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교 없는 첫째 딸. 누구도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어렸을 때 사진만 봐도 죄다 진지한 어린이상이다. 내 입모양이 ‘ㅅ’인 게 태어났을 때부턴지, 인이 박인 건지는 모른다... 그래도 진지한 만큼 엄마 말, 선생님 말은 기가 막히게 잘 듣는 어린이여서, 남들은 엄마의 작품으로 승부하는 방학숙제도 온전히 내 실력으로 승부했다. 단 두 시간만 주면 방에서 뚝딱 포스터를 그려 나오는 나였다. 피아노를 쳐도 지역 콩쿠르가 아니라 세계 대회라도 출전할 듯이 몰두하곤 했다.
내가 애초부터 진지한 어린이였던 것은 맞지만, 좋고 싫다는 감정 표현쯤은 할 수 있었던 것 같은데. 눈치를 보기 시작한 순간부터 망했다. 물론 성격이란 게 차곡차곡 쌓여서 만들어질 테지만, 나는 서운하면 눈물을 꾹 참고 입을 다물었다. 스스로 갈등 회복력이 좋다고 생각했었는데, 회복력이 좋은 게 아니라 갈등을 갈등으로 인정하지 않고 그냥 웃으면서 넘어가면 해결된다고 믿은 거였다. 실은 그냥 도망치고 싶은 거였다.
엄마가 아파서 잠시 고모네 살 때도, 나는 싹싹한 어린이였지 떼쓰는 애새끼가 아니었고, 여전히 애교는 부릴 줄 몰라도 웃으면서 말하고 들을 줄 알게 되었다. 사촌동생이 어린 마음에 이쪽부터 저쪽까지 있는 책은 건드리지 말라고 했을 때도 닥치고 있었고, 사촌오빠가 내 무릎에 누우면서 실실 웃었을 때는 울면서 뛰쳐나왔다. 오빠가 좀 모자란 편이긴 했지만, 껑충껑충 뛰어나오며 자기 엄마한테 말하지 말라고 했을 때도 그렇게 했다. 모든 게 겁이 났기 때문이다. 내 엄마한테 말하지 말란 소리는 안 하는 게 이상했다. 나는 너네 엄마보다 우리 엄마한테 말하기가 더 무서운데.
이후 고모네서의 생활을 1년 만에 청산하고, 같은 아파트인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엄마가 그 집을 고르긴 했지만, 그 집에 살 사람은 나와 아빠와 동생이었다. 우리는 우리만의 생활을 이어가야 했고, 밥 먹을 때만큼은 고모네와 딱 붙어 있어야 했다. 아빠는 나름의 방법을 택한 거였겠지만, 모두가 가엾어하는 7살짜리 남동생의 손을 잡고 고모네를 들락거려야 할 내 마음은 어떤 여유도 없었다. 울 생각도 없고 밥은 먹어야겠고, 아빠는 말이 없었다. 눈치란 게 여간 떼어지지 않는 나약한 버릇이 되었다.
우리 집에서 나는 딸과 누나인 동시에 여자였으므로, 아빠는 내게 살가운 딸이 되기를 기대하는 듯했다. 그래서 아빠는 내가 대학을 서울로 가고 싶다고 했을 때도, 집이 적적해진다는 이유로 나를 막았다. 물론 돈도 없었지만. 나는 그 이유가 너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아빠의 외로움 때문에 내가 동네에 짱 박혀있어야 한다니. 그렇지만 내가 없으면 적적해진다는 게 꼭 싫지만은 않았다. 결국은 나도 우리 집에서의 역할을 잘 수행했단 거고, 그것에 익숙해졌기 때문일 거다.
나는 내 앞가림을 척척 해나갔지만, 그럴수록 아빠와 동생은 뒷전이 되었다. 맏딸은 이기적이라는 소문이 사실이다. 남동생이 있다면 더더욱. 첫째 딸을 신뢰하는 만큼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누나들은 남동생이 애새끼로 보일 때가 많으므로, 나는 쟤보다 어른이라는 자만심을 먹고 자란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래서 내 마음에 맞추고, 내 주장에 맞추고, 내 시간에 맞추는 게 익숙했다.
그렇게 거실보다는 방이 익숙하고, 방보다는 밖이 편한 딸이 되었다. 집에 있으면 돌볼 일만 있어서, 나만 챙기고 싶어서 밖으로 나왔다. 남들은 자기를 건사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어하는데 나는 동시에 세 명을 떠안고 가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애교란 건 인생에 덤이라고 생각했다. 꼭 필요한 건 아니지만 있으면 좋은 그런 거. 아빠는 한없이 남자였고, 아직도 구시대적이었다. 내가 나중에 시집만 잘 가면 인생이 잘 풀릴 거라고 믿는 그런 사람. 그런 기대를 먹고 자라니 아빠에게는 더더욱 살갑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나를 위해, 주체적으로 글을 쓰고 싶었다. 비록 문예창작과는 포기했지만 결국은 글 쓰는 일을 하고 싶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빠에게는 이런 폭탄 발언을 날릴 수가 없었다. 작가가 되고 싶다니, 글을 쓰고 싶다니 하는 것들. 아빠는 예술과 극단에 있는 사람이어서 돈을 못 벌지도 모를 일을, 여자인 내가 하길 원하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아빠의 지지가 없어도 내 살 길은 알아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아빠의 정서적 지지는 없지만 자본적 지지는 좀 있을 거란 믿음으로 버텼다.
그래서 아빠에게 애교를 부린다는 건 돈을 줘도 못할 짓 같았다. 내 잠재력은 믿어주지 않으면서, 내가 차리는 밥은 맛있게 먹는 모순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애교는 본디 집안의 어린이들이 부리기 마련인데, 나는 열 살 때부터 나를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어른까지는 아니어도 성숙한 어린이라고. 솔직히 아빠도 그랬을 거다. 아마 아빠의 체제를 전복시키려면 나중에 내 글을 깡그리 모아서 보여주는 수밖에 없을 거다. 나는 입도 못 열고 눈물만 흘릴 사람이니깐. 그래서 애교는 제쳐 두고 그냥 글을 쓴다. 애교가 아니라 강펀치를 날려줄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