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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나와 아이는 어딘가 쯤에 합의점을 가지고 있을까? 내가 엄마여 서라기보다는 배가 아파 낳은 생명이 언젠가는 떨어져 나간 개체로 살아남기 시작할 테고, 육아의 최종본은 독립이라는 말에 의견이 없기 때문이다. '사이좋게'라는 말은 어감만 좋을 뿐이지 별로 시답지 않은 말이다. '사이'는 벌어진 틈이고 누군가는 굳이 그걸 좋게 만들자니, 뭔가 이유가 필요했던 모양이지?
나의 아이는 그다지 친한 편이 아니었다.
꼬마가 3살 남짓할 때였나. 으엄청 썅년까지는 아니어도 속을 알 수 없는 내 배에서 나온 아이가 누구를 닮겠는가 싶을 때가 있었다. 아이의 결핍을 먼저 파악하기에는 내 마음 가는 곳도 모르던 애매하게 나이만 먹은 애미라 아이에게 참 너그럽지 못한 부분이 많았다. 카시트에 태워 둘이 운전하던 차에서도 뭔가 안 맞아서 서로에게 삔또가 돌면 '야 너 그렇게 할 거면 차에서 나가'라는 말을 지르곤 했다. 한참 날을 세우던 아들도 갑자기 안전벨트를 매고 엄마가 더 폭주할까 입을 다물던 때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차에서 버리고 나갈만한 엄마라 그렀을는지도 모른다.
낳을 때부터 아이를 사랑한 건 아니었다.
자연분만이었지만 너덜너덜하게 터져버린 회음부 회복은 남들보다 몇 배나 느려터졌고, 밤낮이 바뀌어 버린 아이는 밤만 되면 입에 피만 안 묻힌 뱀파이어처럼 그렇게 놀자고 눈망울을 희번덕거렸다. 젖량은 남보다 턱없이 부족해 젖소마냥 비틀어도 말라버린 가슴에서 나온 양이 풍족했을 리 없다. 남들이 쓰는 '사랑'이라는 그 어여쁜 말은 그 흔한 상황에서도 나는 쓰기가 그렇게 어려웠다. 그저 한 마리의 동물이었다.
그런 내가 아이만 덜렁 데리고 미국에 내디뎠다. 앞에 아주 기가 차는 사연이 있었겠지만 희한하게 그 어린 존재는 나에게 소속감도 줬다가 가끔 무섭지 않게 하는 그 안정감 어딘가쯤에 데려다주곤 했다. 웃긴 말이지만 나는 밤에 혼자 있는 걸 무서워한다. 내가 저 애를 지켜야 한다는 소명감에서가 아니라 일단 같이 있으면 낮에 들은 귀신 이야기나 끔찍한 장면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 없는 애미였달까.
아마 살아도 같이 살아야 하고 죽어도 같이 죽는 게 낫겠다 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별로 고민 없이 고사리 같은 손을 잡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것 같다. 도착한 다음에도 정말 지긋지긋하게 끝이 안 보이던 때가 있었다. 일단 생계유지를 위해 돈은 벌어야겠고, 아이는 남의 손이던 기관이던 맡겨져야 할 터였다. 고민도 사치라 한국말도 영어도 어눌하던 때에 버려지듯 유치원에 가게 된 아이는 참으로 예측 불가능 덩어리였다.
그리고 그 아이가 아프면 더더욱 그 예측 불가능의 범위는 넓어져 부모의 삶은 축소되기 마련이다.
처음 대학원을 졸업하고 내가 취업했던 곳을 말했던가.
생산 관리자로 취업한 나는 처음 그곳에서 일할 때 보험혜택을 전혀 받지 못했다.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천조국 미국은 아프면, 접시에 코 박고 죽어야 하는 대단히 변변치 못한 병원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돈을 싸들고 가도 당장 아프다고 기침을 피가 토하도록 해도 며칠 전 예약 없이는 치료받기 어렵다며 손사래를 치는 곳이 이곳이다. 보험은 또 얼마나 비싼지 대충 들어도 한국에서 받는 의료 서비스의 한 60% 도 안 되는 퀄리티로 일 년에 몇천만 원 호가하는 금액이기에 개인이 커버하기에는 등골이 부서질 판이다. 그래서 대다수 개인 사업자가 아닌 이상에는 보험 때문에라도 반드시 회사에 취업하는데, 나라는 놈은 직장에서도 보험이 없었다.
아이 키우는 집에서 의료보험 없는 삶을 상상이나 해 보았는가?
