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3시. 한참 곤한 잠에 빠져있던 아내가 일어나 민부장에 던진 말이었다. 잠에서 깨어나 거실에 독서등을 켜놓고 우두커니 앉아 책을 보고 있던 차였다.
“응... 잠이 안 와서... 깜빡 잠이 드는 줄 알았더니만... 머리가 말똥말똥해져서.
“무슨 걱정 있어요? 요새 입맛도 없다고 그러더니만. 병원 가봐야 되는 거 아닌가?”
아내는 걱정을 뒤로한 채 긴 하품과 함께 다시 방으로 사라졌다.
물류로 유명한 H 주식회사의 영업부장인 민상철은 최근 가슴통증으로 병원을 찾았다. 소화도 안되고 밥맛도 없는 것 같고, 가슴과 복부에 알 수 없는 통증이 있었다. 의사는 심전도와 초음파 진단을 하고서는 특별한 이상이 없다고 말했다. 다들 감기처럼 지나가는 갱년기 증상의 하나로 마음건강을 챙기라는 조언도 해줬다. 그럼에도 민부장은 자신의 건강과 심리상태가 불안했다. 쉽게 잠도 못 이룰뿐더러 새벽에 잘못 깨기라도 하면 다시 잠들지 못한 날이 여러 날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불평을 호소하던 전립선 문제도 없던 그였다.
민부장은 예전에 X세대라 불리던 88학번이었다. 40대 후반까지는 직장이나 건강에 이상 징후는 없었다. 대리에서 과장으로, 다시 과장에서 차장으로 승진을 거듭하던 30대와 40대에 그의 직장생활은 꽃을 피웠다. 연봉이 올라가면서 사는 동네도 집도 차종도 바뀌었다. 딸과 아들 하나씩을 두고 있는 부부 사이에도 큰 문제는 없었다. 이들 부부는 맞벌이를 하면서도 가사분담이 잘되어 있었고, 대학 선후배 사이여서 말도 잘 통하는 사이였다.
그러던 차에 동기들보다 2년 먼저 부장으로 승진한 민상철은 은연중에 혹여나 하는 임원승진에 대한 욕심이 싹텄다. 대리 때부터 쭉 영업부서에 근무한 터라 열정적인 영업맨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덕분에 부장 승진과 동시에 독일과 오스트리아 상사주재원으로 4년간 다녀올 수 있었다. 그가 승진을 빨리한 것도 거래처 관리와 확실한 실적 때문이었다. 특히 함께 일하는 상사들과의 관계도 밀접했다. 윗사람의 집안의 애경사는 물론 주말의 골프나 등산까지 지치지 않는 강철체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임원승진을 바라다보니 부사장급인 전무 이상 임원들과의 친분이 중요했다. 다행히 잘 나가는 전무와 대학은 달랐지만 동향 출신이어서 사적인 자리에서도 합이 잘 맞았다. 골프 싱글을 치는 민부장은 자신보다 못하는 전무에게 늘 한두 차 차이로 져주는 센스를 발휘했다. 물론 주말 부킹과 운전은 기본이었다.
하지만 위기는 사전 예고 없이 찾아오는 법이다. 열심히 앞만 보고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인생 자체에 대한 회의는 물론 건강상태에도 빨간등이 켜졌다. 이렇게 살아도 될까 하는 의문이 하루에도 몇 번씩 머릿속에 맴돌았다. 더 안타까운 것은 자신도 모르게 아이들과 멀어져 있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자각을 못하다가 십 대 후반과 이십 대인 아이들과 대화하다 보니 이야기 주제가 빈약했다. 사이가 안 좋은 것은 아니지만 상당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대부분의 가정이 그러겠지만.
독일 주재원 시절에는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서 돈독한 사이였다. 중부유럽은 마치 한 개의 나라처럼 국가 간 이동이 자유로워서 수시로 다른 나라도 여행을 가곤 했다. 아이들에게 맘껏 스위스의 절경과 유럽의 안정적인 사회를 느끼게 해 주고 돌아왔다. 다시 귀국해서도 아이들이 학업에 큰 지장이 없어서 안도감을 느끼곤 했다. 다른 집 같은 경우에는 애들이 적응을 못해서 다시 외국의 학교로 가는 케이스가 종종 있었다. 회사 동료들도 비슷한 문제로 서로가 걱정을 토로하곤 했다.
잘 적응하던 큰딸 명주가 대학진학 과정에서 재수를 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아무래도 외국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다 보니 국어와 수학에서 많은 실력 격차가 생긴 까닭이다. 1년 반이라는 시간에 그 간격을 메꾸기에는 시간이 역부족이었다. 어쩔 수 없이 큰딸은 재수를 선택해서 원하는 과로 대학을 진학하기로 결정했다. 엄격하기로 유명한 입시학원에서 공부하면서 아빠와 아이 간에 대화가 소원해졌다. 서로가 자신만의 이유로 바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이후로 살갑던 부녀간의 관계가 냉전시대의 미국과 소련의 관계로 변했다. 중학생이 된 둘째는 살가운 아이에서 통제 불능의 중학생으로 변했다. 주위의 여러 가정에서 볼 수 있는 비슷비슷한 가족풍경이었다.
민부장의 영업 2부는 유럽시장이 주된 타깃이었다. 최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물류 운송이 잠시 주춤하거나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았다. 유럽 쪽의 고객들로부터 클레임과 항의가 소낙비처럼 쏟아질 때도 있었다. 다행히 현지 주재원 경험이 있던 민부장이기에 팀원들의 협조 하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가슴 한쪽이 늘 시리고 아팠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안감과 초초함이 머리 한구석에 늘 남아있었다.
