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대하기 전 진석은 종종 대학교 박물관에 가곤 했다. 그곳은 그의 비밀 아지트였다. 툭하면 미행하는 선배들도 그가 여기에 있으면 찾지 못했다. 이 학교 출신 교사인 한 유명 작가를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는데 그 작가가 친일과 군부독재에 가담한 문제로 논란이 있었다. 박물관 공사는 무기한 연기에 들어갔고 이곳을 지키는 경비는 툭하면 다른 경비들이 있는 경비실을 찾아가 수다를 떨어 아무도 없었다. 여기서 혼자 편의점 도시락을 까먹으며 잠을 청하곤 했다. 잠들 때까지 맨바닥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기도를 드렸다. 주여, 세 가지 소원만 이뤄주시옵소서. 해외여행을 가고 싶사옵니다. 절 괴롭히는 선배들이 싹 다 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귀고 싶습니다. 제발 이뤄주시옵소서, 주여! 기도가 천장을 뚫고 하늘에 닿았는지 두 개가 이뤄졌다.
그의 신발은 오랜만에 오물을 잔뜩 뒤집어 쓴 바닥을 밟는다. 진석은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박물관 안으로 몸을 옮긴다. 스위치를 올려보지만 불이 켜지지 않는다. 전기를 끊었나. 커다란 창문 옆의 가로등 불빛 때문에 앞을 분간할 순 있지만 선명하게 보이진 않는다. 정문을 지나 중앙 전시관을 향한다. 바닥에 형광으로 무언가 쓰여 있다. 진석은 허리를 굽힌다.
Let's Play hide and seek! (숨바꼭질 놀이하자!)
이게 무슨 소리지? 생각을 시작할 겨를도 없이 인기척이 느껴진다. 진석은 본능적으로 몸을 틀었다. 식칼을 들고 다가오던 교헤이는 허공에 헛손질을 한다. 몸을 돌려 진석을 찌르려 든다. 진석은 소리를 삼킨 채 필사적으로 몸을 뒤로 뺀다. 배를 노리던 식칼은 한 끗 차이로 살을 파고드는데 실패한다. 일본인은 진석의 팔을 잡아당긴다. 다시 한 번 찌르기 위해 팔을 지켜들지만 어설픈 동작으로 얼굴을 한 대 얻어맞는다. 진석은 달빛에 의존해 무기로 쓸 만한 물건을 찾는다. 각목을 집어 들어 교헤이의 머리를 내리친다. 너무 가볍게 부셔지는 각목을 보며 선택을 후회하는 사이, 고통을 참아낸 일본인은 그의 발을 밟고 손으로 목을 잡는다. 복부를 향해 다가오는 칼은 재빨리 쳐냈지만 교헤이의 몸이 진석을 짓누르는 건 막아내지 못했다. 깡마른 일본인은 있는 힘을 다해 남자의 목을 조른다. 기도가 조여들면서 몸이 경직된다. 눈이 팽창되는 걸 느끼면서 가쁜 숨을 간신히 내보내던 진석은 손을 뻗어 눈을 찌른다. 교헤이는 바닥을 뒹굴고 진석은 기침을 반복한다.
-너 누구야? 너 누구냐고? 누구이기에 나한테 이러는 거야?
교헤이는 의아함을 느낀다.
-너 김진석 아니야? 김진석 맞잖아. 기억상실이라도 걸린 거야, 아니면 모른 체하는 거야?
-그래, 나 김진석이다. 그래서 뭐? 난 너 몰라. 네가 누군지 알아야 왜 날 죽이려는지 알 거 아냐.
-나 교헤이야. 스가 교헤이라고! 네가 지독하게 괴롭혔던 그 교헤이가 나란 말이야!
-씨발, 내가 아는 일본인 없다고! 너 대체 누구야? 진짜 나 맞아? 네가 찾는 김진석이 나 맞냐고!
-노란머리에 뿔테 안경 쓴 김진석이 너 말고 누가 있어! 이 대학에 다니는 그런 김진석이 너 말고 누가 있느냐고! 네가 날 괴롭혔잖아! 날 죽을 만큼 괴롭혔잖아, 중국에서!
-......... 중국이라니? 난 중국에 간 적이 없어.
교헤이는 방금 전부터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말투와 억양이 다르다. 전화 목소리를 들을 때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전화에 따라 목소리가 달라지는 사람도 있으니까. 그런데 아까부터 귓가를 울리는 이 음성은 지나치게 높다.
-너, 너 누구야?
교헤이가 답을 듣기도 전에 둔탁한 물체가 그의 머리를 내리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