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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양c Jun 24. 2022

Ep29. [마지막화] 퇴사 D-day.

“나와 같이 나갈 사람 없어요?”



<D-day>

입사 첫날부터 계속 그래 왔듯이 아인은 제일 먼저 사무실 문을 열었다.  

더 이상 지문인식이 아닌 안면인식으로 열리는 최첨단 문 앞에서 세월이 빠르구나라는 생각과 내일부턴 내 얼굴로는 이 문은 열리지 않겠지? 하는 묘한 느낌을 받으며 사무실에 발을 디딘다.

그래도 짐을 매일 조금씩 옮겨놔서 퇴사일인 오늘 가져갈 짐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언젠가 TV에서 퇴직자가 A4 박스에 그동안 사용한 자기 물품 챙겨서 가슴에 품고 걸어 나오는데 아무도 아는 척도 않는 장면이 어찌나 서글퍼 보이던지.. 아인은 절대 그런 모습 말고, 퇴사 때도 첫 출근 때처럼 당당히 나오자고 다짐했었다. 어떠한 이유로 나오게 되더라도 꼭.


마지막 출근날. 평소와 다를 바 없을 것 같지만 역시 아무렇지 않지 않다.

지금은 깨끗이 정리해둔 정들었던 본인의 자리에서 일어나, 오 차장, 김 대리가 쓰던 자리, 업무로부터 도망가기 위해 파티션에 숨기만 하던 밉상 사 대리의 자리, 사표를 내던졌던 설 팀장의 그 책상 앞을 지나, 도대체 언제 먹을는지 잔뜩 쌓여있는 숙취해소 음료 가득한 서 부장의 책상, 신입시절 열심히 키웠던 화분들과 수십수천 번 갈았을 복사용지들, 색이 너무 진하다 생각했던 회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 내던지고 싶었던 소화기와 깨부수고 싶었던 넥타이가 걸려있는 거울, 아직도 액자를 찾지 못한 창가에 걸쳐진 이름 모를 그림들과 아직 날이 밝지 않아 반사하지 못하고 날 것의 창문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맞은편 유리 빌딩들.

아무도 없는 아침 사무실 공기가 좋았다.

이 공기도 이제 마지막이구나하며, 조용히 회장의 의자에 앉아 멍-하니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더 이상 비뚤어지지 않은 네모 벽시계와 물이 가득 채워진 가습기를 보니 문득 든 생각.

 '-그래도 내가 매 순간  회사에 진심이었구나. 최선을 다했구나.'


그렇게 회장의 의자에서 일어나 중요한 의식이라도 치르듯이 회장실 문을 조심히 닫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으니 직원들이 출근하기 시작한다.

마지막 날이라 할 업무도 없는데 이 회사는 꼭 18시를 채우게 한다. 다른 회사는 오전 근무만 혹은 점심식사 정도만 인사치레로 하고 보내준다는데. 오히려 오늘 하루 느리게만 가는 그 시간 앞에 떠나는 이도, 남는 이도 서로 어색함만 더 남게 된다는 생각만 든다.


퇴사 소식을 전하는 아인에게 대다수의 사람들은 다른 회사 어디로 옮기냐고 물어본다. 아직 정해진 게 없다고 하면 그렇게 말하고 퇴사하는 사람들 나중에 다 어디선가 나타나더라며 자기한테만 알려달라고 콕콕 찌른다. 아인은 난감했다. 왜냐하면 정말 뒷일에 대한 계획을 해둔 게 없었기 때문에. 그저 막연히 이 업계에는 두 번 다시 발도 붙이기 싫다는 탈업계! 정도만 생각했달까.

물론 아인도 흔한 직장 어른이이므로 퇴사 후 당장 내일부터 펼쳐질 고통스러울 생계의 현실이 걱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럴 때마다 언젠가 책에서 봤던 아래 내용이 떠올라 먼저 걱정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였을 뿐이었다.  


그는 걱정을 사서 하는 사람이다.

그가 아는 한 하늘은 항상 무너지고 있다.

그것도 그의 머리 위로만 말이다.


어떻게든 될 것이고, 그리고 그것은 지금 이 상황보다는 나은 길로 갈 것이라고 스스로를 믿자 했다.  

물론 회사라는 울타리 밖 펼쳐질 참혹한 현실을 그때 그 아인은 몰랐으니 그랬겠지만. 그리고 이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7시가 되었다. 퇴사 한 시간 전.

그래도 마지막 인사는 드려야지. 아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회장실 문을 두드린다. 공허한 울림. 그는 오늘 오후 출장이라 안 들어오신다고 한다.

마지막까지 별로인 사람.

설사 그게 진짜 출장 일정이었어도, 아인의 시점에서는 변 회장의 그런 식의 마지막은 참 별로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무심히 사표를 올려뒀던 그날처럼,

무심한 몸짓으로 자리로 돌아온 아인은 마지막 할 일. 바로 어제 작성해둔 메일 임시 저장함에 해외지점 매니저들과 수많은 거래처에서 지금 이 시간에도 퇴근시간만을 바라며 일하고 있을, 흔하지만 별처럼 빛나는 거래처 직장인들을 향해 본인의 퇴사 소식과 한 분 한 분 일일이 찾아뵙지 못한 것에 양해를 구하는 내용을 담아 메일 전송을 클릭.

아! 물론, 도비 이즈 프리 대신에 시 한 편 첨부도 잊지 않았다.

아인이 이 업계에 다시 올지, 아니면 전혀 다른 업계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할지 아인 자신도 알지 못했지만,

그저 막연히 본인을 아껴주셨던 분들을 어떤 기회로든 다시 보게 된다면, 겨울을 견뎌온 봄날 같은 느낌으로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으로 담았던 시였다.


드디어 시계는 웅장하게 18:00을 가리킨다.

마침내 매번 퇴직자들을 보내기만 했던 그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아인은 그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문이라도 열리듯 그날의 엘리베이터 안 불빛이 찬란하게만 느껴졌다.

세상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닫히는 문 사이로 남는 직원들이 인사를 건넨다. 서 부장도 그 직원들 틈에 보일 듯 말 듯 나름 숨으려고 한 노력이 느껴졌으나,

‘그 덩치가 숨겨지겠어요 부장님?’ 생각하며 그저 조용히 작은 미소를 보내드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완전히 닫히고 1층으로 향한다.

'이제 진짜 끝이다. 끝.

퇴사하면 이런 기분이구나. 나쁘지 않은데!’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동안

아인의 머릿속에 영화 속 한 장면이 스쳐갔다.

제목이 기억나진 않는데,  

해고를 당한 한 남자가 회사를 떠나며 거대한 사무실 전체를 뒤돌아보며 묻는다.


"나와 같이 나갈 사람 없어요?"   

남은 동료들 누구도 눈길도 주지 않고 고요히 일을 계속한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그러다 그중 한 명이 나지막이 대답한다.  

"물론 그러고 싶죠.. 하지만   뒤에 승진이라서요."



그래,

누구나 천국에 가고 싶어 하지만,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인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이제 좀 알 것 같았다.

목적지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어떻게 회사까지 사랑하겠어@빨양c>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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