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루쉰, 프리모 레비
1. 스타 사진작가 조세현 씨의 노숙자 사진 교실
스타 사진작가로 유명한 조세현 씨가 서울시와 협력하여 노숙자 사진 교실을 한다. 조세현 씨는 2010년 영국 왕실에서 주최한 사진전에 참가하여서 한 유명 사진작가를 만났다. 놀랍게도 그는 노숙인 출신 사진작가였다. 한국으로 돌아온 조세현 씨는 서울시에 노숙인 사진 교육을 제안하였고, 니콘은 임대 사진기를 제공하여 2012년 노숙자 사진 교실이 열렸다. 처음에는 서울시 직원들이나 노숙자들 모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지금까지 노숙인 관련 교육 프로그램을 하여 성공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첫 수업 시간에 노숙인들은 씻지도 않고 냄새를 풀풀 풍기며 찾아왔다. 자포자기한 노숙인들은 아무런 기대감도 없었다. 조세현 씨는 촬영기술보다 세상을 보는 눈이 중요함을 강의하였다. 강의가 진행되면서 노숙인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세 번째 강의 시간 쯤 되었을 때 노숙인들은 말끔하게 씻고, 면도도 하고, 자기들이 구할 수 있는 최고로 깨끗한 옷을 입고 나타났다. 그동안 삶을 포기하고, 인간이기를 포기하였기에 부끄러운 줄 몰랐다. 아무 데서나 누워 자고, 아무 데서나 소변 보고, 아무렇게나 행동하였다. 그런 노숙인들이 사진을 통하여 세상을 보기 시작하고, 자신을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부끄러움을 알게 되었다.
수치심은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 성경은 최초의 인간 아담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대신에 자신을 바라보면서 부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자신을 발견하였다. 자신이 벌거벗었음을 발견하였다. (창3:7) 세상천지에 도와줄 이 아무도 없는 데 홀딱 벗고 서 있는 홀로 된 모습을 발견하였다. 이제 그는 자신의 힘으로 모든 세상의 무게를 감당해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인간은 모두 수치심을 가지고 있다. 남들은 보지 못하지만 자신은 자기의 결점을 정확하게 본다. 자신의 부족, 자신의 결점, 자신의 못난 점, 자신의 죄. 자신의 약점과 허물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사람은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다. 이제 행, 불행은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의 판단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자신이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 이것이 문제다.
심리학자를 포함한 세상의 학자들은 사람에게 충고한다. 자긍심을 가져라!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죄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은 단지 사회 구조적인 희생자일 뿐이다. 그러므로 죄책감을 느끼지 마라! 그런데 이러한 충고에도 불구하고 행복은 찾아오지 않는다. 무지개는 잡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 멀리 도망 가버린다.
2. 허무의 바다로 과감히 뛰어든 니체
니체는 "신은 죽었다. 우리가 신을 죽였다.” 선언하였다. 그는 첫 사람 아담처럼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기로 작정하였다. 인생이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지 모르지만, 그는 자기 인생은 스스로 개척해 나가기로 했다. 아니 니체는 인생이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지 몰랐던 것이 아니다. 그는 인생이 허무함을 누구보다 확실히 알았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니체는 염세적 허무주의로 자신을 몰아가고 싶지 않았다. 하나님은 죽었다고 담대히 외친 용기로 그는 허무주의를 향해서도 과감히 저항하며 나아간다. 니체의 허무주의는 저항적 허무주의다. 어디서도 삶의 가치와 의미를 찾을 수 없다면 스스로 삶의 가치를 만들어서라도 앞으로 나아가리라. 수치심을 느낄 이유는 하나도 없다. 그는 인간의 허무한 실상을 보았지만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비록 그 끝이 허무의 깊은 심연이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나아가리라. 그게 바로 참된 인간 곧 초인이다.
3. 허무의 바다에 주저 앉아버린 루쉰
‘아큐정전’과 ‘광인일기’를 쓴 중국의 문학가 루쉰은 니체와 조금 달랐다. 1881년 중국 저장성 사오싱에서 루쉰은 유복한 지주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과거시험을 감독하다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투옥되자 집안은 몰락하였다. 가세는 급속도로 기울어 당장 먹고살 것이 문제였다. 화병이 난 아버지는 술로 지내다가 서른일곱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루쉰의 나이 열여섯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듬해, 이해관계를 정리하려고 모여든 친족들은 어린 루쉰 앞에서 추잡한 싸움을 하였다. 한때 부유했던 집안의 장남 루쉰은 졸지에 동네 사람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누구든 안락한 환경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그 반대의 생활로 곤두박질치면, 그 과정에서 세상 사람들의 참모습을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
그는 '철방의 비유'에서 인생을 설명하였다. 창문도 없고 절대로 부술 수도 없는 쇠로 된 방안에 많은 사람이 깊이 잠들어 있다. 오래지 않아 모두 숨이 막혀 죽을 것이다. 그때 당신이 의식을 차리고 일어난다면 어찌할 것인가? 쇠로 된 방을 부술 희망이 전혀 없는데 다른 사람을 깨워서 함께 고통을 느끼며 죽어야 하는가? 아니면 아무런 고통 없이 그저 죽도록 내버려 두어야 하는가? 니체처럼 루쉰도 허무의 종말을 보았다. 니체는 그 허무 앞에 쇠문을 두드리며 온몸으로 저항하였다면, 루쉰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방에서 조용히 고통스러운 상황을 견디는 자다. 그는 허무의 심연을 끌어안으며 글을 썼다. 그의 글은 그래서 어둡다.