비가 오는 목요일 저녁. 모처럼 고등학교 동창들과 종로의 삼겹살집에서 모였다. 다들 50대 중반이 돼서 그런지 중년의 티가 팍팍 나고 있었다. 다섯 명 중 2명이 벌써 퇴직하고 백수신세였다. 두 사람은 공인중개사와 주택관리사 자격증 공부를 한다고 했다. 무언가를 해보고자 노력 중인 친구들의 눈빛에서는 살짝 비장감마저 감돌았다. 반면 미리미리 준비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도 엿보였다. 소주잔에 가느다란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부모 부양과 아이들 교육비까지 쓰다 보니 막상 자신의 통장 잔고는 빈 곳간 수준이었다. 아직 연금도 탈 수 없는 나이라 늘 돈에 대한 고민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조기연금을 수령한다 해도 문제였다. 부부 두 사람 먹고 살기에도 빠듯한 금액이었다. 결혼이 늦어진 친구들은 60이 다 되어서도 아이들은 학생이거나 미혼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래저래 돈 들어갈 곳은 많지만, 나올 곳은 없는 진퇴양난의 형국이었다. 재테크로 성공한 사람들 얘기는 멀리서 들려오는 메아리 같은 것이었다. 실제로 대부분의 친구들의 형편은 비슷했다. 달랑 집 한 채와 마이너스 통장과 약간의 현금이 전 재산이었다.
여기저기 비슷한 중년 남성들이 생삼겹살에 파무침을 올리고 소주잔을 비우고 있었다. 이 집은 오래된 노포로 생삼겹살 맛집이었다. 잘 익은 고기에 상추와 깻잎에 쌈을 싸 먹는 맛이 쏠쏠했다. 중간중간 종업원들이 고기를 뒤집고 구워가면서 잘라주었다. 불판에서는 치지직 치지직 먹음직스러운 고기가 노릇노릇하게 익고 있었다. 육즙이 보존되는 두꺼운 삼겹살이라 겉은 바싹 속은 촉촉한 것이 별미였다.
옆자리에서 들려오는 얘기도 갈수록 불편해지는 직장생활과 노후준비였다. 간간히 부부관계와 아이들 대학 진학이나 취업문제가 양념처럼 뿌려지곤 했다. 특정지역의 사투리 억양이 강한 목소리가 테이블을 넘어 들려왔다.
“야야, 니 말이다. 와이쁘랑 관계는 괜찮나.... 나는 치사해서 치아블라꼬. 확 속 디비지고 몬살것다. 네마.. 애시키들은 왜 지 엄마팬만 들고 말이야... 친구야, 내 맘 알제. 소주 안 따라주나. 마, 친구야. 오늘 먹꼬 디비 죽자.”
“니도 그러나. 내도 와이프가 소 닭 보듯 해서 존심이고 머꼬 다 꼴아박아가꼬 개판이다. 이게 무신 상황이고.”
마치 한 테이블에서 함께 술 마시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잘 들렸다. 옆쪽을 쳐다보니 앞에 있는 친구가 고개를 끄덕이며 급히 소주병을 들고 웃었다. 아마도 가정에 사소한 문제가 있어 그럴 것이다. 대부분 싸울 거리도 안 되는 하찮은 일로 지지고 볶지 않던가. 역시나 불안과 불평불만은 전염되는 것인지. 민부장 쪽에서도 금융권에서 명퇴한 친구가 불평을 토로했다.
“그니까 말이지. 28년을 직장 생활해도 누구는 별 달고 승진하고, 누구는 부장 달고 나오고. 그것이 진짜 능력문제라면 이해하겠는데... 생각해 보면, 그게 전부가 아니거든. 다 알잖아. 대기업에서 임원 되면 100가지가 좋아진다는 거.... 그 100가지 중에 부부금슬하고 가족관계도 있을 거야. 분명히.... 허허허.”
친구들은 공감하는지 소주잔을 들고 눈을 맞췄다. 한 번에 툭 마셔버린 친구들. 남자들만의 비애도 아니고 입장을 바꾸어보면 여성들도 비슷한 고민과 고통을 터놓을 텐데. 서로가 서로의 입장을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해 주려는 노력이 부족한 탓도 있을 것이다. 공인중개사를 공부하는 친구가 물었다. 이 친구는 서울시내의 유명한 법대를 나왔지만, 가정형편 때문에 일찌감치 고시공부를 접고 취직을 한 케이스였다.
“어이 민부장, 자네는 승진 가능성 있지 않던가? 그 정도 이력이면 충분히 바라볼 수 있을 거 같은데... 윗선에도 선배들도 있고... 어때?”
민부장은 뜻밖의 질문을 받자, 살짝 입 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카톡으로도 매일 교류하는 그 친구에게 술을 한잔 따라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실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면 거짓말일 테고. 그런데 현실은 우리 생각대로 안 돌아가니까. 우리 회사에서 임원이 되려면 대리 때부터 관리를 했거나 관리를 받아왔어야 되는데. 생각해 보니까 그런 준비를 못했더라고. 바로 윗 선배들이나 동기들만 봐도 거의 관심이 없어. 어차피 안 될게 뻔하니까.... 그냥 외국 법인장이나 한번 갔다 올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그렇게 할까 봐!”
“아이고, 우리 민부장 외국물 몇 년 먹더니만. 또 나가시게. 그렇게 들어오고 싶다고 애걸복걸하더니만. 외국에 참한 애인이라도 만들어놨나... 하하하.”
“이 사람은 별 실없는 소리를... 애인이라 듣기만 해도 좋기는 허네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만둔다고 생각하니 너무 허무해서 말이야. 아이들도 대부분 알아서 할 나이가 됐으니까, 부부가 편하게 살다 오면 어떨까 해서 알아보기는 했는데...”
계속 얘기를 듣고 있던 한 친구가 식어버린 삼겹살을 질겅질겅 씹으며 절반 정도 남은 소주잔을 털어 넣으며 말했다.
