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부름은 나만의 시간

마치 짧은 여행처럼

by Rooney Kim

난 심부름을 좋아해.


덕분에 딱히 할 일이 없는 주말에도 밖으로 나갈 수 있으니까. 친구랑 주말에 만나서 놀거나 하는 스타일도 아니고, 그런데 집에만 하루 종일 있자니 따분하고, 그래서 엄마가 심부름이라도 다녀오라고 하면 보통 냉큼 내가 간다고 하고 다녀와. 거의 비율로 따지면 9:1의 비율로 내가 심부름을 많이 해. 그럴 때 형은 주로 삼국지 같은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지.


그런데 심부름을 나가면 너무 좋아. 집에만 있다 잠깐 나와서 산책을 하는 기분도 들고 축축한 밤공기도 좋고 맑은 밤이면 별도 제법 보이거든. 70~80년대에는 별이 더 많이 보였다고 하는데 지금도 많이 보여. 작년 여름 남해의 한 산 꼭대기에서 봤던 은하수는 지금도 잊지 못해. 광활한 우주에서 내뿜는 수 억 개의 별빛이 쏟아지는 밤의 공기는 정말 잊지 못할 거야. 언젠가 꼭 한 번 더 보러 가야지.


난 보통 심부름을 할 때 특정 구간을 달려서 이동해. 축축하지만 시원한 밤공기를 뚫고 사람이 별로 다니지 않는 아파트 단지를 달리면 뭔가 나 혼자만의 공간에 있는 착각이 들거든. 지금보다 어릴 땐 구간을 정해놓고 돌핀 손목시계로 시간을 재면서 뛰어 다녀오기도 했어. 일종의 기록 세우기 같은 거지. 뭐랄까 그렇게 하면 나한테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어. 마치 TV에 나오는 플래시처럼 달리기가 엄청 빨라진 것 같다거나. 그렇게 말이지. 다들 느껴봤을 거야. 밤에 가로등 아래에서 달리면 평소의 나보다 더 빨리 뛰는 것처럼 느껴지잖아?


아무튼 거의 모든 심부름을 내가 했는데 주로 라면, 과자 아니면 과일, 생선, 쌀, 김치, 채소 등등 갑자기 필요한 것들을 주로 사. 아, 달걀이 모자라서 몇 개씩 사러 간 적도 있어. 덕분에 물건 보는 눈도 생기고 물가도 알게 되고 동네 가게 주인아저씨, 아줌마랑 친해졌지.


아주 가끔은 너무 나만 심부름을 하는 것 같아서 형이랑 서로 미룬 저도 있지만 솔직히 나도 내가 가는 게 편해. 엄마가 원하시는 물건의 질, 브랜드 같은 것도 내가 잘 알고 있고, 가령, 좋은 과일 고르는 법이나 더 싼 곳도 내가 더 잘 알거든. 나름 흥정도 하고 말이야. 그런데 내가 아직 학생이다 보니 오랫동안 봐온 동네 과일 가게와 쌀집이지만 종종 안 좋은 과일을 섞어 주거나 내가 사려는 것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한 마디씩 하셔. 나야 뭐 괜찮은데 가끔 그 말을 엄마에게 전해드리면 기분 나빠하실 때가 있더라고. 난 그냥 괜찮았는데. 그런 부분은 어른들의 영역 같아.


예를 들면 이런 거야. 어느 날은 쌀을 한 되만 사러 갔어. 굉장히 오래된 쌀집이고 나도 어릴 때부터 가던 가게라 그 집 할머니랑은 좀 안면도 트고 그랬는데 가끔 할머니가 안 계실 때는 할아버지가 계산을 해주시기도 했어. 그분이 좀 무표정에 인사도 거의 안 받아주시는 분이시라 할머니가 안 계실 땐 나도 그냥 건조하게 인사하고 참기름이나 쌀, 현미 등 필요한 걸 사 왔어. 보통은 아무 말도 안 하시거든 그런데 그날은 한마디를 하시는 거야


"살림을 어떻게 하길래, 한 되만 사가노?" 난 사실 그때만 해도 그게 그렇게 선을 넘은 말인지 몰랐어. 엄마한테 그냥 그 할아버지가 그랬다고 웃자며 얘기했는데, “그 아저씨는 왜 남의 살림에 참견하지?"라고 하셨어. 별로 기분이 안 좋아 보이셨어. 괜히 말했다 싶었지.


가끔은 다른 동네까지 심부름을 하러 갈 때도 있어. 옆 단지 아파트라거나 자주 가는 숯불구이집을 지나 은행 근처까지 가는 경우도 있지. 은행 바로 아래쪽에 김치를 파는 가게가 있거든. 거기 김치가 맛이 기가 막혀. 우리 집은 내가 아주 어릴 때 몇 번을 제외하곤 김장을 안 해서 김치를 사 먹었는데 비로소 제대로 된 집을 찾은 거지. 그 집은 김장김치뿐만 아니라 총각김치, 물김치 등등 다양하게 팔았어. 그래서 대부분의 김치는 거기서 해결했지. 덕분에 반 친구들이 우리 엄마 김치가 엄청 끝내준다며 점심시간마다 내 김치를 먹으려고 몰려드는데 진실은 아무도 모르지.


또 정기적으로 동사무소에 가서 우유갑이랑 휴지를 바꿔왔는데 이게 쏠쏠해. 우유를 다 마신 뒤에 우유갑을 씻어 말린 후 다 뜯어서 가져가면 1킬로그램 당 두루마리 휴지를 하나 줬어. 화장실 휴지 말이야. 보통 토요일에 우유갑을 교환하러 갔는데 제일 많이 받을 땐 한 번에 7개도 넘게 받았어. 물론 몇 개월을 모아서 가져간 거지. 그럼 완전 돈을 번 기분이라 뭔가 뿌듯했어. 그런 날은 엄마랑 거래를 해. "휴지 많이 받을 거니까 올 때 과자 좀 사 오게 2천 원만 주세요." 뭐 이런 식이야.


가끔은 매번 다니는 길로 다니기 싫어서 반대편으로 둘러가거나 또는 새로운 골목길을 찾아서 거길 통해서 가기도 했어. 그럼 그 심부름 길이 마치 짧은 모험처럼 느껴져. 특히 빵을 사러 갈 땐 신호등을 건너가거나 목욕탕 근처로 갔었는데 거긴 꽤 멀거든 아마 버스 정류장으로 따지면 두 정거장 정도의 거리는 될 거야. 그럼 거기까지 갈 수 있는 방법이 최소 3~4가지는 되는 거야. 보통 아파트 단지 앞 슈퍼까지 가는 방법은 한 두 가지인데, 조금 다른 루트를 통해 심부름을 다녀오면 짧은 여행을 다녀온 것처럼 기분이 상쾌해져. 아마 이게 내가 심부름을 좋아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어.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자주 심부름 가는 큰 이유 중 하나를 알려줄까? 오천 원어치 정도의 라면과 과자를 사러가잖아? 그럼 일이백 원하는 초코바를 아무도 모르게 사서 집에 오는 길에 먹을 수 있어! 매번 그러는 건 아닌데 대략 돈이 애매하게 남을 때가 있잖아 그럼 나에겐 좋은 보너스 타임인 거지. 물론 엄마한텐 말해. 그럼 잘했다 하셔. 하지만 형에겐.. 그렇다고 오해하진 마, 사백 원이 남으면 두 개를 사서 형도 주거든.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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