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가 잠시 끊겼다
지난 시간의 기억은 잔상처럼 남아 두 사람 사이의 공기를 미묘하게 바꿔놓았다. '멋진 하루'에 대한 짧은 대화 이후 찾아온 침묵은 이전의 어색함과는 조금 다른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지현은 창밖을 보던 윤섭의 옆얼굴에 드리워진, 12년의 시간이 만든 듯한 그늘을 다시 한번 보았다. 스무 살, 영화에 대한 순수한 열정으로 반짝이던 그의 눈빛과는 다른, 깊이를 알 수 없는 피로감이 느껴졌다. 문득 그의 현재가 궁금해졌다.
“지금 하는 일은 어때? 제작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윤섭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지현을 보았다. 그의 눈빛에 찰나의 씁쓸함이 스쳤다.
“나쁘지 않은 거 같아.”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런데… 옛날 같은 마음으로 영화 보기는 좀 어렵네. 일이 되니까.”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복잡한 감정들을 지현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순수한 열정만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없게 된 어른의 피로감. 어쩌면 자신 역시 다르지 않았다.
“지현이 너는… 프랑스는 어땠어? 공부는 잘 마쳤고?”
그가 이번에는 프랑스 이야기를 꺼냈다.
“응. 공부는 잘 마쳤는데… 너도 알겠지만 영화로 먹고 살기가 쉽지 않더라고.”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꿈을 좇아 떠났던 시간들이 마냥 낭만적이지만은 않았다.
그가 깊이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영화가 뭐라고… 나도 뭐, 그냥 엄청 애쓰면서 사는 거지.”
그의 말 속에는 그녀와 같은 종류의 고민을 통과해 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이해가 담겨 있었다. 그 순간, 두 사람은 12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현재의 고단함을 공유하는 어른으로서 마주 보고 있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들 사이의 벽이 조금 허물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대화가 잠시 끊겼다. 지현은 커피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때, 맞은편에 앉은 윤섭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빤히 쳐다보는 것은 아니었지만, 무언가를 찾거나 확인하려는 듯한 미묘하고 집요한 눈길. 그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에 잠시 머물렀다가, 아래로 내려와 그녀의 손 부근을 스치고 다시 커피 잔으로 향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지현은 그 시선의 의미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무엇을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12년 동안 그녀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혹은 어떤 변화가 없었는지. 그녀는 애써 그의 시선을 모른 척하며 커피를 마셨다. 심장이 다시 조금씩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의 관심이 싫지 않으면서도, 그 시선 끝에 있을지도 모를 질문들이 두려웠다.
어느새 30화입니다.
시작할 때는 몰랐는데, 알고보니 브런치북은 30화까지만 업로드할 수 있다고 하네요.
남은 이야기를 어떻게 전할 수 있을지, 저도 조금 더 고민해보려 합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