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빨양c Jun 23. 2022

Ep27. 나는 나의 인격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Keep it super simple.



신입으로 입사할 때만 해도 내가 내 발로 이 회사를 걷어차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건만,  

마침내 퇴사일이 정해지니 그때 아기같던 신입이의 마음은 이미 오간데 없고,

누구보다 차분하게 퇴직 준비를 해내고 있는 나 자신이 신기했다.

신입 그때의 나도 나였고,

퇴사를 앞둔 지금의 나도 같은 나인데 마음가짐이 이렇게나 다를 수 있다는 게 새삼 신기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쨌든 시간은 퇴사 날을 향해 무심하게 흘러간다. 아쉬워할 틈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D-7>

#설 팀장이 후임자를 지목해주었다. 놀랍게도 공항에서 근무하고 있는 현장직 후배였다. 잘 알진 못하지만 공항에서 나름 똑 부러진 이미지로 열심히 한다고 들었던 직원이었다. 나는 내심 후임자가 일을 잘한다 해서 기분이 좋았다. 그래도 내가 열심히 공들여놓았던 사업들을 웬만하면 능력 있는 사람이 인계받아 잘 마무리해주길 바라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어머 참 착하기도 해라- 퇴사를 앞두니 마음이 한없이 자비로워지는 기분이다.   

물론 공항 현장직이 영업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게 흔한 케이스는 아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내 자리, 정확하게는 퇴사한 오 차장, 김 대리의 역할까지 3명 몫을 해낼 수 있는 직원을 내부 공고 채용으로 시도했으나 지원자는 0명.

회사는 여전히 오만하고,

여전히 직원들을 멍청하게만  본다.

시간은 없고, 신규 채용할 여유도 없는 회사가 다음으로 할 수 있는 나머지 하나는 그거뿐이다.

" 이거 맡아.  ? 그럼  짜른다?"

KISS 전략이라고 배운 적이 있다.

이럴 때 쓰라고 배운 건 아니었던 것 같지만.

Keep it super simple.

지금껏 그래 왔듯이 슈퍼 심플하게 직원들을 내몰면 되는 거다. 생각의 여지를 주지 않는 거지. 그러면 개중에 하나는 이렇게 후임자로 끌려오게 되어있다.

하나하나 빛나는 삶을 꿈꾸고 있는 직원 이건만, 회사는 그들의 꿈에 대해선 궁금하지 않다. 그저 나가는 사람의 업무가 빵꾸나지 않게, 티 나지 않게, 상급자인 본인에게 피해가 되지 않게 잘 커버할 수 있느냐 마느냐만 궁금할 뿐.


어쨌든 나는 그렇게 인계를 이어갔다. 과장으로서의 업무와 오 차장이 내던지고 간 사업들, 그리고 김 대리가 반짝반짝하는 아이디어로 꾸며놓은 계획서들까지 나름 잘 정리해서 설명해주었다. 후임자는 이걸 어떻게 혼자 다하느냐고 설 팀장에게 따질 기세였지만, 글쎄. 설 팀장, 아니 이 회사의 저 대단한 KISS전략 앞에 이미 끌려들어 온 후임자가 선택할 수 있는 폭은 크지 않을 것이다.  

회사는 말하겠지.

"전임자는 혼자 다 하던 건데 왜 넌 못해?"

누누이 말하지만 회사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관심이 없다. 그저 피해가 오지 않게 그 일을 잘하냐 마냐만을 강요할 뿐.


 <D-6>

#내부 인계 작업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후임자의 얼굴이 점점 잿빛이 되어간다. 내 얼굴도 저랬겠지 싶다.

퇴사일이 정해져서 마음에 여유가 좀 생겼는지 회장실에 아무렇지 않게 들어가서 회장님한테 퇴사 전에 저녁식사나 한번 하자 했다. 계속해서 나에 대한 배신을 회사 내, 그리고 회사 밖 업계 관련 업체에도 끝없이 하고 다니는 모양이지만.. 그래도 이 회사를 다니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날 많이 아껴주시고 배려해주신 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날 왜 아무런 요구 없이 사표를 막연히 두고 갔는지는 설명드리고 싶었다. 물론 대답은?

“생각해보지."

글쎄. 그래도 사람과 사람이 만나 같이 일하던 사이인데 최소한의 예의는 서로 지켜주는 게 맞지 않나? 저렇게 욕과 비난만 하다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되는 사이가 되면 그 사람의 인격에 남는 건 과연 무엇일까?