“근데, 자네들은 괜찮나?”
“무신 귀신 씨나락도 아니고 밑도 끝도 없는 소린가! 목적어나 중요한 뭔가가 빠진 질문 아닌가?”
“허허, 그렇구만. 그러니까 자네들은 나이 드는 것이 괜찮은가 이렇게 물었어야 하는데... 좀 더 길게 부연하자면... 자네들은 이유 없이 불안하고 불편하고 우울하고 그러지 않느냐는 거지. 그 느낌을 콕 찝어서 말하기는 힘든데... 있잖아 뭔가 불편한 느낌. 우리가 10대나 20대 때 느꼈던 미래의 불안감이나 30대 때 느꼈던 그런 불편함 말고... 생각해 보니 그런 느낌 하고는 전혀 다른 것 같아. 그때는 불안해도 무기력하거나 생각이 없지는 않았는데... 요새는 이런 감정이 생기면 바로 무기력과 무중력 공간에 들어간 것 같은 생각도 들고 말이야.... 이런 걸 뭐라고 해야 될까? 이 자리에는 의사인 친구도 없어서 물어볼 사람도 없기는 하지만.... 자네들은 혹시...”
친구의 장광설을 듣고 있던 민부장의 머리 한구석을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친구가 말하고 있는 그 상태가 현재 자신이 계속 느끼는 감정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무기력, 무중력, 불편함, 불안감 그리고 초초함까지... 회사에서 불안해할 직급도 아니고 경제적으로도 크게 부족함이 없는데도 이런 감정이 드는 것은 이유가 뭘까? 민부장의 머릿속에 다시 의문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직장에서 근근이 버티고 있는 친구 한 명이 더 진지하게 이 문제를 파고들었다.
“근데 니들이 말하는 그 무기력에는 성적인 문제도 포함되겠지. 예를 들어 무성욕이나 발기불능 같은 거 말이야... 나만 그런가!”
“자네만 그런 게 아니지. 웬만한 중년들이 겪는 심리적 욕망의 감퇴현상 아닐까. 우리는 이미 왕성한 이십 대도 아니고, 욕구에 능숙한 사십 대도 아니고... 다들 그렇지 않은가. 물론 사람마다 편차는 있겠지만 말이야.”
친구들은 예전이 좋았다며, 이제는 남자구실도 치솟던 욕망도 모두 노화현상에 접어들었노라고 농담이 오갔다. 갑자기 소맥을 한잔씩 하자며 열심히 제조하던 친구가 잔을 돌리며 한마디를 던졌다.
“자자, 존경하는 친구들 건배하자고... 걱정해 봤자. 뾰족한 수도 없잖아.... 맥아리 없는 소리들 하지 말고, 술이나 한잔씩 하자고. 혹시 알아 술 마시면 집 나간 청춘과 욕망이 돌아와서 무기력을 없애줄지! 자 우리의 청춘을 위해 브라보!!”
친구들은 그 즐거운 입담에 웃으며 술잔을 쨍하며 부딪쳤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무언의 공감을 표했다. 서로 텔레파시가 통했던지, 술잔을 놓으며 한 친구가 조용히 말했다.
“자네들 혹시나, 중년의 걱정거리를 한꺼번에 날려주는 여의봉의 같은 게 없을까?”
그 순간 민부장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 최근에 아내로부터 아이들 공부에 도움을 준다는 무슨 나무인가 뿌리인가 그런 회사를 들은 적이 있었다. 바로 아내에게 카톡을 했다. 몇 초 뒤에 바로 답장이 왔다.
‘당신, 지금 어디야?’
‘어, 친구들하고 카페에 있다고 호프집 아니고.’
‘저번에 중2병에 효과가 좋았다던... 머시냐... 무슨생각을 판다는 그 회사 이름이 뭐였지?’
‘아, 생각나무 주식회사라고’
‘혹시 거기에 중년을 위한 상품도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한번 알아봐 바...’
‘응 대충 보니 잘 안 보인다고... 그래. 땡큐. 나 오늘 늦는다! 재밌게 놀다 오시고♡.’
가족들과 저녁을 먹을 때 분명히 들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아서 금방 까먹어버린 모양이었다. 친구들과 얘기하며 아내로부터 전달받은 생각나무 홈페이지를 검색했다. 홈페이지는 PC용 버전과 모바일용 앱 버전이 있었다. 꽤나 능숙하게 모바일 버전을 다운을 받고 검색했더니 홈페이지 안내와 상품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게 나와 있었다. 모바일 버전은 스마트폰 특성에 맞게 직관적이었다. 특이한 것은 검색 코너와 게시판이나 상담 코너가 크게 부각되어 있었다. 아마도 일방적으로 제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쌍방향 대화를 통해 주문형 제작도 겸하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바로 친구들에게 한번 보기를 권했다.
“어이 친구들, 내가 불러주는 대로 앱도 다운 받고 거기서 검색도 한번 해보셔....”
친구들이 오! 그런 게 있냐면서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민부장은 상품 안내를 쭉 둘러보다가 자신이 찾는 단어가 보이지 않자, ‘중년’이라는 키워드를 넣어 검색을 했다. 중년과 관련된 검색어는 없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왜 없을까를 생각해 봤다. 친구들도 서툴게나마 이모저모 살펴보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말은 ‘수요가 공급을 낳는다.’는 말과 같은 의미다. 중년의 욕구불만이나 수요가 표면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결과였다. 그냥 나이 듦의 과정으로 여기거나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시선도 있었을 것이다. 불편하면서도 노화의 당연한 수순이거나 갱년기의 일종으로 여긴 결과였다. 대부분 호르몬제나 운동을 통해서 치료하고 특별히 다른 방법은 고민하지 않았던 것이다.
