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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 Sep 10. 2023

<오펜하이머>-"빨갱이" 사용법

능력으로 이길 수 없는 경쟁자를 이기고 싶다면 "빨갱이"라고 불러라

핵폭발처럼 강력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다 읽고 나서
영화 감상문을 나중에 쓰겠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해 봤었다.
오늘 이 시간 직전까지.


예습을 하고 봐도 어려운 영화, 보면서도 어렵고, 보고 나서도 계속 이해가 미진하게 느껴지는 영화를 "크리스토퍼 놀런"이 만들고 있다는 말을 하는 관객이 종종 나타난다. 그냥 난해한 영화라면 보지 않으면 되는 것이겠지만, 그 난해함을 넘어서면 뭔가 즐거운 해석과 더불어 인생을 다시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어떤 해법이라도 있는 느낌이 들어서, 그 "난해함"을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영화가 가진 함정이다.


지금껏 "놀란" 감독의 영화에 대해서 몇 편의 감상문을 남겨왔다.

1. 인셉션 : https://brunch.co.kr/@rpyatoo/34

2. 다크나이트 라이즈 : https://brunch.co.kr/@rpyatoo/94

3. 인터스텔라 : https://brunch.co.kr/@rpyatoo/6

4. 덩케르크 : https://brunch.co.kr/@rpyatoo/152


이 글들을 들어가서 읽어본다면, 일단, 확실히 내가 이해했다고 포착한 내용만을 적었음을 알 수 있다. "배트맨"이 나오는 "다크나이트 라이즈"같은 영화에서 "놀란" 감독이 대중 상업 영화의 팬이 이해하지 못할 정도의 심오함을 추구했을 리는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고, 그 정도 수준에서 이해하는 것이 과유불급이라 믿는다. 


여러 고증과 과학 이론, 치열한 현실의 디테일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데 있어 세세하고도 섬세한 면을 갖고 있는 감독이자 그의 스태프, 배우이기 때문에, 프랜차이즈 상업 영화 외의 독립적인 작품에는 알게 모르게 상세한 디테일이 상당히 쌓여 있다. 그중에 "일반 관객" 중 1인으로서 아는 선까지만 이해하고 이에 대해서만 쓰는 것이 바른 태도라고 여기고 써왔다. 


그러고 나니 함정에 빠진 괴로움을 씻고 또 다른 그의 작품을 가벼운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었다. 그것이 "오펜하이머"다. 이 영화의 개봉 즈음에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라는 서적이 등장했고, 지금 이 책은 서점가에서 "베스트셀러"의 위치를 차지했다. 이 책은 1,000 페이지가 넘어가는 두께를 갖고 있고, 진지한 결심을 하기 전까진 나 같은 노동 강도 높은 산업의 월급쟁이가 읽기를 시도하기에 그렇게 쉬운 책은 아니다.


(출처 : amazon.com)


그런데 이 영화의 원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라고 하니 바로 전에 썼던 "마스크 걸"의 웹툰 원작을 읽을지 말지에도 주저하다 결국엔 다 보기는 했기에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다 읽고 나서 영화 감상문을 나중에 쓰겠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해 봤었다. 오늘 이 시간 직전까지. 웹툰이야 하루 정도면 다 볼 수 있는 분량이지만, 1,000페이지가 넘는 그 책은 더 긴 시간과 인내심이 필요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름 아닌 "빨갱이"로 "프레이밍" 당한
"오펜하이머"였다


그런데 그동안 쓰기를 미뤄왔던 내용이 그간 잠시 쉬었던 주말 글쓰기 기회가 되돌아온 오늘, 갑자기 머릿속에서 "오펜하이머"를 본 기억과 함께 휘몰아쳤다. 


오랜만에 집 근처의 단골 커피숍에 들려서 밀렸던 급한 일부터 먼저 처리하려고 회사 노트북을 켜는 그 순간에 오른쪽 좌석의 20대의 여자분들이 그 연령대에는 정말로 중요한 과제인 것이 틀림없는 연애와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소리가 "아이팟"으로 꽉 틀어막은 귓속으로 흘려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위선적이기 그지없던 한 남자에게 "정의 사회 구현"이란 딱지를 붙이고, 그가 얼마나 모순적으로 처신했던 남자였고, 그런 것 따지면서 이별을 통보한 것에 대해서 성토하고 있었다. 안 듣고 일을 하려고 애썼지만 자꾸 그 이야기가 들려왔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정의 사회 구현"이란 이름이 자꾸 의식 속으로 파고들어 그에 관련된 여러 연상을 끌어왔기 때문이다. 거의 반자동적으로.


