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는 역시.
"그래서 그날로 그냥 그 뭣 같은 회사에서 탈출 성공한 거..?"
예소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그렇게 통보만 하면 끝날 줄 알았지... 만, 그게 시작이었어."
"엥? 누가 봐도 거기서 이제 빠이하고 창창한 앞날을 향해 행진! 하면 될 것 같은데, 그게 시작이었다고?"
"어. 그렇게 그만두겠다고 한지 일주일쯤 지났을까"
아인은 긴 한숨과 함께 이야기를 이어갔다.
"팀장님, 제 업무 인계는 사 대리한테 하면 되는 거죠? 퇴사일은 언제쯤으로 맞추면 될까요? 말씀 주시면 그때까지 회사 돌아가는데 지장 없게 인계 완료해놓도록 하겠습니다. 가급적 최대한 빨리 퇴사하는 방향으로 처리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지난날 버스에서의 나약했던 아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어느덧 언제나 그랬듯 담담한 주 과장의 모습으로 쓰디쓴 모닝커피를 즐기고 있는 설 팀장에게 말했다.
"어?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게? 아-그때 말했던 거? 아차차.. 알다시피 내가 이번 주에 2팀 사업 서포트하느라 미처 보고를 못했네. 조금 더 기다려보지?"
너무 태연하게 해 대는 헛소리를 들으면 순간 정신이 멍해지는 법이다.
멍해지는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고 아인이 말했다.
"팀장님, 지금 무슨 소릴 하고 계신 거예요? 저는 지난주 분명히 사직서와 함께 퇴직 의사를 밝혔고, 남은 연차 감안해서 보름 정도 기간 동안 인계 완료하는 쪽으로.."
"하~주 과장! 그렇게 안 봤는데 왜 이렇게 사람이 이기적이야? 요새 회사 힘든 거 몰라서 그래? 꼭 그렇게 본인만 생각하는 사람인 거 티 내야겠어?"
'에? 내가.. 이기적이라고?'
울컥한 아인은 더 강하게 항변하려 숨을 골랐으나 설 팀장의 이어지는 이야기에 말문이 턱 막혔다.
"그리고 회장님이 오 차장 업무 대직자로 주 과장 지목하셔서 임원회의에 참석하라셔. 당장 오늘부터니까 오 차장 노트북 열어서 필요한 자료 좀 만들어놓고 이따 발표할 준비 좀 하지."
"예? 팀장님!! 임원회의라뇨? 과장 1년 차가 무슨 임원회의입니까? 게다가 저는 다음 주 퇴사 예정인.."
"아~ 알겠어. 알겠다고. 그만 좀 하지? 아직 안 나갔잖아? 지금 월급 받고 있지? 그럼 해야지. 아주 이기적이네 사람이."
'하- 역시는 역시다.
서 부장님이 맨날 하는 말을 내가 하게 될 줄이야..
역시는 역시다. 난 대체 저 팀장에게 아니 이 회사에 뭘 기대했던 걸까..'
깊은 회의감과 고요한 한탄만이 설 팀장과 아인 사이에 흘렀다.
아인은 하릴없이 비어있는 오 차장의 자리로 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저 팀장 믿고 있다가는 퇴사도 맘대로 못하게 생겼네.. 인사팀장이든 서 부장님이든 만나봐야겠어..'
아인의 발걸음은 어느새 서 부장을 향하고 있었다. 마침 서 부장도 3팀을 지나는 길이었고 둘은 마주쳤다.
"여~ 주 과장. 표정이 죽상이야 무슨 일 있어? 소식 들었는데, 음.. 여기서 이러지 말고 잠깐 나갈까? 지금 시간 괜찮지?"
애써 태연한 척 어색한 연기를 펼치며 서 부장이 말했다.
"안녕하세요 부장님, 아-지금요? 저 망할 설 팀장이 오늘부터 임원회의 들어오라 하셔서 준비를 해야 돼서 지금은 좀 그렇고요.. 내일 점심이라도 같이 하시죠.. 괜찮다면 인사팀장님도 같이 했으면 합니다. 부장님"
아인은 저 멀리 설 팀장의 귀에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서 부장에게 속삭였다.
"응? 임원회의? 갑자기 주 과장 네가 왜?
임원회의 막내가 나, 부장인데? 과장 1년 따리가?"
"네.. 회장님이 오 차장 대직으로 그렇게 하라 하셨다고 하네요.."
"하.. 이 회사 잘 돌아간다 참.. 후.. 체계도 절차도 다 무시한다 이거지? 일단 그래 알았어. 그럼 내일 점심 말고, 오늘 저녁으로 하자. 오랜만에 한 잔해. 요새 밤 9시까지는 술집 문 연다니까. 짧고 굵게. 괜찮지?"
"네 부장님 알겠습니다."
"그래 오 차장이나 김 대리나 누구 부르고 싶은 사람 있으면 같이 불러도 되고."
"싫다고 박차고 나간 사람들 불러 뭐한답니까. 배만 아프죠. 그냥 둘이 하시죠."
평소 같았으면 활짝 웃으며 꼭 부르겠다고 소리치겠지만, 이번엔 달랐다.
서 부장과 하는 마지막 술자리란 생각이 들어서였을까.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선후배를 떠나 지금 이 버거운 시대를 같이 살아내고 있는 흔한 직장인으로서 대화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상하게 마지막이란 단어는 참.. 익숙해지지 않는다고 아인은 생각했다.
"그나마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는 게 그때는 그래도 작은 위로가 됐달까?"
어쩐지 짠한 서글픔을 머금은 목소리로 아인이 말했다.
"뭐야 그럼? 니 사직서는 그냥 설 팀장 서랍에 고이 처박혀진 거? 참.. 거기도 대단하다. 무슨 회사가 체계도 시스템도 없이 단지 누군가의 맘대로 흘러가는 게.. 어떤 면에선 참 대단하기도 하네."
예소가 냉소적인 미소와 함께 답했다.
"한편으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같은 목적을 갖고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동료라는 이름으로 어쩌면 가족보다 더 오랜 시간을 함께하는데, 나와 같은 생각을 해주는 동료가 없다는 게 느껴져서 조금 무섭기까지 했달까.."
"내가 누누이 말했지? 직장에서 만난 사람은 딱 그 정도 관계인 거라고. 애초부터 돈을 목적으로 엮인 관계이기 때문에 겉으로는 서로에게 세상 친밀한 것 같지만 그 돈이라는 목적이 무너지면 어떤 관계보다 쉽게 깨져 부숴지는 관계.
너는 어릴 때부터 그랬어. 늘 너무 쉽게 마음 주고 혼자 기대하고 그렇게 빠져들고, 그러다 실망하고 좌절하고 슬퍼지지. 그게 문제야 넌!
하여튼 그래서, 그 서 부장이란 사람이랑 찐하게 한 잔 하셨나? 뭐라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