이 악몽을 금방 끝낼 방법이 있더라고. 김진석, 그 인간만 처리하면 되는 거잖아, 안 그래? 그래서 한 학기만 휴학하자. 그리고 녀석을 처리하고 복학하자. 그런 마음으로 방학 때 한국어 공부만 했어. 잠도 식사도 잊고 공부만 했다고!
네, 어련하시겠어요. 소민은 일본인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입을 쩍 벌리고 하품했다. 눈을 돌리던 그녀의 시선이 시계에 닿았다. 10시가 지났다. 교헤이도 그녀를 따라 시계를 바라본다. 그는 핸드폰을 집어 든다. 화면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린다.
-어, 알이 없네? 뿔테 폼으로 쓰고 다니는 거야? 쓰니까 더 멋있긴 하다.
안경을 만지작거리는 효림 옆에서 진석은 허무한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 콘돔은 제대로 쓰지도 못했다. 발기가 되지 않으니 씌울 수 없었다. 그와 효림 둘 다 최선을 다했지만 축 쳐진 성기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효림은 선배를 위로했다. 피곤하거나 분위기가 어색하면 그럴 수 있다며 다독였다. 익숙해지면 해결될 문제라며 대화를 이끌어가기 위해 노력했다. 오랫동안 기다려 온 순간은 겨우 전화 한 통 때문에 막을 내렸다. 미래는 있다. 하지만 오늘을 기점으로 어떤 미래가 다가올지 모른다. 효림은 분명 실망했을 것이다. 무대 위에서 넘치는 힘과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남자가 침대 위에서는 자기 물건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애송이라니. 기운이 절로 빠진다. 소민을 진심으로 좋아했던 적은 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앞에는 효림이라는 정상이 있다. 오르기만 하면 정복인데 왜 다리가 후들거리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