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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룸펜 Feb 06. 2022

결혼 못 했지만 파스타는 먹고 싶어

결못남은 실패한 만남이 많아서

  엄마, 저는 이번에도 결혼할 여자를 못 만났어요. 착잡하고 짜증 나요. 아시다시피 엊그제는 특별히 엄마가 주선해주신 건너 건너 집안의 처자를 만나고 왔지요. 이건 정말 집안들이 허락한 선자리였으니까, 당사자들끼리 마음에 든다면 정말로 결혼까지 스무스하게 흘러갔을 테니까, 저도 상당히 기대했는데 아쉽게도 인연이 아니었어요. 어떻게 한 번 만나보고 그걸 아냐고요? 아하하, 이쯤 되면 소위 결혼시장에서 구른 짬밥이 장난 아니어서 1시간이면 서로를 충분히 파악하는 경지에 올라버린답니다. 왜 저 어릴 때 만화에서 나온 스카우터라고 기억나세요? 표정이 왜 그러세요?


  네? 왜 그 뒤로 연락 더 없냐고 여자네 엄마가 중매하신 분께 연락했다고요? 아니 여자애는 아쉬우면 자기가 직접 나한테 카톡하면 되지 왜 그런대요? 안 그래요? 참네, 이런 것도 마음에 안 드네 정말. 이거 보세요. 인연 아니라니까요. 아들이 이번에도 결혼할 여자를 못 만났다는 속상한 사실을 함께 받아들여주세요. 너는 눈을 좀 낮추라고요? 자세도 낮추라고요? 그러다 영원히 결혼 못 한다고요? 엄마……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잖아요. 눈을 낮추라는 소리를 지겹게 들은 만큼 그 횟수만큼 말이죠. 이게 눈을 낮춘 거예요! 저는 분명 매일매일 눈을 조금씩 낮추고 있어요. 네? 지금 엄마를 가르치냐고요? 아뇨 설마요. 그렇지만 저도 마음속에 정해둔 기준이란 게 있다는 거죠. 하한선 말이에요. 그것보다는 눈을 못 낮춘다는 거예요. 그건 눈을 낮춘 게 아니라 눈이 아예 없는 거란 말이에요. 눈을 낮추고 빨리 결혼하라는 말씀에도 불구하고요. 이렇게 매번 인연을 못 만나게 되더라도요. 물론 정말 제가 그 하한선마저도 파괴해버리고 운명과 대타협한다면, 내 한계를 마주하고 그 패배를 수용한다면, ‘결혼이란 것’은 금방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제가 얼렁뚱땅 아무와 결혼해버렸다가 후회하고 안 맞아서 고통 속에 살다가 혹시라도 이혼하게 되는 비참한 사태를 바라시는 것은 아니잖아요? 또 이렇게 엄마를 협박하는 거냐고요? 그럴 리가요…… 저는 정말 그렇게 되면 너무나 슬플 것이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인 거죠. 진정하세요.


  네 알아요. 안다고요. 결혼식장에서 축의금 본전 회수도 하셔야겠지만 참, 이게 쉽지 않네요. 그런데 축의금은 사실 이제 저 또한 이곳저곳 많이 뿌려둬서 본전 생각이 절실한 나이가 되어버리긴 했어요. 게다가 그들이 제 결혼식에 와주기는 할까 걱정도 앞서고요. 물론 제 결혼식이 있을지가 더 큰 문제겠죠. 마음 같아서는 저도 열 번은 더 결혼했어요. 그간의 수많은 인연들과 잘됐더라면, 하는 제 상상 속에서요. 아리따운 신부, 무수히 쏟아지는 박수와 생기 넘치는 꽃 장식, 카메라의 플래시 세례, 그래 드디어 너도 우리처럼 결혼에 성공한 유부의 대열에 합류하는구나, 싶은 하객들의 인정의 눈초리, 그 고조된 분위기 속에 당당히 걸어가는 나 자신의 모습까지 뇌내망상 시뮬레이터를 이미 몇 번은 돌려봤는데요. 현실은 아직 이 천장 아래 혼자 누워있네요. 그간 돌아다닌 남의 결혼식장은 어디가 좋은지 외워뒀는데 말이죠.


  그거 아세요? 요즘엔 비혼을 선언하고 돈을 회수하는 방법도 있대요. 회사에서도 그런 거 복지 제도로 생기는 곳들이 있다고 하고요. 맞다, 회사 동기회에도 비혼 선언하면 축하금(결혼 축하금 대신)을 준다는 회칙이 새로 생겨버렸어요. 그래서 결혼 안 할 거냐고요? 비혼 선언이라도 할 거냐고요? 아니에요 한다고요. 저 결혼할 거예요! 이번에 만난 분과는 아니었단 얘기를 하는 거죠. 오해하지 마세요. 만남은 어땠냐고 기대의 눈빛으로 물어봐주셨지만 죄송하게도 안타깝게도 이번에도 인연이 아닌 거였어요. 게다가요. 아까 자세를 낮추란 얘기를 하셔서 그런데요. 제가 여자네 동네까지 1시간도 훨씬 넘게 운전해서 찾아갔잖아요. 그리고 헤어질 때는 제가 여자네 집 앞까지 운전해서 데려다주고 돌아온 거예요. 그러면 이 정도 했으면 ‘잘 들어가셨나요? 데려다주셔서 고마웠어요!’ 정도의 메시지 정도는 먼저 보내와야 하지 않나요? 관계 연장의 의지가 있다면요. 그런데 일언반구 없어 놓고, 왜 연락 없냐고 엄마들을 통해서 얘기했다고요? 와…… 아니 이게 30살 넘은 사회인의 행동인가 싶어요. 이런 사람이랑 어떻게 함께 세상을 헤쳐나가겠어요. 내가 다 맞춰주고 모셔줘야 하게?


