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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창선 May 14. 2019

물집 : 산을 타면 물집이 잘 안 잡혀요.

삶의 굴곡과 파란만장함이 주는 다이나믹함에 대하여.

30살이 되던 해의 겨울이었어요. 

12월10일 새벽, 잠들어있던 친구 옆에서 전 주섬주섬 배낭을 챙기고 있었죠. 침낭도 챙기고 텐트도 챙기고, 물집약도 챙기고, 옷도 챙겨넣었어요. 그리고 방어력 높은 패딩을 입곤 길을 나섰어요. 꽤나 심적으로 힘든 일들이 복합적으로 휘몰아쳤다가 지나간 시기였죠. 폭풍같은 일들이 지나고 나니 마음에 남아있는 건 굉장한 황폐함이었어요. 별 감정도, 생각도, 계획도, 꿈도 없는 상태가 되었달까요. 마침 일도 없었던 터라 나름의 수행길을 떠나보기로 했어요. (하필이면 겨울)


그래서 성남시 태평역에서 출발해서 팔당역까지..그리고 여주, 충주, 문경, 상주를 지나 경주로 넘어가서 감포, 포항, 울산, 부산을 찍고(이 날이 크리스마스) 김해를 넘어 진주까지 걸어갔죠. 합해보니 약 600km 정도되더라구요. 

퀭...(14일차 해운대)

하루에 30~40km를 걷곤 했는데 약 11시간정도?..걸렸던 것 같아요. 충주까지는 거의 절름발이 신세였어요. 물집이 온 발에 잡히고 무릎통증은 심해지고, 배낭도 버려버리고 싶었죠. 행군할 때도 이렇게까지 물집은 안잡혔던 것 같은데 발바닥이 늙었나 싶더라구요.


물집은 마찰열때문에 생겨요. 신발과 발사이에 압력이 계속되고, 조금씩 밀리고 쓸리면서 피부가 뜨거워지고 이내 표피가 너덜너덜해져서 떨어지는 거예요. 하지만 찢어지지는 않은 상태. 떨어진 표피사이에 체액이 스르륵 스며서 물이 차면 물집이 완성되요. 가끔 모세혈관이 터져 피가 섞이면 피물집이 되죠.(개아픔)


하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히말라야 트래킹이나 지리산 종주, 태백산맥등을 탔을 때는 물집이 잡히지 않았다는 거예요. 오히려 발이 더욱 혹사당했을 것 같은데 말예요. 걷는 시간이나 난이도도 등산쪽이 훨씬 심하지만, 오히려 평지를 걸을 때 물집이 훨씬 쉽게 잡혀요.


이유는 단순해요. 평지를 걸을 땐 우린 한 자세로 걸어요. 발에 가해지는 압력도 한 곳에 집중되죠. 계속 같은 곳에 마찰이 생기고 뜨거워져요. 하지만 산을 탈때는 울퉁불퉁한 돌과 흙이 있어요. 여기저기 압력이 분산되고, 다양한 부위에 힘을 주죠. 걷는 자세도 계속 달라지고, 평지처럼 빠르게 걸을 수도 없어요. 


그래서 허벅지와 무릎은 터질지언정 물집이 생기진 않아요. 


삶도 비슷한 것 같아요. 평지가 편하긴 하지만 한 가지 자세로 아무 굴곡도 없는 길을 걷다보면 가장 연약한 곳부터 무너지기 시작해요. 그렇게 생긴 100원 크기의 물집은 우릴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게 만들죠. 엄청난 고통을 주면서 말예요. 


산길을 타는 것은 온 몸의 힘을 써야해요. 균형을 잡고 오르막 내리막을 견뎌야 하니 허리, 무릎, 발목, 목, 팔과 다리근육을 모두 쓰게 되죠. 다음 날이 되면 온 몸이 뻐근하고 아프지만, 다시 걸을 수 있어요. 


편하게 사는 건 물론 좋은 일이에요. 인간의 본성과도 아주 합이 잘 맞죠. 뒹굴과 늘어짐은 유전자속에 내재된 자연의 명령이에요. 평범한 삶, 지루한 일상, 하던 것을 그냥 계속 하는 삶도 다 좋아요. 하지만, 오래오래 한 자세로만 걷는 건 영혼에 큰 무리를 준답니다. 


삶에는 평지와 산길이 적당히 필요한 것 같아요. 계속, 오래, 잘 걷기 위해서 말이죠.  
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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