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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ot Scent Oct 13. 2023

당신이 포기한 것들

콤콤한 가을 타는 향이 풍길 때, 한국에서는 한창 꽃게철이라 한솥 사다 끓여먹었다. 된장과 고추장을 풀어서 별다른 조미료 없이도 진한 해산물에 우러나오는 맛이란, 발라도 별로 먹을 것도 없는 꽃게 집게발로 그렇게 쑤셔대며 살을 발랐다. 미국에 오니 가을은 호박의 계절이다. 10년이 다 되가는 미국살이이지만, 모든 음식에 호박을 넣고 살짝 매운 계피를 가미하는 맛은 참 여전히 별로 안 땡긴다. 펌킨 파이, 펌킨 켄디, 펌킨 수프 아 정말 생각만 해도 아찔한게 11월까지 비위가 살짝 쏠린다. 지하철 역 입구에서부터 코를 찌르는 델리만쥬니 동네 어귀 빨간 장갑으로 반죽을 털어내는 붕어빵과 중국 고추가루와 물엿으로 범벅을 친 떡볶이도 이맘 때면 몹시 그립다. 


한국을 떠나 미국을 올 때까지만해도 무언가 포기하고 이 땅을 떠난다는 생각을 못했다. 아마 죽으러 가는 길에 뭔들 남기고 떠났겠냐마는 남아 있는 가족들도, 친구들도, 그간 내가 지내온 장소와 기반들 모두 포기보다는 '버리고'에 가까웠다. 삶을 마감할 때 한 줌의 재가 담을 수 있는 뭔가는 없다. 다만 흩어질 뿐, 포기라는 것도 사실 담을 그릇이 있을 때야 비로소 면이 사는 존재이다. 


한국에서의 삶도 못견디게 팍팍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지만, 미국에 건너와서의 아이와 둘이 밟아간 자취도 말하자면 굳은 떡같이 딱딱했다.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건 생각보다 삶의 질을 걍팍하게 만드는 요소이다. 곁에 마음 둘 가족하나 없다는 건, 내가 사고가 나도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내 아이를 나 대신 맡아줄 누군가가 없다는 건 실제로 그런 상황이 생기지 않아도 이미 마음으로 지고 들어간 게임이다. 그래, 내 마음이야 백번이고 질 수 있다치자. 사람이 생명의 존폐를 가르는 의식주를 책임져야 할 때, 그것도 남의 나라에서 그 시작을 해야 할 때, 제 정신으로 이루는 건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이 때 밤마다 마셔댄 와인병이 수백병, 나는 간을 잃었다. 믿을 사람이 없다고 했던가, 그래도 믿어야만 했었다. 주인이 사는 집에 방한칸을 주는 에어비엔비라면 그 방문을 굳게 잠가도 문을 따고 내 물건을 뒤지지 않을 거라는 믿음, 백인 흑인만 있는 동네에서 덩그러니 유일한 아시아 여자가 딸랑 강아지만한 꼬마애를 손에 끼고 아파트를 얻을 때 그래도 제대로 된 물건을 주겠지 하는 믿음, 피죽도 못 먹게 파리한 저 아이가 영어 하나 못해도 10시간을 유치원에서 버틸 수 있겠지 하는 믿음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그 믿음을 정말 믿어버리는 순간에  누군가 '정말 마음먹은 데로 이루어 지는 거에요!!' 라는 반짝거리는 펀카를 날린다면 한 대 갈겨버려라. 나는 지금부터 엄마로서 포기한 것을 이야기 해볼까 한다. 

아마 내가 대단히 될 수 있는 존재는 아닌 것 같고 끽해야 회사원 그리고 나의 이기와 욕망으로 된 엄마인데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워킹맘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띤다. 


예를 들자면,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하고 먹이고 도시락 싸서 보내고 나도 일하러 가고, 다시 아이 픽업하고 저녁 밥을 하고 먹이고 주말이면 장도 보고,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하고 가끔 여행도 간다. 여기까지는 평범함 워킹맘이다. 그런데 여기서, 야근이 길어지고 스톰이 와서 학교가 일주일간 문을 안 열고(나는 일하러 가야하는데 맡길 곳은 없고), 차가 갑자기 퍼지거나 바퀴에 펑크가 나는가 하면(스페어 타이어 가는 건 기본) 아이가 밤에 미친듯이 열이 올라 다음날까지 폐렴처럼 콜록거리거나 내가 그렇거나, 심각한 교통사고가 나서 운신이 어려운가 하면 세탁기가 고장나서 물이 줄줄새고 천장도 그러하고 현관문 열쇠고리가 고장나 한밤중에도 잠글수가 없다면?