옆에서 친구 한 명은 중2병 관련된 상품을 보고서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이런 게 있었으면, 우리 아들 중1 때 방황도 하지 않고 공부도 열심히 했을 텐데. 근데 이런 상품이 진짜로 효과가 있나 모르겠네... 허허허.”
열심히 핸드폰과 술잔을 번갈아 오가던 다른 친구가 고개를 들더니 말했다.
“친구야, 거기에 나와 있는 구매 고객들의 상품평을 읽어나 보시고 말하시지! 우리가 하도 가짜에 속고 살아서 그런지 몰라도... 내가 몇 개 읽어보니까 진짜로 효과가 있는가 보네! 그 밑에 두 번째 보면 부모와 아이가 함께 체험했던 경험을 말한 거 있잖아. 그 밑으로 쭉 내려가 봐도 비슷비슷한 내용이 많은데... 요새 시상이 하도 수상해도 부모와 아이들이 동시에 사기 치지는 않것지.”
민부장은 주택관리사를 공부하고 있는 친구에게 ‘중년’이라는 키워드를 넣어보라고 했다. 그 친구도 신기한 표정으로 여기저기 찾아보더니...
“음, 중년과 관련된 검색어는 아직은 없네... 그런데 불면증이나 명상 치니까 이것은 여러 개가 나오는데... 아이고, 요새 내가 그렇게 잠도 잘 자던 내가 잠이 안 와서 공부하고 있다는 것 아녀! 참나, 이럴 때는 불면이 효자라고 봐야 되나? 이렇게 공부했으면 진즉에 서울대도 갔을 것인데! 이미 늦어부럿네. 허허허”
친구 한 명이 진지하게 민부장에게 얘기했다.
“어이, 능력 있는 민부장님, 할 일 없고 심심할 때... 생각나무인가 그 회사에 전화해서 중년의 무기력증을 해소할 수 있는 제품 하나 만들어달라고 하셔 봐. 혹시 알아. 하나 만들어줄지....”
“하하, 자네 말처럼 심심하지는 않지만. 그래볼까...”
그로부터 3주 뒤. 기획팀에서 제안서가 올라왔다. 기획팀에서는 매주 고객의 소리나 제안을 통해 고객의 불만이나 제안을 수집 분석 검토한다. 이 중에서 의미 있는 불만사항이나 제안 건에 대해서는 입체적으로 심층 분석해서 고객 제안서를 작성한다. 이는 홈페이지에서 상품제안에 관한 공간을 만들어놓은 결과다. 실제 소비자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제작자나 판매자가 모를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추상적 수요를 예측해서 제품을 개발할 수는 없다. 그런 까닭에 생각나무에서는 처음부터 일방적인 공급보다는 고객과의 대화나 수요 욕구를 중시하고 있다. 뜻밖의 수요가 의외의 대박상품을 낳기도 한다. 이 상품이 그랬다.
고객 제안명: 중년의 무기력 탈출 테라피
제안자의 의견: 저는 H 주식회사에 다니는 50대 중반의 중년 남성입니다. 친구들과 중년의 무기력과 불안에 대해 얘기하다 보니 이를 극복하는 방법이 궁금해졌습니다. 갱년기를 당연한 노화증상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백세시대를 살아가는 입장에서는 이를 극복하고 더 활기찬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제가 생각나무의 앱에서 검색해 보니 중년 관련해서는 별다른 상품이 보이지 않아서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연락을 드립니다. 혹시 생각나무에서 중2병 테라피처럼 중년의 무기력을 극복할 수 있는 테라피를 만들어 주실 수 있는지요? 다수의 사오십 대들이 자신의 몸과 마음이 무기력하면서도 이를 드러내지 않아서 마치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더 큰 문제를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중년 남녀들이 이런 증상을 겪고 있어서 이를 완화하거나 극복할 수 있는 제품이 있다면 중년의 건강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여러모로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기획팀의 의견(요약): 중년을 타깃으로 하는 상품은 현재 우리 연구대상 및 제품출시 예정 목록에 있지만, 우선순위에서는 후순위임. 그 이유는 중년의 무기력은 노화의 자연스런 현상으로 바라보는 사회학적 의학적 견해에 따름. 하지만 제안자의 의견과 같이, 의학적 요법인 호르몬치료나 심리적 치료가 아닌 우리 제품의 특장점을 살린 제품이 출시된다면 중년의 무기력증을 해소할 가능성이 아주 높음.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인생의 생애주기에서 40~60대까지 대상인구의 연령층이 가장 두터움. 잠재적인 고객이 많은 대박 상품이 될 가능성이 높음. 호르몬 작용과 심리적 불안 사이의 정신적 괴리를 좁히기 위한 정서적 이완작업이 필요. 그 맥락에 우리 생각나무의 원천과 제품이 의미를 가짐.
향후 계획: 상품 기획과 시뮬레이션을 위한 연구검토 시간 필요. 제안자에게 긍정적인 답변과 피드백 필요. 이 제품의 주요 고객은 40대부터 60대까지 광범위함. 실제 이용자들의 사용빈도와 활용도가 높아 고객의 니즈를 정확하고 섬세하게 파악할 필요 있음. 이를 위해 광범위한 설문조사와 그 결과를 바탕으로 제품을 설계 예정임. 생각나무 원천을 통해 선행적으로 자료를 검토하고 그 결과를 시뮬레이션 한 결과 대상집단의 만족도가 대폭 증가하는 것으로 도출됨.