나의 "정의 사회 구현"이란 내용에 따라온 연상

1. 장정일의 소설이자 장선우 감독의 영화인 "거짓말"에도 그런 종류의 남자가 등장한다. 학생 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여자 공원인 주인공 여자를 꼬신 그 남자는 "사회 정의 구현"을 위해 투신하는 인물이지만, 열심히 책을 읽는 연인이 된 여자에게 "콤플렉스 덩어리"라는 비난을 하고, 폭력적인 성행위를 강요했다.


2. "마하트마 간디"도 인도의 훌륭한 정신적 스승이자 비폭력 저항주의자로서 "정의 사회 구현"을 위해 투신했지만 그의 보다 상세한 전기를 찾아보면 여러 여신도와 관능적인 관계를 가진 여가 시간이 자주 있었다.


3. "빅토르 위고"도 대문호로서 "레미제라블"을 통해 "프랑스혁명"을 묘사하면서 가난한 이들의 인권이 개선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불멸의 고전으로 인류에게 선사했지만, 그 누구보다 특권층을 지향하며 죽는 날까지, 아니, 죽은 이후에도 자손을 통해 자신을 "국민장"으로 장례를 치르게 하는 집요한 "특권 의식"을 선보였다.


4. 그분들이 한 대화를 정치적인 용어로 "Framing, 프레이밍"이라고도 한다. 딱지 붙이기로 직역하자면 "Labelling"이 될 수도 있고, "주홍글씨"에 나오는 "사회적 낙인, Social Stigma"도 되지만 그건 평판이나 사회도덕적 판단에 더 가깝다. 뭐, 그냥 별명 붙이기를 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프레이밍"이 떠올랐다.


그보다 더 정치적으로 해석되는 "프레이밍"에 결국에는 효과적으로 당하고 자신의 정치적 지위와 영웅이자 과학자로서의 위상을 드라마틱하게 잃게 된 존재가 또 누가 있던가? 그는 다름 아닌 "빨갱이"로 "프레이밍" 당한 "오펜하이머"였다.


그러고 나서 내 개인 노트북을 꺼내어서 이전에 조금 쓰기만 하고 작가의 서랍 속에 처박아 둔 "오펜하이머"에 대한 감상문을 열어 다시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각각의 나라에서 그렇게 세운 공적이
무엇이었는지에는 관심 없는 적들이 만든
"프레이밍"에 갇혀서 "영웅"으로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오랜 세월
공적인 무대에서 사라진 존재가 되었다.


"넷 플릭스"를 아무리 뒤져도 의도했던 대로 "오펜하이머"의 전기를 다큐멘터리화해서 만든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는 뜨지 않는다. 대신 예전에 봤던 "이미테이션 게임"이 "오펜하이머"로 검색한 뒤에 나오는 눈에 띄는 영화인데, 그 이유는 너무 명확해서 스포일러 그 자체라고 할만하다.


2차 대전, "독일군의 암호체계 에니그마"를 해독하는 최초의 컴퓨터 "크리스토퍼"를 만들어 "연합군"의 승리를 이끌어 내고, 2년 빠른 전쟁의 종식을 통해 전쟁의 희생자 1,400만 명을 줄인 천재 "앨런 튜링"은 "동성 연애자"였기 때문에 영국 정부로부터 영웅으로 불리기보다는 사라져야 할 존재로 취급당하고 결국 "청산가리"를 품은 사과를 베어 먹고 죽었다. 2009년에야 영국정부가 사과했고, 2013년 영국 여왕이 사면을 내렸다.

https://brunch.co.kr/@rpyatoo/60


2차 대전, "일본군의 그 어떤 무기보다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무기"인 최초의 핵무기 "리틀 보이와 팻 맨"을 만들어 "미군"의 승리를 이끌어 내고, 보다 빠른 전쟁의 종식을 통해 전쟁의 희생자를 줄인 천재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빨갱이"로 몰렸기 때문에 미국 정부로부터 영웅으로 불리기보다는 "스파이"로 취급당하고 중책에서 물러났다. 1967년 사후 57년이 지난 2014년에 누명이 벗겨졌고, 2022년 말에야 스파이 혐의를 벗었다.