4. 허무의 바다에서 삶을 포기해버린 프리모 레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프리모 레비는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책을 썼다.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인간의 참모습을 보았다. 그것은 너무나 추악하였다. 저항의 의지조차 다 파괴되고 인간 이하 대접을 받으면서도 하루하루 연명하며 살 수 밖에 없었던 유대인. 그들의 인간성을 말살시키려고 인간이기를 거부하였던 독일인. 그는 기적적으로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아 바깥세상으로 나왔다. 절망적인 것은 자유롭다고 생각한 바깥세상 역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만난 사람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자기 책에서 “인간인 것에 죄가 있다고 느낀다.”고 썼다. ** 그는 인간으로 느끼는 수치감(부끄러움) 때문에 더는 살고 싶지 않았다. 프리모 레비는 토리노 자기 아파트 계단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유서가 없었기에 혹자는 사고사라고도 하고, 혹자는 그가 인간에 대한 아무런 희망을 느끼지 못하여 자살하였다고도 한다.
5. 허무의 바다에서 극적으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 없이 홀로서기를 수시로 시도하였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특별히 선택하시고 '너희는 내 백성이라.’ 하였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 따르기를 거부하였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노래처럼 이스라엘은 언제나 하나님의 길이 아닌 자기 길을 걸어가고 싶어 했다. 사사 시대 사람은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 이사야 시대 사람은 각기 제 길로 간 양들처럼 제멋대로 살았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망하였고 큰 수치를 당하였다.
수치감을 잃어버리면 인간이기를 포기한다. 아무 데서나 먹고 아무 데서나 싸고 아무 데서나 잔다. 분명히 앞에 허무의 심연이 있는데 고집을 부리며 앞을 향하여 무작정 나아간다. 그러면서 자신은 초인이라고 허풍을 떤다.
수치감을 느끼는 사람은 자기 가치가 상실되었음을 깨닫고 깊은 슬픔과 비애를 느낀다.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에서 허랑방탕하였던 탕자가 그러했다. 돼지 울간에서 돼지가 먹는 주염 열매를 돼지와 함께 먹으면서 자신을 보았다. 자신을 돌아보니 벌거벗은 것을 깨달았다. 어쩌다 자기가 이렇게 추하고 더럽고 냄새나는 존재가 되었는지 돌아보며 깊은 슬픔을 느꼈다. 그는 내 아버지 집에는 얼마나 풍족한지 품꾼들조차도 배불리 먹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 결정은 참으로 부끄러운 결정이다. 아버지의 얼굴을 도저히 볼 수 없지만, 그런데도 탕자는 아버지를 찾아간다.
이스라엘은 깨지고 깨진 다음 하나님 앞에 자신의 허물과 부족함을 솔직히 고백하고 도움을 요청한다. 삶의 길이 하나님밖에 없음을, 행복의 길이 하나님밖에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비록 비렁뱅이같이 초라하고 부끄럽고 못났지만 아버지를 찾아 돌아가는 것만이 살길이다.
6. 구원의 길
영국 옥스퍼드 알리스터 맥그래스 교수는 고대 영어의 구원이라는 단어는 현대 영어의 치유(heal)와 건강(health)과 비슷한 ‘hoel’이었으나 그 시기에 라틴어 형태인 ‘salvation’으로 개념이 바뀌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구원의 개념에는 치유와 회복이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다. 첫 사람 아담이 잃어버렸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될 때 인간은 비로소 수치심을 떨쳐버리고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이 어떤 선한 행위를 하거나 커다란 공적을 쌓아서가 아니라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은혜로 된 것이다. 그리스도가 모든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구원의 혜택과 복만 받으면 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서 일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서 일하셨다. 수치심과 죄로 더럽혀진 우리 안에서 우리가 당해야 할 모든 고통과 치욕을 주님이 다 당하시며 구원을 이루셨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바로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다. 비록 주님이 그 모든 수치를 다 당했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각자의 수치를 바로 깨닫고 그것을 털어버리기 위한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한다. 수치심은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는 양심의 명령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9-30)
주(註)
* 여행의 사고 셋 / 윤여일 지음 / 돌베개 / 2012년 / 186쪽에서 재인용
**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 서경식 지음 / 박광현 옮김 / 창비 / 2009년 / 179쪽에서 재인용
*** 자존감 / 알리스터 맥그래스, 조애나 맥그래스 지음 / 윤종석 옮김 / IVP / 2013년 / 119쪽
2. 니체, 톨스토이, 어거스틴 - 어둠을 대하는 세가지 자세
3. 니체, 히틀러, 본회퍼
4. 니체 죽음을 말하다
5. 니체 그는 누구인가?
6. 니체와 여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