기획팀의 제안서는 대표까지 보고는 되지만 승인절차를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각 팀의 권한 범위 내에서 상품개발까지 가능하다는 얘기다. 생각나무에서는 상품기획부터 개발 판매에 이르기까지 여러 단계의 결재절차가 없다. 각 팀에서 책임과 권한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직급에 관계없이 의견을 내고 수정하는 것이 자유롭다. 자신이 의견을 내서 개발된 제품에 대해서는 철저히 성과를 인정해 주는 것도 생각나무의 장점이었다. 민부장이 아이디어를 제공한 이번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기획팀 내부에서 충분한 의사결정 과정을 거쳐 안대표에게 보고한 것이다. 이는 무형의 지적 자산을 가진 기업의 특장점이기도 하다. 제품 설계와 각종 시뮬레이션이 가능한 가상의 공간과 일정한 대상자들만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안대표는 제안서를 보면서 두 눈을 크게 떴다. 음.... 중년의 불안이라. 예전부터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구체적인 방법론을 대하기는 처음이네.... 자신이 아직 중년이라 불리는 나이 때가 아니어서 고민하지 않았던 것인데. 실제 소비자들의 수요욕구 파악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아는 안대표였다. 그동안 빅히트를 쳤던 명상프로그램이나 불면치료 프로젝트 등도 번잡한 현대사회에서 불안과 불면으로부터 쫓기는 수요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렇잖아도 최근 친한 선배가 비슷한 질문을 해서 머릿속에서는 계속 고민하던 아이템이었다. 핸드폰에서 선배 번호를 검색해서 전화를 걸었다.
“아, 형님. 저 단태입니다.... 즐겁게 지내고 계시죠! 네, 다름이 아니고 저번에 말씀했던 갱년기 증상 문제요. 그거 관련해서 특별한 치료나 대증요법을 받으시나 해서요.... 아! 여기저기 알아봤는데, 의사들이 우울증도 그렇고 복합적인 호르몬 치료를 권해서 여전히 고민 중이시라고요... 아, 예 잘 알았습니다. 다름이 아니고 우리 회사에서 중년의 갱년기 관련해서 기획 중인 상품이 있어서 전화드렸습니다. 아! 네.... 생각나무의 성과물을 기다리시겠고요. 하하하. 좋은 결과 나오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음, 현대의학계에서는 틀림없이 정상적인 육체의 노화과정으로 봐서 호르몬치료나 적정한 보조약물치료, 운동으로 처방을 하고 있을 거야. 하지만 인간의 노화는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닌 거지. 몸과 마음의 문제를 종합한 진행과정인데... 우리는 근본적으로 몸의 문제라고 단정하고 시선을 고정하다 보니 이를 치료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근본적으로 마음의 문제라고 전제를 하고 그 몸과 마음을 통합적으로 접근한다면... 우리식의 요법이 더 효과가 좋을 수도 있겠어!’
단태는 이런 생각에 머물자 혼자 짝짝 손뼉을 치며 기획팀의 제안서를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제안서는 기획의도와 설문조사, 상품기획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고 있었다. 대표인 본인이 묻고 싶은 사항을 다시 질문하지 않도록 하는 다양하고 섬세한 검토가 돋보였다.
기획팀에서는 보다 정교한 상품기획을 위해 40~60대 사이의 중년 남녀 천여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기로 했다. 수요자들의 욕구를 먼저 파악하는 것이 좋은 상품을 만들 수 있는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설문조사는 전문 컨설팅기관을 통해서 진행하되, 설문 내용은 생각나무에서 만들기로 했다. 설문조사와는 별도로 직원의 가족이나 지인들을 통해서도 중년의 현실을 알아보기로 했다.
아이디어를 제안한 민부장에게도 연락을 취해 친구들과 설문조사를 요청했다. 민부장은 흔쾌히 설문을 친구들 사이에 카톡이나 메일을 통해 설문을 구하고, 그 결과를 기획팀에 전달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정신적 신체적 변화뿐만 아니라 친구들과 다양한 지인들의 상황을 조사해서 장문의 보고서 형태로 제출했다. 이러한 자료는 기획팀이 설문조사에서도 얻지 못할 실제적인 정보를 얻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기획팀은 제안자인 민부장의 남다른 활약을 다른 팀에게도 공유했다.
설문조사 기관에 따르면 대상 중년 남녀들이 생각보다 적극적으로 설문에 임했고, 주관식으로 제시된 몇 개의 항목에도 알찬 답변을 주었다고 한다. 자신의 상황에 대해 장문의 편지글까지 써준 이들도 다수 있었다. 그만큼 중년의 문제 상황이 개인의 삶의 질과 만족도에 미치는 영향이 컸다는 얘기다.
기획팀은 전문조사기관의 결과, 각종 지인찬스와 민부장 측의 답변 결과 모두를 합하여 분석 검토했다. 생각보다 중년층에 해당하는 이들의 불평불만이 많아 설문 절차는 쉽게 진행되었고, 답변 또한 사실적이고 구체적이었다. 생애주기에서의 노화에 대한 공포, 직장에서의 불안, 가정과 자녀교육문제, 노후문제 등으로 복합적인 걱정이 태산 같다는 의견이 한결같았다. 중년에 대하여 긍정적 답변보다는 불안감을 동반한 부정적 견해가 다수였다.
전문조사기관의 결론은 간결하고 정확했다. 중년의 가장 큰 문제는 무기력과 상실감이다. 이는 육체적인 문제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심리적인 문제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는 새로운 열정과 목표의식을 제시했다. 사회적으로 성취가 있었지만 그 한계가 분명하고 벽에 부딪친 상황이 불안을 주는 것이었다. 그로 인한 결과가 무기력과 상실감이었다.
기획팀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중년들에게 열정과 목표의식을 심어줄 수 있는 생각의 씨앗을 고민했다. 정신의학적 측면에서는 무기력을 심인적 질환으로 여기고 일종의 약물치료와 다른 요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임시변통 일뿐 근본적인 치유가 쉽지 않았다. 오히려 약물의존이나 심리적 건강을 더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기획팀은 이점에 주목했다.