이 두 사람은 각각의 "천재성"을 과학적인 방법과 리더십 양쪽으로 발휘해서 그전 시기까지 인류가 만들어내지 못했던 새로운 문명의 탄생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이들이다. 그리고 각각의 나라에서 그렇게 세운 공적이 무엇이었는지에는 관심 없는 적들이 만든 "프레이밍"에 갇혀서 "영웅"으로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오랜 세월 공적인 무대에서 사라진 존재가 되었다. 



"오펜하이머"의 존재감을 특별하게 드러낸다. 


이 영화는 쉽게 보려면 이 정도 수준에서 해석을 하면 한 가지 정도는 뚜렷한 인식으로 남겨서 가져갈 수 있는 영화다. 그러나 실제로 3시간의 상영 시간 동안 이 외에도 기억 속에 넘실거리는 여러 장면은 왜 이 영화를 "크리스토퍼 놀런"이 만들어야 했는지를 납득하게 만들고도 넘는다. 


그의 페르소나로서 "킬리언 머피"가 "오펜하이머"로 나와야 했는지와 겉과 속이 다른, 만만찮은 지력을 가지고도 위선적이면서 편협한 빌런인 "루이스 슈트라우스"를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연기해야만 했고, 역사적으로도 위상이 높은 각각의 인물을 연기하기 위해 캐스팅된 배우의 수준이 또한 그 급에 맞게 화려하고 높았던 것인지도 보는 내내 감탄하면서 납득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인쉬타인"을 맡은 "톰 콘티"의 외모의 유사성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다.

(출처 : 좌/New York Post ,중/Holllywood Reporter, 우/Olhar Digital)

"오펜하이머"가 "빨갱이"로 몰리게 된 단서를 크게 제공한, 그의 결혼 전 애인이자 결혼 후의 불륜 상대였던 "진 태틀록"을 연기한 "플로렌스 퓨"의 관능적이고도 자기 파괴적인 "팜므파탈"같은 인상은 정신적인 분열과 긴장 상태, 혼동을 오가고 생각의 변화를 빠른 속도로 내부에 겪는 "오펜하이머"의 존재감을 특별하게 드러낸다. 그는 핵개발에 대한 신념을 가졌었지만 이후에 재앙임을 깨닫고, 수소폭탄 개발엔 소극적 대응을 한다.


관객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긴 "진"과 "오펜하이머"의 성애 장면은 이 다큐멘터리처럼 건조한 분위기가 흑백 화면을 오가면서 흐르고, 비공식과 공식 청문회의 정치적인 공방이 지배하는 후반부의 스토리 중에 "핵폭발" 실험을 하는 장면과 유사한 수준의 강렬함을 선사한다. 그만큼 죽을 때까지 공산주의자였던 "진"과, "오펜하이머"의 관계가 정치적인 것보단 육욕과 애정이 주가 된 관계였음을 드러낸 장면이었다고 생각한다.

(출처 : The Independent)


"에밀리 블런트"는 주인공인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부인인 "키티 오펜하이머"를 연기하기에 걸맞도록 "킬리언 머피"와 왠지 유사한 외양을 가진 배우처럼 느껴지는데, 불륜의 상대였던 "로버트"와 재혼을 한 이후에 그의 불륜이 밝혀진 상황에서도 남편을 변호하는 장면을 어색함 없이 연기해 내면서 지금껏 연기했던 그 어떤 작품보다도 더 복합적인 연기를 해냈다. 슈퍼 히어로물이나 액션물 배우의 느낌에서 완전히 탈피했다.


(출처 : Fortress Of Solitude)



"도깨비와 싸우다 보면 도깨비가 된다"란
말처럼 생긴 그 "프레이밍" 전략 또는 전술은
이제 적어도 우리 진영에선 사라져야 한다. 


최근에 들어서는 그 누구도 긴 글이나 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세상이 되다 보니 편의적으로 어떤 존재를 짧게 라벨링 해서 기억하고 대응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가고 있다. "칼 융"이 구도자의 자세로 연구해서 만들어낸 "MBTI"란 것을 통해 상대방을 4개의 알파벳을 붙여 유형화하는 것이 전반적으로 상식인 것처럼 통용되는 사회가 된 것도 그런 트렌드의 일환인 것 같다.