오케이 여기까지 운이 좋아 어떻게 넘어간다 치자. 직장 상사의 태움이나 미친듯한 업무량은 물론 차도 집도오롯이 혼자 매매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들, 두꺼집이 고장나 전기가 나가고, 변기가 역류해서 화장실 바닥에 똥물이 잔잔하거나, 때로는 사기꾼들이 제대로 엿먹이려는 사알짝 돌려서 빠져나가야 하는 상황들 모두 혼자 돌려막아야 하는 여러개의 카드빚 같은 존재들이다. 물론 이렇게 살다가 공과금 내는 거 깜빡하고 전기 수도가 끊기는 건 덤이고 말이다. 


'엄마가 너랑 잘 살아보려고 그랬어.'

놀구있네. 애 귀에 대고 수백번이고 수천번을 말해봐라 씨알이 먹히나. '몸을 수백조각 내서 초를 나눠 사는 엄마를 보며 보고 배우는 게 있겠지' 하는 배부른 생각을 나도 안해본 건 아니다. 그런데 나는 지랄맞은 엄마라 이 모든 걸 해쳐나가는 과정에서 아이가 설자리는 한뼘 뿐이었다. 엄마가 학교 행사에 한번이라도 와서 yearbook에 사진 하나라도 박히는 게 소원이었던 아이는 끊임없이 말했고, 나는 쉴새없이 '다음 기회에'를 날렸다. 이젠 안될거라는 말이 듣기 싫은지 물어보지도 않고 선생님께 '우리 엄마는 바빠요. 안 오실거에요'라는 말을 먼저 해버려, 이젠 가고 싶어도 못 가는 상황에서 나는 드디어 진지해졌다. 


아이를 포기했고 동시에 아이를 의지했다. 

'그 작은 몸뚱이로 어떻게 버텼니' 라는 연민보다는 내 탓을 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 


이렇게 버티고 버티다 잠시 들른 한국. 

아픈 아빠가 있었다. 떠나온 수년전보다 야윌대로 야위어 버린 앙상한 아빠는 뼈대만 남은 가지만 앙상한 키 큰 나무 같았다. 식물인간처럼 오도카니 침대에만 있던 아빠는 말 그대로 걸을 수 있는 기적을 보여주었지만 여전히 휘청거리는 갈대같아 넘어지면 혼자 일어날 수가 없었다. 아빠랑 순간이 애틋했던 그런 딸래미는 아니었다. 하지만 둘 중에 하나가 쓰러질 것 같이 힘들면 서로 버티게 하는 남 모를 속 사정이 있었다. 아빠의 사고 당일 날 그리고 병원 이송 중의 응급차에서 아빠의 굳게 닫은 입과 눈매를 혼자 가만히 지켜보던 나도 있었고, 내가 미국에서 죽은 듯이 살던 날 매일같이 카톡으로 기도를 전해주던 아빠가 있었다. 누구보다 서로에게 신랄하지만 한편으로는 닮아있는 서로에게 연민을 느끼는 중이었다. 가끔 생각해 본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 느닷없이 죽는다면? 이건 죽음의 문제보다는 삶의 문제에 가깝다. 


미국에 살고 있다면 그 임종을 지켜보지 못할 확률이 매우 큰데, 꼬박 15시간을 걸려 한국을 간다고 해도 3일장이나 겨우 치를 게 분명했다. 대단히 화목하지는 않았어도 아빠를 의지하는 엄마도 점점 죽어가겠지. 그 옆에 나는 없을 수도 있다. 나는 항상 없을 '무'이다. 카톡 페이스 타임엔 존재하는 딸은 그마저도 자기 살기가 바쁘다고 띄엄띄엄 하는 연락에 나도 가족들도 관계의 무덤덤함이 깔려버릴 것이다. 


아프면 소리를 질러야 하고 찌르면 피가 나야 한다. 


상황이 포기를 만들어내면, 당신도 '시발 어쩌라고!'를 내지르며 내딛어야 한다. 억지로 힘을 내라는 소리가 아니다. 그저 포기가 그대를 잠식하게 두지 말라는 뜻이다. 


나는 요즘 그렇게 아들 뒤를 쫓아다닌다. 남들은 이제 중이병 시작이니 왠만하면 그냥 두는게 내가 다치지 않을 거라고 하는데,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사랑한다'는 말을 염불 외듯이 한다. 학교 내려주면서 하고, 데리러 가면서 하고 ,만나서 하고, 숙제할 때 하고 자기 전에 한다.


녀석이 내지르는  '아 진짜. 엄마 쫌'에 귀가 아프다.

그러다보면  열에 한번은 가끔 녀석도 못이기는 척 안아주는 품을 걷어내지 않고 안겨 있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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