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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민 Aug 28. 2015

아빠는 돈이 없었고, 나는 부유했다.

행복하자. 오늘보다 내일 더.

일상수필집 04_아빠는 돈이 없었고, 나는 부유했다.


- 돈 한 푼 없는 남자가 한 여자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 여자는 데이트 신청을 수락했다. 뜨거운 여름날, 남자는 원피스와 구두를 예쁘게 입은 여자를 데리고 그림자 하나 없는 울산    로 데리고 갔다. 그리곤 몇 시간 동안 군대 가는 나를 기다려줄 수 없냐고 그녀를 설득했다. 식사 때가 되어 그들은 돈가스를 먹으러 작은 양식 갔다. 수프가 나왔다. 남자가 여자에게 물었다. "설마 이게 끝이가?" 여자가 대답했다. "오빠. 돈가스는 다음에 나와요."





"여보, 잠깐만!"

한 부부가  어린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동네를 산책하고 있었다. 길을 걷다 보니 옷을 무더기로 쌓아놓고 파는 원피스 가게가 나왔다. 젊은 여자는 사람들 틈에 섞여 한참을 원피스 구경을 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그녀는 자신의 남편과 아이에게 돌아왔다. 빈손이었다. 그는 의아해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왜 빈손이야, 마음에 들면 사지 그랬어.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너무 비싸서 못 사겠어. 그가 다시 그녀에게 물었다. 얼만데? 그리고 그녀가 대답했다. 오천 원.


오천 원이란 말을 듣는 순간, 아빠의 억장은 무너졌다고 한다.  그때 아빠는 30만 원을 벌었다. 이십 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도 아빠는  그 이야기를 한다. 오히려 엄마는  그때의 일을 아무렇지 않게 추억한다. 여보,  그때 우린 돈이 없었지만, 행복했잖아. 그러면 아빠는 엄마를 한참 동안 따듯한 눈으로 바라보셨다.


동네에서 했던, <오0오 과자> 쌓기 대회. 동생은 나보다 더 높이 쌓았다.

내가 크면서 우리 집은 점점 괜찮아졌다. 아빠는 더 이상 한 달에 30만 원을 가지고 오지 않았고, 엄마도 오천 원 원피스를 구입하는데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그래서 동생과 나는 부유하진 않았지만 부족하게 자라진 않았다. 내가 기억하는 가난은 많지 않다. 어렸을 때라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이유도 있지만, 기억을 더듬어보면 나는 항상 하고 싶은 것을 다했다. 읽고 싶은 책을 다 읽었고, 꽤 많은 곳을 가족과 놀러 갔다.





우리의 외식은 다양했다. <김0김밥>집, 짜장면 집, 대학 캠퍼스 내 학식. 화룡점정은 바로 생일에 가는 피자집이었다.

유일하게 가난에 대해 기억하는 순간이 있다. 바로 외식이다. 집 근처에 있던 <김0김밥>집에서 먹던 김밥 몇 줄과 따뜻했던 가락국수(라면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행복했던 동생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스쳐간다. 우리는 그 가게에 종종 갔었고,  그때마다 주인아저씨는 항상 사이다 한 병을 서비스로 주셨다. 그 당시에는 우리에게만 주시는 줄 알고 어린 마음에 굉장히 감사했는데, 크고 돌아보니 아마 모든 사람에게 주었던 서비스가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이사를 갔다. 이사와 동시에 우리의 외식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다. 짜장면 집이었다. 짜장면 하나에 단무지 하나 그리고 바삭했던 군만두가 그렇게 행복했다. 내 기억 속에 가족은 한 번도 가난했던 적은 없다. 엄마는 뼈저리게 가난했다고 하는데, 이상했다. 내 기억 속의 가족들은 모두 웃고 있고, 따듯했기 때문이다.





