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참으로 견고하게 나댄다.
아무리 겸손을 떨어도 자기가 자신있어 하는 부분은 거품을 물고 남이 말하는 것을 판단하고 있으니, 제 아무리 점잖은 척해도 사실 내가 아는 걸 모르는 척 하기란 참 어렵다.
엄마라는 존재는 첫 아이면 자기도 처음인데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최면을 걸지 않고서는 한치 앞도 헤쳐나갈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다. 아 이 얼마나 고달픈 삶인지 회음부 째고 까꿍하는 아이를 보는 순간 전지전능한 신이 빙의한 채로 마법처럼 아이를 가슴에 새긴다.
아이가 매일같이 배부르게 먹는 뇌전증 약의 부작용 중 하나는 mood change이다. 일종의 우울증의 일환인데 이 때 느끼는 기분이 아스팔트에 본인의 감정을 질질 끌고 다니며 난도질 하는 느낌이라고 했다. 이렇게까지 자신의 기분을 잘 표현해 주니, 누군가 하나 죽어 나갈까 싶어 애미도 모르는 아이의 마음을 고양이를 통해 위로해 보려고 했다. 평소에 강아지 보다는 고양이를 좋아하는 아이였기에, 부지런히 입양처를 돌아다니며 아이의 마음을 살폈다. 그런데 왠걸. 아이에게는 고양이 알러지가 있었고 우리의 입양계획은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나만 없어 고양이'를 외치며 찡찡거리는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엄마 나보고 부르르 나폴레옹이랑 고양이 알러지 중에 하나만 내 몸에서 없애준다고 하면 나는 고양이 알러지를 선택할거야!"
그랬다.
아이는 몸 안에 도사리는 뇌전증 쯤은 뭐. 까짖거 같이 좀 살아봐도 되는 것이고, 고양이는...고양이는 포기가 안되는 존재였다.
어쩌면 아이의 발언이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 못해 나온 헛소리일지언정, '인생은 저렇게!'라는 마음의 울림은 생각보다 오래갔다. 그 마음이 회피 어딘가에 있을지라도 내 앞에 펼쳐진 어그러진 풍경 하나를, 그저 옆에 푸른 나무가 울거진 곳으로 눈길을 돌리기만 하면 어찌되었든 낭낭하게 살아지는 것이었다.
오. 대단한데. 나는 아이를 여전히 다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 갑자기 얻은 깨달음으로 손바닥을 치며 좋아하는 나를 보고 아이는 한참을 무서워했다고 한다.
우리는 어쩌면 필연적으로 걱정을 먹고사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매달 나오는 카드값 청구서가 일하는 가장 강력한 동력이 되는 것 처럼, 너무도 평안한 날이 지속되면 폭풍의 전야를 지나오는 불안함을 뼛속까지 느끼는 얄팍한 존재. 행복해라 행복해라 행복만 하라고 되뇌여도 결국 도돌이표처럼 되돌아 오는 미련함은 본능일지도 모른다.
상황이 참 재미있게 돌아갔다. 아이의 우울증이 오기도 전에, 내 마음의 심한 독감이 시작되었다.
무서워했더니 이게 사람 봐가면서 나에게 온 모양이었다. 3명의 다른 의사에게 가봐도 똑같은 진단이었다. 약물치료와 심리치료를 병행해야 한다니, 한번도 지나보지 않은 정신과 신세를 내가 지게 되었다. 난 그냥 똑같은 것 같은데, 병원을 괜히 갔나 싶을 정도로 상태가 괜찮았단 말이다.
물론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마음은 이미 몇번이고 아이의 말대로 아스팔트 위에 갈갈이 찢겨진 상태로 봉합은 커녕 피를 흘린채 달리고 있었던 것 조차 몰랐던 나였다. 매번 시뻘게진 눈으로 진료실을 나오는 나는 아이와 같은 환자였다.
가끔은 패대기를 치는 감정이 아이라는 하수구로 빠져나갈 때가 있는데, 다시 한번 내가 무너지는 순간이다.
그렇게까지 호되게 야단을 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 내 감정이 고스란히 녹아져 표독스러운 말이 아이에게 꽂힐 떄마다 아이가 나에게 웃으면서 하는 소리가 있다.
" 아 행복하다"
정말 섬뜩하지 않은가.
여러날이 걸쳐 물어보니 결국 대답해 준 아이의 말이 걸작이었다.
" 엄마, 나 행복하지 않았지 당연히. 엄마라면 행복했겠어?
저렇게 말하고 나면 엄마를 놀리는 것 같더라? 그냥 엄마를 내버려 두는거야. 화난 엄마를.
나는 그냥 다른 세계에 가 있는거야 난. "
오.
얘는 도대체 뭐지.
나는 이런 애를 낳은 적이 없는데.
살벌하게 애미 싸대기를 날리는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매번 나만 말리는 느낌이다.
아이를 키운다는 게 말이다. 잘 키워야지 하는 욕심부터가 잘못된 설정이었다.
같이 숨 붙어 사는 찰라이지만, 아이가 내 자식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야했다.
같은 의미로 나 역시도 내 인생이 내 것이라는 망각에서 살짝 비껴 있어야 더 행복할 뻔 했다.
내 배로 낳았는데 전혀 다른 세상에서 한 걸음 뒤에서 나를 바라보는 아이는 아직 크다 만 엄마의 등을 또 그렇게 따숩게 도닥여 준다.
눈물나네,증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