아니, 저 나이쯤 되면 그런 것쯤은 아무렇지 않게 무시할 수 있게 되는 걸까?

난 저렇게 나이 들고 싶지 않다.

나는 나의 인격을 이런 곳에서 낭비하고 싶지 않다.


 <D-5>

#이제 내부적으로 인계해 줄 건 거의 마무리되어 간다. 오늘부터 거래처를 후임자와 같이 돌며 업체 소개를 해 줄 생각이다. 그래도 업계에 내 이름 팔아 내 후임자라고 어필해두면, 당분간은 어느 정도 업계에서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렇게 허투루 한 사람이 아니라고 내가!

이런 고결한 배려를 아는지 모르는지 후임자의 얼굴은 잿빛을 넘어 새까맣게 타버린 것 같다. 마음고생이 많이 심한 눈치지만, 안타깝게도 퇴사 예정자인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내 퇴사 소식을 들은 거래처들의 반응은 다양하다. 가장 감사한 마음은 본인들 회사에 사람을 뽑는데 생각 있으면 꼭 연락 달라는 거래처 분들. 의례 하는 말일 수도 있겠으나 회사에서 수동적 왕따가 되어있던 나의 마음을 따뜻하게 뎊혀주었다.  

그리고 한 가지 놀란 점은 많은 거래처 분들이 퇴사한다는 나의 말에 바로

"그동안 거기서 진짜 고생 많았어" 하고 위로를 건넨다는 것이다. 거래처 앞에서 늘 밝고 쾌활한 태도로 대해왔던 터라 이 회사에서 내 힘듦을 알리 없을 텐데 그들은 어떻게 어떤 이유로 퇴사하는지에 대해 묻지도 않고, 바로 고생 많았다며 위로를 먼저 해주었다. 회사 안 동료라 불렸던 이들보다 더 따뜻한 위로를 전해주는 외부업체 분들의 마음에 감사함을 느끼며 하루를 마무리하였다.


 <D-4>

#2차 희망퇴직자들의 퇴사일이 오늘이라고 한다. 그리고 나는 몰랐으나 그들의 퇴직을 위로하기 위해 어제저녁 조촐한 회식이 있었다고 한다. 전염병 시대에 정부는 회식을 지양할 것을 권고하지만, 그런 것쯤 우습게 여기는 한결같은 회사가 여기 있다. 아무튼 거기 후임자 분이 전해주길 어제 그 자리에서 서 부장님이 함 전무에게 내 실업급여를 챙겨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미 실업급여는 함 전무에게 안된다고 통보받은 터였기에 기대하지도 않고 있었는데, 늘 짖꿏기만한 서 부장님이 이렇게까지 날 챙겨주려고 하는 마음에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그동안은 그저 조용히 퇴사하는 게 그분께 이로울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런 이야기까지 들은 판에 그래도 뭐라도 해드리고 싶어 점심이라도 같이 하자고 조용히 카톡을 보냈다.

그 때 탕비실에서 인사하긴 했지만 희망퇴직자  하나인 동기  대리가 마지막 인사하러 왔다. 나도 이제 며칠 뒤면 같은 처지라고 소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둘 다 얼굴은 죽상이었지만.

자진퇴사든 희망퇴직이든. 앞날이 막막한 건 같다.

한가지 새로 알게된건 알고 보니 고 대리의 이 우리 집과 가까운 위치여서 퇴사하고도 종종  일이 있지 않을까 싶다. 조만간 술한잔 하자고 톡을 보냈다. 부디  좋은 회사로 이직 잘해서 좋은 소식으로 다시   있길. 서로의 운을 빌어주었다.


엘리베이터에   명의 무리가 탑승했다.

어느새  안은 희망 퇴직자들의 최대한 비통해 보이지 않으려는 어색한 웃음으로 가득  공간이 되었다.


“희망퇴직”


퇴직이라는 단어 앞에 "희망"을 붙인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시대에 퇴직을 희망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퇴직자인데 희망을 붙인다는  얼마나 회사의 잔혹한 이기심인가에 대한 회의감이 든다. 회사도 힘드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게 이해되긴하지만..

하지만 안타깝게도 변하는  없다.

그저  책상 수십 개가  생겼고,

회사는 아무렇지 않은  하루를 흘려 보낼뿐.

오늘도 평범한 직장인들은 그렇게 하루를 버텼다.




계속.

이전 26화 Ep26. 내 손으로 사표내고 실업급여 되냐 해보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