꼬마가 아프지 않으면 다행이지만 진짜 어디 하나라도 안 좋아서 병원에 가야 할 상황이 생기면 정말 더럽게 서럽다. 아마 그날이 그런 날이었던 것 같다. 뭔가 하나에 몰두하면 전화벨 소리가 귀에서 튕겨나가던 나였는데 그날은 유독 회사에 사건 사고가 많았다. 정신 차리고 시계를 보니 부재중 전화가 수도 없이 걸려 와 있었고 다시 거니 유치원이었다. 세 시간 전부터 아이가 아파서 기력이 없으니 어서 데려가라는 말이었는데, 사실 아프기는 그 전날부터 열이 펄펄 끓어오르기는 했었으니 '어머 진짜요? '하며 놀라는 척하기가 더 힘들었다. 어딘가 주워 들어 냉장고에서 넣다 뺀 차가운 감자를 자는 아이 발바닥에 붙이고 자면 열이 빠진다는 작업자 말에 그대로도 해봤지만 영 신통치 않았던 모양이다. 그렇게 도착한 유치원에서 아이는 여전히 픽업 꼴찌였고, 선생님은 이젠 저 엄마는 포기각이라는 삐뚤어진 눈썹을 통해 읽어낼 수 있었다.
아이를 급하게 차에 태우고 집에 들어가니 현관문에서 아이가 픽하고 쓰러졌다.
절절 끓는 몸에 손을 대고 있자니 나는 감정을 한꺼번에 쓰다 모두 소모해 버린 속 빈 강정처럼 느껴졌다. 죽부인처럼 바람은 여기저기서 들고나가는데 껍데기만 길쭉하게 얼기설기 엮여 '가슴이 아파서 울고 싶은' 감정이 잘 안 생겼다. 그 자그마한 몸에서 옷을 벗기고 수건으로 닦아내는데 아이가 갑자기 와락 토를 쏟아냈다. 나는 그때 왜 그랬을까. 그냥 화가 났다. 울그락 불그락하던 내 얼굴을 보며 아이는 눈치를 보다
'엄마... 토해서 미안해요'라는 말을 뱉었다.
나는 그 말이 왜 그렇게 싫었을까. 미안하다는 말을 뱉자마자 온몸에 마지막 기운까지 써버린 사람처럼 그 자리에 쪼그려 누워 자기 시작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눈물이 끅끅끅하고 나왔다. 하루종일 물 한 모금도 넘기지 못하고 니글거리는 속에 열까지 끓어오르는 몸을 서너 살밖에 안 먹은 아이가 어떻게 그 몸뚱이를 책임지고 있었을까? 쓰러져도 엄마 얼굴 보고 쓰러지자는 각오였던지 아이의 인생에 연민이 사무치게 느껴졌다.
가끔 아이에게 하는 말이 있다.
'아니, 내가 니 감정까지 어떻게 해 줄 수는 없잖아? 니가 행복하기 싫은데 내가 백번 노력해봤자 너는 어차피 엄마말 안 들을 것이고, 그냥 그저 그런 날에도 니 마음 먹기에 따라 되게 기분 좋을 거잖아.그러니까 니 기분 니가 결정해.'
아이는 그때부터 그 나이답지 않게 스스로의 감정이나 상황에 대해 억지웃음을 지으면서까지 살아내려고 하는 의지가 강했다. 아주 어릴 때, 그러니까 말도 안 통하던 그때에도 내가 혼내면 ' 아. 행보카다'라는 말을 하곤 했다. 그 말을 들으면 나는 아주 소름이 쫙하고 돋았는데 나중에 왜 그런 말을 했냐 물어보니, 그렇게라도 해야 자기 인생이 덜 불행해진다는 걸 알았다고 했다. 그리고 곧잘 '천국에 빨리 가고 싶다'는 말도 했었다.
그 찰나에 아스라 져버릴 어린이 시절을 아이는 그렇게 강탈당해 버렸다.
여하튼 다시 돌아와, 병원도 마음 놓고 가지 못하는 그 상황에서 우리는 개같이 고생하며 서로에게 최적화되기로 결심을 했었던 것 같다. 그로부터 한참의 세월이 흐른 지금이야 아이가 중학생을 목전에 두고 있지만 우리는 아직도 그때 이야기를 종종 한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는 아이는 곧바로 말을 고쳐 어른이 되는 게 무섭다고 하는 걸 보며 아직은 애가 맞는 것 같은데. 가끔은 나도 코끝이 시리다.
이해의 폭은 사실, 닿아있는 면적이 넓어질수록 깊어질 수밖에 없다.
아이는 이렇듯 거친 듯 아픈 경험을 매일같이 나와 함께했고, 우리의 전우애는 생각보다 오래갈 것 같다.
어른도 사실, 사포 같은 인생에 마모되가며 모난 부분이 털어져 나가는 게 다반사니 부디 세 바퀴나 어린 녀석에게 혹시라도 잘난 척 말아야겠다, 다짐해 본다.
각자에게 그게 부모든 부부든 친구든, 최적화되어 있는 그대들에게 오늘은 넌지시 건넨다.
서로들 살펴 사시느라, 고고... 생하셨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