중년의 무기력에 대한 것에는 복합적인 처방이 필요했다. 먼저 목표의식이라는 마인드를 설계하고 그 소프트웨어로써 열정을 불어넣은 방법을 고안했다. 정신의학적 측면에서 일정 부분은 국내 최고의 의료진들로부터 도움도 받았다. 일반적인 설문과 병행하여 일부에 대해서는 심층 분석을 위한 정밀진단도 진행했다. 그 대상자는 각 연령대별로 자발적 참여자를 우선으로 했다.
기획팀과 개발팀에서는 각종 결과와 연구물을 중심으로 3개월 동안 시제품을 만들기 위해 고심했다. 생각의 원천을 활용해 광범위한 자료를 분석하고 결과를 뽑아냈다.
일명 “중년의 무기력 탈출 테라피”
중용에서의 인생론과 후기인상파의 색조에서 영적 모티브를 얻었다.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과 바흐와 멘델스존의 음악으로 프레임을 구성했다. 전형적인 시각과 청각의 공감각적인 결합을 통해 안정감을 더했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치유클래식을 부가적으로 첨가했다. 특히 지금의 중년층들이 어릴 적 들었던 음악을 통해 그동안 잊고 있었던 열정을 되살리는 작업도 함께 진행되었다. 실제 중년은 나이와 세월의 무게에 억눌려 있다 보니 자신의 삶에 대해 무관심하게 된 까닭도 있었다. 이러한 무관심을 일깨워주고 자신을 찾아가는 것도 중요한 포인트였다.
중용은 연구자들이 많으나 안대표가 추천한 도올 선생의 성찰에서 지혜를 빌렸다. 삼국지도 여러 버전이 있듯이 중용도 세계의 석학들이 연구한 다양한 버전의 연구물이 있다. 그중에서 한국적인 시각과 우주와 인간의 행동방식에 관한 성찰이 뛰어난 게 도올 선생의 해석이라는 것이 안대표의 생각이었다.
이 제품은 지금까지 개발된 다른 제품들과 달리 훨씬 입체적인 방향에서 연구가 진행되었다. 워낙에 적용 가능한 대상자가 많고 복잡한 환경과 다양한 인생경로를 경험한 연령대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 테라피의 부제(副題)는 자신만의 인생 찾기 프로젝트. 구매자들에게 ‘잊고 있었던 나의 청춘을 되돌아보고 백세시대를 재설계하다’라는 구호를 외치게 할 것이다. 시제품을 이미지 재생실에서 구현한 결과도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문제는 누군가를 늘 기다리는 법. 시제품을 시험대상자에게 적용시킨 결과, 대상자들에게서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종합 만족도 70%대에 머물렀다. 보통 85% 이상의 만족도가 나왔을 때 적정한 보정을 하고 제품화하기 때문에 기획팀이 생각하기에는 상당히 아쉬운 결과였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다들 촉각을 곤두세우고 문제의 원인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안대표 방에서 기획팀장과 개발팀장, 안대표가 시제품 적용결과지를 보며 마주 앉았다. 생각나무에서는 제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라 할지라도 완성도와 만족도가 높지 않은 제품에 대해서는 철저히 배격했다.
“그렇죠. 팀장님 의견이 옳습니다. 일단 시험결과는 절반의 성공이라고 봐야죠. 만족도가 보여준 확률이 꼭 손오공의 여의봉은 아니니까요. 이걸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보완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하겠죠. 우리가 제품 개발에 신경 쓰면서도 무언가 기본적인걸 놓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네, 대표님 말씀이 타당합니다. 생각해 보면 중년의 증상에 대해 대증요법을 고민하다 보니 더 근본적인 심리적인 부분에 대해서 간과하고 있는 게 아닐까 다시 생각해 봤습니다. 그래서 다시 각 팀원들과 이점에 대해서 원점에서 검토해 보기로 했습니다.”
“바람직한 방향입니다. 워낙 적용 대상자가 많은 제품이라 그 수요의 다양성과 특성에 대해 더 섬세한 접근이 필요합니다.”
“제가 최근 읽었던 <중년의 철학>이라는 책이 있는데요. 철학자이자 대학 교수인 크리스토퍼 해밀턴이라는 저자가 중년의 위기와 그 극복에 관한 철학적 고백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는 중년이라는 부정적인 감정과 자신의 삶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면서 예리한 통찰을 얻었다고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의 접근 방법도 이런 중년의 철학이라는 인식을 반영하면 보다 좋은 결과가 있지 않을까 싶네요. 새로운 열정 이전의 그 전제에 관한 고민이 들어가면 어떨까요?”
생각나무의 아이디어 뱅크인 기획팀장이 안대표의 얘기를 듣더니 머리를 탁 쳤다.
“아! 대표님과 대화하면서 중요한 깨달음을 한 가지 얻었습니다. 우리가 테라피에 심리적인 부분을 감안한다고 하면서도 보다 근본적인 부분에 누락이 있었네요. 사실 우리 생각의 원천이 내어준 결과물을 믿고 하다 보니 이런 인간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소홀한 감이 없지는 않거든요. 생각의 원천이 뛰어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아직까지는 기계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도 있다는 걸 우리가 잊고 있었습니다. 음... 이 제품은 그 근저에 중년이 가져야 할 철학적인 인식을 더 고민해야 수요자들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더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잘 반영해서 좀 더 보완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또한, 시제품 적용 결과 의외의 문제점 몇 개를 발견했다. 중년의 인식능력과 지적능력은 높으나, 자신의 고집이 확고해 타인의 견해나 주장을 수용하지 않으려는 태도. 새로운 것을 익히고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으려는 관성. 자신의 문제를 크게 자각하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 결국은 중년세대의 이러한 태도 개선을 전제로 하는 상품이 필요했다. 따라서 '태도 개선‘이라는 선결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연구를 집중했다.
