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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향록 Oct 17. 2024

피의 수요일


#1

1998년 어느 날 저녁, 문수는 ‘슈퍼 그랑죠’를 보기 위해 TV를 켰다. 그런데 만화를 방송할 시간에 뉴스가 진행 중이었다. 화면에는 각종 금덩어리가 등장했다. 문수는 거북이, 두꺼비, 송아지 등 금으로 이루어진 물건이 이토록 많을 줄은 몰랐다. 채널을 돌렸다.


‘실업자가 165만 1천 명을 기록했습니다’

‘속보입니다. I 기업의 XXX 대표가 자택에서 숨진 채…’

‘두 아이를 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박 모 씨는…’


그때, 엄마 윤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밥 먹게 TV 꺼라!

그날, 식탁 위에는 낯선 음식이 놓여 있었다. 동그란 모양 안에 구멍이 숭숭 뚫린, 왠지 모르지만 아주 기분 나쁘게 생긴 그것 (환 공포증을 연상시킨다)을 문수는 먹지 않으려 했고, 한 공기를 채 비우기 전에 윤정은 알아챘다.

-너 왜 연근 안 먹니?

-징그럽게 생겨서 못 먹겠어.

문수는 그 기분 나쁘게 생긴 것의 이름이 ‘연근’이라는 것을 그날 처음 알았다. 윤정은 어김없이 “쓰읍” 하며 무서운 표정으로 문수를 바라보았다. 

-나 진짜 못 먹겠는데..

-얘 봐, 아주!? 동생은 이렇게 잘 먹는데 오빠란 놈이 되어서 아주 잘한다!

음식을 먹는 것에 두려움이 전혀 없던 동생 민희는 얄미운 표정으로 문수를 바라보며 연근을 연신 집어삼켰다. 보통의 경우라면 민희에게 비교당하는 게 싫어서 윤정의 말을 곧 잘 들었을 문수였을 테지만, 징그러운 연근만큼은 도저히 못 먹겠기에,

-나 진짜 못 먹겠어! 엄마. 민희는 잘 먹으니까, 다 먹으라 하면 안 돼?

윤정은 굳은 표정으로,

-너 안 되겠다. 이 시국에 또 반찬 투정이라니. 구둣주걱 가져와!

구둣주걱. 구둣주걱의 용도를 아직 알지 못하는 문수에게, 이 물건은 그저 회초리였다. (옆집 승규네 집은 파리채였다)

문수는 평소에 싫어하던 시금치, 콩나물, 오이지 등은 잘 먹고 있었는데, 고작 ‘연근’을 먹지 못해서 맞아야 한다니, 너무 억울해 눈물이 났다. 윤정은 문수를 구둣주걱으로 가리키며,

-뭘 잘했다고 울어!? 울면 누가 봐줄 줄 알아? 너, 당장 이거 안 먹을 거면 손바닥 내밀어!

문수는 연근을 반쯤 씹어 보았다. 끔찍했다. 엄마의 호통 속에서 먹는 혐오스러운 연근의 맛이 좋을 리 없었다. 세 개를 먹고 헛구역질했다. 문수는 앞으로, 음식으로 인한 고통이 ‘지옥의 연근 사건’ 이외에 없을 줄 알았다.


#2

매주 수요일이 되면, 문수와 반 친구들은 4교시만 끝나기를 기다렸다. 돈가스, 스파게티, LA갈비 등이 나오는 ‘특식’의 날이었기 때문이다. 문수에게 주 6일의 등교는 너무 가혹했기에, 수요일의 기분 좋은 특식은 사막 같은 평일의 오아시스였다. 

기다리던 수요일이 돌아왔다. 미트볼 스파게티와 (지금의 나폴리 탄) 김치와 하이라이스가 나왔다. 처음 보는 반찬이 나왔는데, 메뉴 목록에는 ‘더덕구이’라 쓰여있었다. 문수는 듣도 보도 못한 음식이었지만 이름에 ‘구이’가 들어가면 맛있을 확률이 높을 것으로 생각했고,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더덕구이를 씹는 순간, 문수는 지옥을 맛보았다.

‘존재하는 모든 나물과 인삼을 뒤섞어 놓으면 이런 맛이 날까?’

문수뿐만이 아니었다. 더덕구이를 맛본 반 친구들은 혼돈의 카오스에 빠지고 말았다. 어찌나 향이 강했던지, 그토록 좋아하던 스파게티의 맛에도 영향을 주었다. 인삼을 씹는 듯한 식감도 끔찍했다.

-누가 제발 내 거 좀 먹어줘!

더덕구이 좀 대신 먹어달라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 음식을 남기면 남긴 개수만큼 선생님께 손바닥을 맞아야 했다. 음식을 남긴 학생을 체벌하는 이유에 대해서 선생님은 늘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지금 남기는 음식 있지? 그걸 먹지 못해 지금 지구 반대편 수많은 아이가 죽어가고 있어. 지금 경제도 안 좋은데, 주어진 음식이라도 감사하게 먹어야지! 건방지게, 남겨서야 하겠어!?

음식을 남기는 것이 왜 ‘건방지다’라는 말로 이어지는지 문수는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회초리 한 대라도 덜 맞기 위해, 문수는 헛구역질을 참고 더덕 몇 개를 억지로 씹어 삼켰다. 어떤 여자아이는 울기도 했다.


반 학생 45명 중 40명이 씹는 고통 대신 맞는 고통을 택했다. 회초리를 든 채 식판을 훑어보며 지나가는 선생님의 눈을 마주치는 학생이 있을 리 없었다. 50cm 자를 뻗어 학생들이 남긴  더덕 (당연하게도, 더덕 외에 남겨진 음식은 없었다)을 센 후, 그 개수만큼 손바닥을 내리쳤다. 곳곳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문수는 딱 세 대를 맞았다. 

5교시가 끝날 때가 돼서야 아이들은 교실 뒷정리를 할 수 있었다. 피의 수요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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