  아, 그래도 주말에 여자 만나서 덕분에 파스타는 먹고 돌아왔어요. 아들이 파스타 좋아했냐고요? 남자는 싫어하는 거 아녔냐고요? 저 완전 좋아해요. 20대의 남자라면 파스타를 싫어할 수 있어도, 30대의 남자라면 파스타 좋아할 걸요? 특히 크림 가득한 까르보나라를 먹으면 기분이 매우 좋아지거든요. 남자면 돈가스에 국밥만 좋아하는 줄 아셨나요? 아들도 문화인이고 교양인이고 그렇답니다. 제가 좀 까다로운가요. 물론 저도 어릴 때는 파스타 안 좋아했어요. 여자들이나 먹는 건 줄 알았고 말이죠. 분위기도 어색하게만 느껴졌고, 가격도 좀 비싼가요? 운 없어서 셰프 호소인이 만드는 형편없는 파스타에 걸리기라도 하면 돈 아깝고 기분까지 버리기 일쑤였죠. 그런데 말입니다. 입맛이란 게 바뀌더라고요. 취향이 바뀌듯이요. 저는 오징어를 싫어했는데 지금은 너무 좋아요. 과자도 새우깡을 왜 먹는지 이해가 안 됐는데 이젠 좋아하는 과자가 됐죠. 그렇게 잘 바뀌면서 눈은 왜 못 낮추는 거냐고요? 아니 왜 이야기가 자꾸 그렇게 흘러가는지 모르겠지만요…… 이것도 취향을 조정한 거래도요? 저는 눈 낮췄어요 정말로요!


  좋아한다는 파스타는 혼자 만들어 먹으면 되지 않냐고요? 그걸 제가 왜 모르겠어요. 엄마 아들이 바보가 아닌데요. 저도 파스타 만들 줄은 알아요. 노총각이면 할 줄 아는 요리나 필살기가 몇 개쯤은 생겨버리는 거 아시잖아요. 제가 만드는 떡볶이나 부추전 좋아하시잖아요. 그런데 중요한 건 먹는 것 그 자체보다 파스타와의 시공간, 동행인과의 대화, 그것에서 피어나는 몽글몽글한 감성 아니겠어요? 주말의 그 여유로운 브런치 시간에서만 느낄 수 있는 분위기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요. 남자들끼리 파스타 먹으러 갈 일은 결코 없단 말이에요. 사실 저는 여자들끼리의 그 친목이 너무나 부러워요. 여자들은 어디든 갈 수 있더라고요. 정말로 그 어디든요. 여자끼리라면 무엇이든 함께 할 수 있는 그 마법이랄까…… 그것이 너무나 부러운데 그에 비해 남자들끼린 갈 수 있는 곳이 마땅치 않아요. 감성이 충전되지 않는 곳들뿐이에요. 지겨워 죽겠다 싶은 곳들뿐이란 말이에요. 술집, 밥집, PC방, 당구장…… 건전한 곳은 끽해야 카페죠. 사실 카페라는 곳도 십 수년 전 만해도 남자끼리 가면 수군대는 분위기와 이상한 눈초리가 있었는데요. 그걸 생각하면 앞으로 조금만 더 버티면 남자 둘이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가서 파스타를 당당히 먹어도 되는 걸까요? 어디 브런치 카페에서 주말에 남자끼리 11시쯤 브런치 세트 메뉴 즐겨도 괜찮은 날이 오는 걸까요? 그럴 일은 아마 없을 것 같아요. 남자끼리 편하게 브런치 감성을 느끼고 싶어도 안 될 거란 말이죠. 참! 저의 제안을 수락하는 남자도 뭔가를 오해하고 기대할지도 모르는 일이고요.


  그래서 저는 역시 결혼해야 할지도 몰라요. 저는 브런치를 즐기고 싶어서, 파스타를 먹고 싶어서. 결혼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저라고 언제까지고 주말에 처음 만나는 여자랑 한 번씩 먹는 파스타에 만족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게다가 하는 대화도 맨날 똑같아요. 재탕삼탕 반복하는 거예요. 제 멘트는 자동 ARS 기계나 다름 없어진 것 같아요. 로봇 같은 대화의 반복에 한심하기도 하고 재미도 없어요. 뭐라고요? 엄마 인생이 더 답답하고 재미없다고요? ……네 알겠어요. 이 얘기는 여기까지만 하시죠. 그래도 우리 아들이 결혼은 꼭 할 거니까! 진심이니까, 이제 기분 푸세요 엄마.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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