이러한 중년의 관성과 태도에는 중년은 노화가 한참 진행되는 시기이고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깊이 뿌리 잡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소극적 인식을 보완해서 다른 시각으로 씨앗을 심는 작업이 필요했다.
생각의 원천의 도움을 받아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중년 또한 청소년기나 청년기와 마찬가지로 성장기의 연속에 있다. 백세시대를 맞이하여 성장과 변화 가능성을 수용할수록 몸과 마음에 긍정적인 결과가 있다.
중년의 위기의 본질은 중년이라는 시기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려는 시각이다. 변화의 중심에는 묵직한 중년의 철학이 필요했다. 중년의 시기를 사춘기처럼 불안정한 위기상황이 아닌 자연스러운 성장통의 시기로 보는 유연함이 필요했다. 결국은 중년을 제2의 성장기라고 생각하게 하는 통찰을 심어줄 필요가 있다. 청소년이나 중년이나 성장의 핵심은 꿈과 목표에 있었다. 밥벌이 때문에 잊고 살았던 꿈을 다시 찾고, 노후설계나 취미활동을 위해 새로운 목표설정을 하게 되면서 중년을 계속 성장해야 하는 시기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기획팀에서는 다양한 의견을 종합해서 개발팀에 다음과 같은 한 줄짜리 코드를 제안했다.
중년, 당신의 지금은 계속 성장해야 하는 시기다.
개발팀에서는 '중년의 성장철학‘이라는 요소를 기본 베이스로 투입했다. 테라피 이미지 재생결과, 중년의 긍정적 자기 인식은 중2병 테라피 개발과정에서와 같은 창문 안쪽의 자아를 밖으로 이끌어내는 작용을 하게 했다. 정체되거나 한계라고 생각했던 상황이 새로운 성장의 기회로 인식되도록 했다. 이러한 개발과정과 신중한 논의 끝에 다시 진행된 보완 프로젝트에서 만들어진 결과물은 소비자 만족도가 97.3%로 나왔다. 보완 테스트에 참여한 한 참석자는 ’개안수술을 받아 눈이 밝아지듯 마음속이 환해지는 그런 신기한 경험을 했다‘고 했다. 극히 미미한 부정적 반응을 제외하고는 완벽한 결과였다. 역시나 대박을 기대해도 될 듯했다.
생각나무에서는 중년갱년기 테라피가 성공적으로 완성되자 제일 먼저 민부장에게 연락했다. 제안과 더불어 적극적으로 협조해 줘서 고맙다는 감사인사였다. 생각나무 마케팅팀에서는 민부장과 그 친구들에게 다양한 선물을 선사했다. 마케팅팀장인 민수경 팀장은 민부장에게 이런 경험을 살려서 색다른 인생설계를 하면 어떻겠냐는 제안도 곁들었다. 민팀장으로부터 감사인사와 격려를 받은 날 민부장의 머릿속에서는 가슴 뛰는 생각 하나가 싹트기 시작했다.
명주네 가족 또한 생각나무로부터 여러모로 큰 도움을 받았다. 처음 명주가 진로에 관한 고민에서 나름의 해결책과 적극적인 행동을 얻었고, 말썽 많았던 지형도 자신만의 의지를 갖고 청소년기를 균형 있게 보내고 있다.
민부장과 그 친구들도 민부장의 제안 덕분에 생각나무로부터 특별한 선물을 제공받아 활기찬 중년생활을 설계하고 있었다. 한 친구는 사오정의 충격에서 벗어나 도전적으로 새롭게 일을 시작했고, 다른 친구는 경제적 문제 때문에 포기했다가 평생의 소원이었던 작가수업을 시작했고, 또 다른 친구는 가족을 위해 요리를 해보겠다며 조리사 자격증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어떤 친구는 여러 번 시도했다가 포기한 통기타 배우기를 다시 시작한다고 했다. 주택관리사와 공인중개사를 공부하는 친구들은 더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제품이 공식 판매된 이후 생각나무 앱 게시판에는 중년 고객들의 감사인사가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지만 새로 태어난 거 같다는 느낌, 자신의 정신적 신체적 변화를 믿을 수 없어 백번을 꼬집어봤다는 얘기, 벤자민 버튼의 영화가 실화가 되었다는 애교 띤 칭찬, 신혼 때로 돌아간 느낌마저 들어 부부 사이가 눈에 띄게 좋아졌다는 닭살 댓글까지.
평소와 다르게 불평불만보다는 색다른 활력이 넘치는 친구들의 저녁자리. 친구들의 표정은 한결 밝았다. 중년 무기력 탈출 테라피 시험 대상에 지원한 민부장의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야, 친구야. 이런 게 다 있었네. 무슨 마술피리도 아니고 도깨비방망이도 아니고 말이야. 우리 와이프가 내가 무슨 청년처럼 눈이 빛난다나 어쩐다나. 참 별일이네. 허허허.”
에세이 작가가 되겠노라고 공언한 친구가 시원스레 소주잔을 비우며 말을 받았다.
“하하. 자네도 그런가. 나도 요새 우리 취준생 아들한테 공부하라고 말도 안 한다네. 내가 먼저 거실에서 글쓰기 소년 같은 생활을 하고 있어서... 저녁 먹고 나면 우리 집 거실은 완전 독서실 분위기야. 덕분에 와이프랑 얘기하는 시간도 많아지고 쓸데없이 술자리 하면서 버리는 시간도 줄어들고 이거야 말로 일거양득 아닌가!”
“아이고. 자네들 보니까는 우리가 30년 전 이십 대 시절의 표정을 하고 있네. 제수씨들이 좋아하겠는데.... 부부금슬도 좋아지고. 저출생 시대에 늦둥이라도 하나씩 더 낳아봐. 하하하.”
