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안에는 양반과 천민의 구별이 없습니다."
승동교회를 설립한 사무엘 무어(Samuel F. Moore) 선교사의 말이다. 당시 백정들이 많이 다니는 승동교회에 양반들이 들어오면서 자신들의 자리를 따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사무엘 무어 선교사는 예수 안에는 차별이 있을 수 없다고 하자 양반들이 따로 교회를 세웠는데 홍문삿골교회다. 연동교회에서는 장로선거에서 갖바치 출신인 고찬익이 당선되자 양반들이 소리를 지르고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따로 교회를 세웠는데 묘동 교회다. 이렇듯 초대 한국 교회에 신분의 차이로 인한 갈등들이 표출되고 있을 때 전라도 김제에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전라도 지역에 선교하던 최의덕 선교사(L.B.Tate)는 김제지역의 거부 조덕삼을 만나 전도한다. 조덕삼은 자기 집에서 머슴살이하던 이자익을 전도하여 함께 신앙생활을 한다. 두 사람은 1905년 함께 세례를 받고 곧 이어 함께 집사가 되고 영수가 되었다. 1907년 장로 선거가 있었다.
조덕삼은 김제의 최고 갑부였고, 교회를 지을 땅을 헌물하였고, 교회 재정의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동네 많은 사람이 조덕삼의 소작농이었다. 나이도 조덕삼이 15살 많았다. 그뿐만 아니라 이자익은 경상도 마산 출신으로 외지인이었다. 조덕삼(1867~1919)은 41살이었고, 그의 집 머슴인 이자익(1882~1961)은 26살이었다. 17살 때부터 조덕삼의 집에서 머슴살이하던 이자익은 조덕삼의 선처로 결혼도 하고 함께 신앙생활도 하였다. 공교롭게도 둘은 장로 후보에 나서게 되었다.
모든 사람은 조덕삼이 장로가 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투표결과는 의외였다. 이자익이 장로가 된 것이다. 말이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신분을 뛰어넘고, 지역 차별을 뛰어넘는 일이었다. 모두 당황하여 술렁거리기 시작할 때 조덕삼 영수는 일어나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금산교회는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여 이자익 장로를 잘 받들고 더욱 교회를 잘 섬기겠습니다."
그건 그냥 인사치레의 말이 아니었다. 조덕삼은 죽을 때까지 이자익 장로를 지지하고 후원해주었다. 1909년 장로가 된 조덕삼은 이자익이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할 때(1910~1915)도 모든 학자금과 생활비 일체를 다 지원하였다. 조덕삼 장로는 이자익 목사를 금산교회 담임목사로 청빙하여 잘 받들어 섬겼다. 조덕삼 장로의 가정은 지금 삼대째 금산교회를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