내 기억이 조금 편파적임을, 스물이 넘어 알게 되었다. 몇 가지 왜곡된 에피소드를 얘기해보자면, 어렸을 적에 우린 일주일에 한 번씩 꼭 용인에 있는 큰 워터파크에 갔다. 워터파크 옆에 붙은 놀이공원도 갔다. 용인 근처에 살 동안 항상 그랬다. 못가도 한 달에 3번은 갔다. 워터파크와 놀이공원을 당일치기로 가는 주말이면, 엄마는 아침부터 도시락을 준비하셨다. 큰 배낭에 물과 도시락 그리고 중간중간 먹을 과자 같은 간식도 챙기셨다. 그렇게 아빠의 작은 은빛 차를 타고 꿈의 나라로 여행을 떠났다.

그 기억은 이런 사정이 있었다. 그 당시 아빠와 어렸을 때부터 절친했던 형이 우리 가족 일 년 회원권을 끊어 몇 번이나 아빠에게 선물했다고 한다. 가난했던 아빠가 안타까웠는지, 사랑하는 동생의 마음을 알았던 건지 그 당시 여유가 있었던 삼촌은 우리 가족에게 작은 꿈을 선사했다. 삼촌 덕분에 어린 우리는 매 주말만 되면 미친 듯이 그곳에서 에너지를 풀 수 있었다. 이 얘기를 하며 엄마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내가 왜 그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도시락 준비했는지 알아? 들어가서 사 먹으면 너무 비쌌어. 그래서 그렇게 물이고 과자고 바리바리 다 싸간 거야.






그런 기억은 또 있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 집엔 책이 참 많았다. 온갖 책이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굳이 동화책을 새로 사달라며 엄마에게 조를 이유가 없었다. 위인전 세트부터 동화 세트까지, 집에 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렸을 적부터 책을 또래보다 많이 읽었다. 책을 좋아하고, 글을 읽고 쓰는 것에 거부감이 없는 지금의 나로 자랄 수 있었다.


엄마는 아파트에 누가 가져다 버린 책들을  오셨다. 경비 아저씨에게 말해, 책들을 분리수거 함에서 왔다. 책 표지를 일일이 다 손으로 닦으셨다. 책장을 주어 오는 날이면 엄마는 꼭 아빠를 기다렸다. 누가 책장을 먼저  가면 어쩌나 가끔은 발도 동동 굴리셨다고 한다. 그 책장을 엄마와 아빠가 주어 오는 날들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아빠는 힘이 장사였다. 현관문에 아슬아슬하게 서서, 다친다며 저 쪽에 피해있으라 하셨다. 엄마는 걸레로 그 책장을 깨끗하게 닦았다. 그렇게 온 책들을 엄마는 그 책장에 차곡차곡 쌓으셨다. 그리고 직접 책을 만드셨다. 색색 종이에 글자를 쓰고 색연필로 꾸미고 우리 사진을 붙여 코팅을 해, 여러 장을 연결했다. 엄마는 온 컬렉션 옆에 엄마의 책을 꽂으셨다. 그리곤 잠이 오지 않아 한참을 엄마를 붙들고 있는 밤이면, 엄마는 그런 우리를 가만히 앉혀두고 구연동화를 하셨다. 옛날 옛적에 호랑이가 살던 시절에 말이지, 하시며.





안타깝게도 엄마의 수많은 요리는 사진에 남지 못했다. 집에 카메라가 없었어, 엄마가 말했다.

마지막 기억이다. 엄마는 솜씨가 좋으셨다. 내가 유치원을 다니던 그 시절엔 어머니들이 아이들 간식을 돌아가며 챙겨주셨다. 엄마는 직접 도넛을 튀겨 반 간식으로 넣어주셨다. 난 반 아이들 앞에서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다른 집 아줌마들은 그냥 사서 간식을 돌리는데, 우리 엄마는 손수 만들어서 예쁘게 담아 주셨다. 간식을 본 친구 엄마들은 다 내게 한마디 칭찬을 하셨다. "얘, 너는 참 좋겠다. 어머니 솜씨가 참 좋으시구나. 정성이 대단하셔!"


