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욕심 없이 남을 위해 헌신적으로 살아온 동화작가 권정생 씨가 계십니다. 1937년 일제시대 때 도쿄의 빈민가에서 태어나 광복 직후 귀국하였지만, 가난 때문에 가족과 떨어 지내면서 온갖 고생을 다 합니다. 19살 때부터 앓기 시작한 결핵과 늑막염은 그의 평생을 따라다니며 괴롭힌 질병입니다. 30살이 되던 1967년, 병들고 오갈 데 없을 때 교회의 종지기로 받아주고 문간방이나마 허락하여 준 것이 바로 경북 안동군 일직면 조탑동에 있는 일직 교회였습니다. 그는 17년 동안 일직교회의 종지기로 수고했습니다.어렸을 때부터 불리던 경수라는 이름을 따라서 권경수 집사로 불렸습니다.
그는 가난하고 병들어 힘없는 자신의 몸을 이끌고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그가 쓴 결핵 1이라는 작품에서 쓰기를
“길 가다가도 퍼질러 앉으면
앉은 채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엉덩이
차라리 그대로 쑥쑥 빠져 들어가
천 길 만길 지옥 속에라도 빠져들고 싶어라”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통스러운 몸으로 그는 ‘몽실언니’ ‘강아지 똥’ ‘한티재 하늘’ ‘우리들의 하느님’ 수많은 작품을 남깁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나의 동화는 슬프다. 그러나 절대 절망적인 것은 없다.’ ‘폭풍이 치고 억수 비가 쏟아져도 날씨가 개면 만물은 다시 햇빛을 받아 고개를 들고 잎을 피우고 꽃봉오리를 맺듯이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살아 있는 것은 그렇게 또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한티재 하늘에서>
그는 유명 작가가 되었지만, 조금도 이기적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사후 일을 일임받은 3인 중 한 명인 박연철 변호사는 말하기를 “80년대 선생님을 처음 뵈었는데 한 달에 2만 원이면 생활이 충분하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쌀을 사야 하지 않느냐고 여쭈었더니 쌀은 찾아오는 사람들이 한 봉지씩 가져오니까 충분하다” 고 하셨답니다. 선생은 1984년 교회 뒤 빌뱅이 언덕에 조그만 흙집으로 이사하여 남은 생애 작품을 쓰시다 가셨습니다. 서정오 선생은 “다섯 평짜리 집은 방 두 칸으로 나뉘었는데 책이 많았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 처음 만나는 방은 겨우 세 사람이 앉을 정도였지요. 이 방에서 권 선생님은 손님을 맞이하고, 식사하시고, 앉은뱅이 책상에서 글을 쓰셨습니다. 안쪽 방 역시 책이 많았는데, 겨우 한 사람이 누울 공간이 있었지요. 선생은 그 방에서 주무셨습니다.”라고 전하였습니다.
권정생 선생은 진정 무소유의 삶을 사셨습니다. 인세가 들어오는 통장에는 입금은 있어도 출금은 거의 없었다고 박연철 변호사는 말합니다. 그는 이렇게 유언을 남겼습니다.
“재산은 모두 굶주리는 북한 어린이들과 중동, 아프리카, 티벳의 어린이들에게 전달해 주십시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이제 그만 합시다. 그곳에 있는 아이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기도 많이 해주세요. 안녕히 계세요.”
시골교회 문간방에 사실 때 아이들이 “집사님 밤에 혼자서 무섭지 않나요?” 물었습니다.
“무섭지 않다. 혼자가 아니고 내가 가운데 누우면 오른쪽에 하나님이 눕고 왼쪽엔 예수님이 누워서 꼭 붙어 잔단다”
선생님은 2007년 5월 17일 70년 평생을 마감하셨습니다.
선생은 추운 겨울에도 맨손으로 종을 치셨다고 합니다. 교인들이 장갑을 사다 드려도 장갑을 끼지 않았답니다. 장갑을 끼고 종을 치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종소리가 갈 것 같지 않다는 이유에서입니다. 평생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당한 자, 약한 자들을 생각하시고 작품을 쓰셨던 권정생 선생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비록 가난과 질병으로 모진 고생을 하셨지만, 마음은 그의 동화처럼 언제나 환한 빛을 잃지 않으신 분입니다. 유명하고, 돈 많고 권세 있는 것을 최고로 치는 이 세상에 권 선생님이 우리 곁에서 사셨다는 것만으로도 큰 도전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