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소성과 탄성 ( Let it be )
어릴 때 시골에서 비가 내리고 나면 물러진 진흙이 있는 곳에 가서 찰흙을 캐와 물과 함께 반죽을 해서 탱크도 만들고 소꿉장난을 하고 놀았던 기억이 있다. 지금처럼 문구점도 흔하지 않았지만 색깔별로 만들어져 있는 찰흙을 구할 수도 없었는데 학교 수업 시간에 가끔은 찰흙을 교재로 가져가야 할 때는 그렇게 뒷산이나 앞산의 찰흙을 캐가곤 했다. 아마도 지금 이삼십 대는 이해하기 쉽지 않을 것 같다. 사십 대는 넘어야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학교 수업에서 만들어 그늘에 말려 놓은 그 찰흙 탱크를 다음날 학교에서 발견하고 그 탱크의 포신 방향이 약간 삐뚤어진 것 같아 탱크 포신을 정면을 향하도록 제대로 돌려놓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가소성을 잃고 굳어버린 그 탱크 포신을 정확하게 정면으로 다시 돌려놓는 방법은 그동안 실패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세 가지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첫째, 이미 시간이 지나 굳어버린 탱크 포신을 떼어 내서 물에 담그고는 녹여서 다시 만들어 붙이는 방법이 있다.
둘째, 비뚤어진 포신을 정확하게 정면을 향하도록 고치는 것을 포기하고 지금의 그 탱크에 만족하도록 내 마음을 바꾸는 차선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마저도 탱크를 다시 고치려다 완전히 망가뜨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이도 저도 하기 싫고 자신이 없거나, 그 탱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물에 그 탱크를 집어넣고 완전히 부수고 난 후 그 찰흙을 다져서 완전히 다시 만드는 방법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가끔 생활이나 현실에서 그 어떤 무엇에 대하여 그와 비슷한 경우를 당할 때가 종종 있다. 자녀 교육, 부부 관계, 연애 관계, 직장 생활, 교우 관계 등등 많은 경우에 어릴 때 찰흙놀이처럼 원래 아무것도 없었던 관계, 즉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삶에서 부모라는 이유로, 또는 아내, 남편, 상사, 애인, 친구라는 이유로 내 주변 사람들에 대하여 사랑과 관심을 빙자하는지도 모르고 자신의 생각대로, 자신의 마음대로 바꾸고 고치려고 한다.
하지만 그때를 놓치고 시간이 지나 그런 시도를 한다면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또한 그 대상이 되는 누군가를 불행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이미 가소성이 굳어져서 그렇게 바뀔 수도 없거니와 그 처음과 다른 나의 변심이 꼭 맞는 일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성질과 있는 그대로의 성질을 좋아하고 받아들여 나와 새롭게 만들어진 처음의 관계 그대로를 인정할 수 있어야 불행을 막을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모든 관계에서 처음처럼, 처음 그대로를 인정하고 사랑하는데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찰흙놀이를 하려면 찰흙이 가지고 있는 처음 그대로의 성질을 이해하고 놀이를 하는 것처럼, 우리도 누군가의 처음의 그 성질, 인격, DNA 그 자체를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소유가 아닌 무소유, 무위자연, Let it be, 서로 존중하고 인격체로 대하는 첫출발이 될 것이다. 모든 관계나 모든 사람이 완벽할 순 없다. 욕심일 뿐이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 조차도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데 삼십 년, 오십 년 아니 더 걸릴 수도 있다. 노력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불행을 겪을지도 모른다.
*가소성과 탄성
물체는 힘이나 열과 같이 외부로부터 자극을 받으면 그 형상이 변하는 변형(deformation)을 일으킨다. 물체는 외부로부터 자극을 받으면 변형에 저항하려는 성질과 변형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두 가지 상반된 성질을 나타낸다. 전자를 탄성(elasticity)이라고 부르고 후자를 가소성 혹은 소성(plasticity)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