엄마는 돈이 없었다. 햄버거 하나 간식으로 넣을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엄마는 도넛을 선택했다. 다른 기억은 잘 나지 않는데, 부엌만큼은 기억이 난다. 참 좁았다. 아빠가 보시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주방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곳에서 엄마는 혼자 반죽을 풀어 모양을 빚고 기름에 도넛을 튀기셨다. 아마 하나하나 손 가지 않는 곳이 없었을 테지. 어쩌면 뜨거운 기름이 엄마의 손을 몇 번이고 덮쳤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엄마는 그 좁은 곳에서, 아빠가  미안해할까 봐 어디에도 말도 못 한 채, 혼자  전전긍긍하셨다.







아빠와 엄마는 돈이 없었지만, 나는 부유하게 자랐다. 부모님은 단 한 번도 우리  앞뿐 아니라, 우리 뒤에서도 싸우지 않으셨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부모님이 언성을 높여 싸운 것을 본 적이 없다. 내 기억 속의 부모님은 그리고 지금 함께 사는 우리 가족은 웃는 것 밖에 기억에 없다. 아빠는 엄마를 사랑했고, 엄마는 아빠를 그 누구보다 믿었다. 나는 그런 엄마와 아빠가 좋았고, 그런 우리 가족이 좋았다.







아빠가 우리를 키우는 철칙은 분명하셨다. 절대  거짓말하지 않기. 아빠는 내가 전교 꼴등을 했을 때도 매 한번 들지 않으셨지만, 작은 거짓말을 할 때엔 단호히 매를 드셨다. 내가 아홉 살, 동생이 여섯 살쯤이었나. 눈이 오던 날, 우리 가족은 오랜만의 외식을 마치고 가게를 나섰다. 가게 앞에는 큰 사탕 기계가 있었다. 동전을 넣으면 데굴데굴 사탕이 굴러 나왔고, 그것을 구경하는 재미는 쏠쏠했다. 200원을 넣어 사탕 두 개를 뽑았다. 사탕을 집어 들고 가려는데, 잔돈 100원이 데구루루 굴러 나왔다. 아빠는 그 100원을 허리를 숙여 집어 드셨다. 그리곤 우리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얘들아 기억하렴.
어른이 되어도 100원에 너희의 양심을 팔지 마렴.
100원보다 너희 양심이 더 중요하단다.

그리곤 아빠는 고작 그 100원을 들고 가게로 다시 들어가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난  그때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눈 오던 날, 100원짜리 빨간 사탕, 가게로 들어가던 아빠의 뒷모습. 지금까지 그 기억이 마음에 선명히 각인되어 있다.





살랑살랑 원피스를 입고 나온 엄마를, 아빠는 그 그림자 하나 없는 땡볕에 데려가 몇 시간을 붙잡아 두었다.

내 기억이 어쨌건, 아빠는 돈이 없었다. 돈가스를 먹어본 적이 없어,  데이트할 적 엄마에게 '양식집이 돈은 이렇게 비싼데, 겨우 이 수프 하나 주나?' 물어보셨단다. 그것도 군대를 기다려달라며 부탁하는 자리에서. 아빠는 그랬다. 엄마 또한 아빠를 만나 가난한 청춘을 보냈다. 고작 오천 원짜리 원피스 앞에서 치맛자락만 만지작만지작하다 결국 빈손으로 나에게 돌아왔다. 아빠는 돈이 없었다. 조금 더 싼 마트에서 내 분유를 2개 사기 위해 1시간 정도 되는 길을 뛰어 왕복하셨다. 엄마는 콩알만 한 부엌에서 살림을 하셨다. 그 작은 부엌에서 그 어린 우리의 배를 채우셨다.





사진의 검정 스탠드는 아직도 우리 집에 있다. 아빠의 책상에서 나의 책상으로. 스탠드는 아마 나와 연배가 비슷할 것이다.