(출처: Digital Visualization / Wordpress.com)

커피숍을 떠난 "사회 정의 구현"을 외쳤던 한 남자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던 두 여자가 아니더라도 우린 일상 속에서 계속해서 더욱 손쉽게 한 존재를 이해하고 있다고 확신을 갖고, 평가 내리고 자신의 대응을 합리화하면서 쉽게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 계속 말을 줄이고, 별명을 만들고 "프레이밍"해서 살아갈 것이다. 나도 그럴 것이고, 내 가족과 친지, 친구, 직장 선후배, 그 외 수많은 모든 이가 그럴 것이고 그걸 말릴 생각은 없다.


그렇지만, 최소한 나와 이 사회를 위해서 커다란 역할을 하고,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과학 기술의 영역이나 스포츠, 예술, 문화, 비즈니스, 공공사업 등등의 여러 영역에서 나름 공헌하고 있는 인물을 단지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는 이유나 "정치적으로" 눌러 앉혀야만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거나 공고히 다질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손쉽게 "빨갱이"같은 프레임을 씌워서 정치 사회적으로 죽이는 행위가 계속 반복되어야만 할까? 그런 질문을 하나 이 영화가 던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영화는 "핵"과 같은 인류에게 재앙이 될만한 기술이 하나 나타남으로써 인류가 처하게 된 파멸 직전의 상태와 이보다 더한 무기의 개발을 통해서 그 종말 가능성의 정도가 더 높아진 이 세계의 암울함에 대한 질문도 다시 던지고 있다.


그러나 내겐 "빨갱이"란 "프레임"이 씌워지지 않았다면 영향력 있는 위치에서 "핵"을 개발했을 때와는 또 다른 생각을 하고, 고뇌하면서 좀 더 인류를 위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 수 있는 역할을 했을 "영웅"을 "스파이"로 몰았던 당시 미국 정부 관계 인사들의 우매함과 "메카시즘 광풍"에 휩싸여서 같이 동조했을 수많은 "미국인"의 어리석음이 우리에게도 반복되지 않았으면 좋겠단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실력으로 이길 수 없고, 논리로써 제압할 수 없으며, 어떻게 생각해도 잘못한 게 있다고 증명할 수 없는 라이벌을 상대적으로 쉬운 방법인 "빨갱이"로 몰아서 제압하는 것은 그저 지적인 게으름처럼 보인다. 그런 프레이밍을 하지 않고서도 시대에 맞지 않는 극단적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경도된 사람이라면 그 자체로 생각을 잘못하고 있음을 드러낼만한 근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제대로 된 자유 민주주의 사회이자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 맞다면, 우리의 사고는 좀 더 이 사회가 지속 가능한 상태로 남아 있을 수 있도록 자유 민주주의의 근본이자 자본주의의 확장에 충분한 연료를 제공한 자유롭고도 다양한 사상의 토론이 가능한 사회 체계를 유지할 수 있는 유연성과 자연스러움을 갖고 있어야 한다.


"유대인과 비 아리안족"을 열등한 존재로 "프레이밍"한 "나치"와 "군국주의"로 천황을 신격화하면서 "비신민"을 열등한 존재로 프레이밍 한 "일본 제국주의"와 "반동분자"로 몰아서 정치적 반대 세력을 처단해 온 "공산주의"는 이 세계에서 열등한 존재였기 때문에 결국 졌고, 세상에서 마이너 한 존재로 세력을 축소당했다. 그런 짓이 얼마나 무지한 짓이었는지 커다란 근거를 남겨준 게 아닐까?


지금의 자유 민주주의이자 자본주의 사회가 아직도 이런 "프레이밍"을 열등한 이념 체계의 사회와 다를 바 없이 지속하고 있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고도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쉽고 효과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겠지만, "도깨비와 싸우다 보면 도깨비가 된다"란 말처럼 생긴 그 "프레이밍" 전략 또는 전술은 이제 적어도 우리 진영에선 사라져야 한다. 이건 실력 없는 자가 실력 있는 자를 멈추기 위한 흑마술이다.


우리에게 더 위험한 것은 우리의 시스템이 고여서 썩어가면서 생기고 있는 "환경적인 위협"과 통제할 수 없는 AI와 결합된 기업 활동이 만들어 내고 있는 "인류의 건강과 더불은 일자리의 위협", 디지털 모바일 문명과 더불어서 점점 더 커지고 있는 "인류의 지적 양극화 현상 등"의 일상 속에 이미 실제 하는, 바로 해결에 돌입해야 할 문제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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