늦둥이라는 말에 친구들이 박장대소했다. 무기력했던 인정여정에 대해 새로운 인생철학이 더해지면서 벌어진 바람직한 현상이었다. 청년시절의 기대와 설렘이 다시 중년들에게 활력과 생기라는 이름으로 찾아오고 있었다.
모처럼 토요일 저녁. 민부장 네 가족이 전부 모였다. 거실과 부엌에서 대화와 웃음소리가 넘쳐났다. 접대골프도 한철이라고 시들시들해지고, 늦둥이 아들 지형이 많이 달라졌다는 얘기를 들은 민부장도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중년 테라피를 접한 이후부터 민부장은 승진에 대한 욕망보다는 현실적인 행복과 즐거움에 더 시간을 쏟기로 결심했다. 경제적 문제에 한정되었던 노후준비에 대한 계획을 보다 구체적으로 짜기 시작했다. 현재의 직장에서 일할 수 있는 4~5년 동안 평생 현역으로 일할 수 있는 생산적인 일거리를 찾기로 했다. 아파트만 재건축할 것이 아니라 사람도 생애주기별로 재건축이 필요함을 절감했다. 그런 생각 덕분에 삶에 새로운 활력이 생긴 까닭인지 가슴의 통증도 사라지고 쉽게 잠들 수 있었다.
민부장과 지형은 거실에서 티격태격 오목을 두고 있었고, 명주와 엄마는 장 봐온 재료를 다듬어서 매콤한 닭볶음탕과 잡채를 만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말 저녁에도 집안 분위기가 썰렁했었는데, 가족들의 심리와 행동에 변화가 있은 후로는 함께 식사하는 횟수가 늘어났다. 아빠는 엄마가 꺼내온 맥주를 각자의 잔에 거품 넘치게 따랐다. 명주는 장 봐올 때 사온 생크림 케이크를 꺼내 들었다.
“오늘 이 케이크는 지형이 성적이 10%로 향상되었기 때문에 우리 가족이 축하하는 의미입니다. 꼭 1등이 아니더라도 열심히 하고 있는 우리 지형 군을 위해 큰 박수를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자 건배합니다. 우리 가족의 행복을 위해~~”
맥주를 시원스레 쭉 들이켠 엄마. 무슨 일인지 싱글벙글해진 표정으로 목소리 톤을 높여 한마디를 던졌다.
“얘들아, 요새 아빠 많이 달라진 거 같지 않니? 영업이다 접대다 모임이다 맨날 술자리에서 못 헤어나더니만... 최근에는 고3 같은 모범생활맨이 되었잖아. 더 젊어진 거 같기도 하고 말이야. 호호호.”
민부장은 마치 자신의 이두근 알통을 뽐내듯 양쪽 팔을 들었다. 아빠의 색다른 행동을 보면서 명주와 지형이 동시에 오호 탄성을 내지르면서 아빠의 변신을 즐거워했다. 엄마는 남편의 어깨에 다정하게 손을 얹으면서 한 가지 희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있잖아. 아빠한테 좋은 일이 하나 생겼지 뭐니.”
“아니 엄마, 그게 뭔데요?”
명주와 지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엄마의 그다음 말을 기다렸다.
“글쎄 저번에 아빠가 생각나무 주식회사에 제안해 중년테라피로 만들어진 사연을 어느 신문 칼럼에 기고했었잖아. 그러고 나서 중년 갱년기 테라피가 완전 유명해지면서 어느 대학에서 연락이 온 거야. 자신들이 신중년 관련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있는데 이러한 주제에 대해서 강의를 해달라고 말이야. 국내에 이쪽 분야를 연구하는 교수님들이 없다고 해서 생각나무 주식회사의 민수경 팀장님인가 하는 분이 적극 추천해 주셨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 대학에서 다음 학기부터 겸임 교수로 출강하게 되었다는 얘기지. 물론 여러 언론사 기자들한테도 연락이 오고 말이야!”
명주는 급작스런 아빠의 깜짝 변신을 듣고는 로또에 당첨된 사람처럼 까악 비명을 지르며 동생 지형과 하이파이브를 했다.
“오, 완전 대박이다. 아빠가 고민했던 것들이 아빠한테 새로운 기회로 돌아오다니. 야, 신기하네. 엄마 그렇죠.”
지형도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지으며 아빠에게 말했다.
“와, 그럼 우리 아빠가 교수님 되는 건가요! 앞으로 민교수님이라고 불러야 되겠네.... 히히히.”
“하하하. 무슨 교수님까지.... 아빠가 뭘 잘했다기보다는 생각나무 주식회사가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그런 제품을 만들고 있는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덕분에 아빠는 숟가락 하나 올린 거뿐이고...”
야호, 지형은 아빠의 얘기를 듣고는 두 팔을 들어 올려 환호성을 내질렀다. 민부장은 가족들의 칭찬과 환호에 모처럼만에 뿌듯함을 느꼈다. 자신이 살아있음을 근거하는 이유가 밥벌이에서 좀 더 다양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가족들의 시끌벅적한 반응이 결코 싫지 않았다. 그동안 내면 깊숙이 숨겨져 있던 소싯적의 꿈이 다시 살아나는 느낌마저 들었다. 최근에는 가족들 몰래 인문사회 대학원과정도 여러 곳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마치 한창때의 아이들처럼 더 성장하고픈 욕망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늦은 시간까지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가족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오롯이 먹고 마시며 대화하는 시간에 있다. 그 시간이 부족할수록 가족은 해체위기에 놓을 것이며, 그 시간이 많아질수록 가족의 친밀도와 행복지수는 높아질 것이다. 인생의 위기는 누구에게나 닥쳐오기 마련이다. 중2에게도, 20대 대학생에게도, 50대 중년에게도 예외는 없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자신의 생각과 태도를 바꿔 그 위기를 지혜롭게 넘기고 있다. 지금 명주의 가족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