아빠와 엄마는 돈이 없었지만, 나는 부유했다. 아빠는 엄마만을 사랑했고, 밤낮을 일하셨다. 기억 속의 아빠는 항상 커다란 안경을 코에 얹어 두고, 책을 읽었다. 아빠는 우리의 미래에 목숨을 걸었다. 엄마는 아빠를 반석처럼 믿었고, 늘 우리에게 시선을 맞추셨다. 학교를 다녀오면 엄마는 항상 집에서 우리를 맞았고, 밥상을 내어 주셨다. 학교에서 있었던 작은 이야기도 귀 기울여 들으셨다. 그 시절, 그 자리. 부모님은 돈이 없었지만, 가난하진 않으셨다.  그때 나와 동생은 헌 책을 주워 읽었지만, 가난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는 부유했다. 아버지는 돈이 없었지만, 우리 가족은 부유했다.


너무 덥던 어느 여름날, 온 가족이 거실에 얇은 이불을 피고 누웠다. 창문 밖에서 들리는 새벽 폭주족 소리를 뚫고 아빠가 엄마에게 물었다. 여보, 당신은 언제가 가장 행복해? 그러자 엄마가 대답했다. 오늘. 당신과 아이들과 함께하는 오늘이 가장 행복해. 그러자 아빠가 말을 이어 나갔다. 여보. 우리 내일 더 행복하자. 어제보단 오늘, 오늘보단 내일 더 사랑하자. 나와 동생은 닭살이라며 온갖 오버 액션을 하며, 엄마를 껴안았다. 그러자 엄마는 더 크게 말했다. 우리 내일 더 행복하자! 그리곤 한 마디를 덧붙이셨다. 이제, 자라. 그만 떠들고.


자면서 생각했다. 아마 동생도 나와 같은 생각이 아니었을까. 지금 누운 이 거실 공간이, 세상 그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우리의 자리라고. 아빠가 엄마를 사랑하고 내가 동생 너를 사랑하는 자리, 그 어떤 불행도 뚫고 들어올 수 없는 신뢰의 자리, 혹여 그 불행이 뚫고 들어올지라도 무너지지 않을 자리.


아빠, 엄마. 우리 행복하자. 어제보다 오늘 더, 오늘보다 내일 더.

사랑하자.










우리가 사랑했던 모든 순간

/우리가 함께했던 그 모든 순간에 대한 9가지 시선


더워서 온 몸에 땀띠가 났다. 엄마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를, 그 더운 여름 내내 안으셨다.

1. 어렸을 적 나의 별명은 아톰이었다. 머리에 분홍 핀을 꽂아도 다들 남자답게 잘 생겼다고 했다고 한다. 내가 처음 엄마 뱃속을 나왔을 때, 신생아를 처음 본 엄마는 내가 원숭이처럼 쪼글쪼글해 무서웠단다. 고모들은 태어난 나를 보고 견적(?)이 많이 들겠다며 아빠를 위로했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아빠의 공주님이다.









2. 너는 애기 치고 무신경했어, 엄마가 말했다. 넌 머리만 뉘이면 바로 잤어. 분유를 먹고서도 바로 잠들었어. 그랬던 네가 예민해지기 시작했을 때가 언제냐면, 동생이 태어났을 때야. 동생이 생기고 네가 얼마나 나만 쫒았다니 던 지. 넌 기억도 안나지?








3. 시간이 나면 엄마는 나를 공원으로 데리고 나가셨다. 아침부터 도시락을 준비하시곤 돗자리를 챙기셨다. 그리곤 공원에 앉아 한참을 나와 바디랭귀지(?)를 하셨다. 어렸을 적 내 사진을 보다 보면, 공원이 참 많이 나온다. 엄마는 참 부지런하셨다.










4. 이렇게 어렸던 내가,  스물다섯이 되었다. 우연찮게 엄마와 옛 사진을 보다 엄마가 이 사진을 보고 웃음이 터지셨다. 아, 너네 아빠 저 때 무좀 있었는데!!








5. 동생은 꽤 잘생겼었다. 어린이 모델을 몇 번 권유받기도 했다. 하지만 동생의 본성(?)은 가족밖에 몰랐다. 이 사진이 동생의 유년시절을 모두 말해준다.







6. 어렸을 적 사진이 꽤 많은 편이다. 아빠는 셋째 누나에게 일주일에  한 번씩 카메라를 빌려오셨다. 그리곤 일주일에 한 번 몰아서 사진을 찍어주셨다. 언젠가는 작은 테이프 녹음기를 빌려오셨다. 그리곤 거기에 어린 나의 옹알이 소리를 녹음하셨다. 이건 최근에 있었던 일인데, 엄마가 옛 물건을 정리하면서 내 옹알이 테이프를 실수로 버릴  뻔하셨다. 그래서 엄마에게 나는 말했다. 엄마 초심을 찾으세요, 하고.










7. 지금의 엄마는 분홍빛 옷을 딱히 좋아하지 않으신다. 그럼 왜 이때 분홍 투피스에 분홍 장미까지 들고 있었냐 엄마에게 물으니, 친구 결혼식에 입고 갈 옷이 없어서 너네 이모한테 빌렸다, 너네 이모 못생겼는데 옷은 또 공주과 옷 좋아하잖냐, 엄마는 대답하셨다.










8. 동생과 나는 유난히 자유로운 꼬마였다. 동네 아줌마들이 신기하게 볼 정도였다. 시끄러웠고 장난기 많았다. 가던 길 아무 데나 주저앉아 가위 바위보를 신나게 하다가도, 네가 더 세게 때렸느니로 싸우고 도망 다니고 잡고 그랬다.










9. 그렇게 동생과 난, 어른이 되었다. 부모님의 긴 인생 스토리를 들으며 우린 다짐했다.

돈이 없어도, 가난하게 살지는 말자,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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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청민의 말]


오랜만에 옛 사진첩을 한가득 꺼내어 보았습니다.

선물 받은 스타벅스 커피잔에 따듯한 커피 두 잔을 내려,

엄마와 오랜만에 담소를 나눴습니다.


엄마, 우리 돈 없었다면서 옷 꽤 잘 입었네?

그러자 엄마가 대답하셨습니다. 그거 다 삼천 원, 오천 원짜리 옷이야.


어떤 사진은 깔깔 웃으며,

어떤 사진은 추억에 잠겨 한참 동안 사진을 보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습니다.


비가 옵니다. 계절이 바뀌는 순간이 성큼 다가왔네요.

오랜만에 사랑하는 사람과 마주 앉아, 옛 기억을 추억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오늘도 잊지 않고 찾아주시고,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셔요.



[2020년 4월 덧붙이는 말]


안녕하세요,

2015년 '아빠는 돈이 없었고, 나는 부유했다'를 쓴 청민입니다.


6년 전에 썼던 이 글이 최근에 알고리즘(!) 덕분에, 다시금 많은 분을 만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남겨주신 댓글을 일하는 틈틈이 들어와서 읽고 있습니다. 6년 전 제가 쓴 글에 위로를 받았다고 해주시는 댓글들에, 잘 읽었다는 말씀에 오늘의 제가 큰 위로를 안고 갑니다. 모두 댓글을 달지 못해 죄송합니다.


6년 전 글을 다시금 읽어보니 맞춤법과 구조를 자꾸만 바꾸고 싶고, 부끄러운 마음도 들어서 고치려고 했지만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에만 쓸 수 있는 마음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솔직했고, 그래서 용감했던 시절의 글이기 때문에 6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온기를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읽어주신 모든 분께 감사의 인사 전합니다. 여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봄날이지만, 그래도 문득문득 잊지 말고 꼭 행복하시기를 멀리서 응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1년 4월

글쓴이 청민 드림.




글쓴이 │ 청민(淸旻)

@w. chungmin : 일상 여행자 계정

@ruby. notebook : 출판 마케터 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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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개.


아주 옛날, 아빠가 정말 돈이 없던 시절, 우리 가족의 이야기.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엄마가 동화책 전집, 책장과 우리 옷 같은 것을 올 때 꼭 하나 지키는 것이 있었다. 다른 동에서 오기, 절대 우리 아파트 분리수거함에서는 가져오지 않기. 우리 기를 죽이지 않기 위한 엄마만의 법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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