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대지말라구여? 흐음!!
'일 좀 하는 직원은 다 나가네..오 차장에 김대리에.. 주 과장도 결국..'
지난밤 희망퇴직자들에 대한 고민에 더해 아인의 사직 소식으로 잠을 설친 서 부장은 출근길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사무실에 들어섰다. 서 부장도 사람인지라 아인의 퇴사 소식에 배신감이 먼저 들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힘든 회사 상황에서도 본인이 그렇게 나름 애써서 과장 타이틀을 안겨주었건만, 1년도 채 되지 않아 사직 소식이 들려오니 개인적으로도 배신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운영부 총괄자의 입장에서 한 명의 희망퇴직자를 덜 찾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씁쓸한 현실.
'쯧.. 나도 속물 다 됐군 그래.. 사람보다 회사 걱정이라니.. 다음은 내 차례다 후..'
서 부장은 공채 면접장에서 처음 본 아인이 영 맘에 들지 않았다.
당당한 듯 보이지만 잘 알지 못하는 면접 질문에 솔직히 모른다고 하지 못하고 횡설수설 둘러대는 느낌이 들었고, 개인적으로 서 부장은 이런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르는 것에 대해 정확치 않은 내용을 사실인 양 둘러대는 것은 조직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불신을 조장하고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작은 일을 부정적인 방향으로 크게 키울 여지가 크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서 부장은 아인의 채용에 반대표를 던졌다.
하지만 아인은 최종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서 부장은 그런가 보다 애써 관심을 갖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서 부장의 예상과 달리 아인은 입사 후 본인 업무는 물론 타 업무도 적극적으로 배워가며 성실한 태도를 유지하였다. '한, 두 달 지나면 본색 나오시겠지-'하던 서 부장도 1년을 넘겨, 2년, 3년 그리고 계속 시간이 지나도 일관되게 성실한 아인의 모습을 보며 내심 감탄하며 본인의 신입시절이 생각나곤 했다.
언젠가 한 번은 "열심히 하는 신입보다 무서운 건 또 없지" 라며 무리하지 말라는 뉘앙스로 아인에게 조언을 해주기도 하였다. 아직 업무에 익숙지 않은 신입이 열정으로만 업무처리를 하면 반드시 실수를 하게 되고, 그 실수를 무마하기 위해 혼자서 끙끙대다 또 다른 실수를 발생시킨다.
그 실수를 통해 성장할 수 있는 그릇의 직원이라면 밑거름이 되겠으나 충분히 더 커 갈 수 있는 직원임에도 거기서 좌절하는 후배들을 너무 많이 봐왔던 터였다. 게다가 아인의 그때처럼 첫 회사, 신입시절의 서 부장 역시 본인의 영혼을 부셔 넣으며 회사에 충성했으나, 그 끝에 회사로부터 통보받을 일방적인 냉철한 쓴 맛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인이 그런 것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물론 무뚝뚝한 서 부장의 이 말이 아인에게 제대로 전달되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90년생이 몰려온다였나.. 그 책에는 이런 식으로 참견하지 말랬는데.. 꼰대 된다고.
에휴-모르겠다. 깨어있는 놈이면 알아들었겠지 모 아님 아닌 거고~'
이후로도 서 부장은 특히 해외영업 3팀 오 차장, 주 과장, 김 대리에게 마음이 많이 쓰였다.
설 팀장이 어떤 사람인지 적나라하게 알고 있는 운영부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아랫사람으로 일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 이해되기 때문이리라.
아무것도 모르는데 열심히 죽어라 하는 팀장과
다 알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팀장.
과연 어떤 사람이 더 힘들까?
거기에 더해 책임 소지가 발생했을 때 한치의 망설임 없이 부하직원의 탓으로 던지고 본인은 싹-피해나가는 뱀 같은 상사의 쓴 맛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서 부장의 눈에 설 팀장은 그럼 뱀 같은 사람이었고, 3팀의 나머지 직원들. 그중에서 특히 회장, 사장, 그 어떤 임원보다 더 자기 회사처럼 열일하는 아인이 너무 안쓰러워 보일 때가 많았던 것이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 성실함을 인정받아 과장 승진 인사발령이 났을 때 마치 서 부장 본인 일처럼 어찌나 기뻤던지.. 그렇게 내심 아끼던 주 과장의 사표는 서 부장에겐 쓴 맛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오 차장이 사표를 던지고 업계 탑 회사 중 한 곳으로 이직한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도 서 부장은 비록 아쉽긴 했으나 잡을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알기에 응원을 건넸다. 워낙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김대리의 희망퇴직 신청서 앞에서도 서 부장은 애써 침착하려 노력하였다. 직장에서 만난 인연은 결국 그때뿐인 것을 익히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음에도 서 부장은 겉보기와 달리 많이 여린 사람이었다. 운영부 부장이라는 직은 어찌 보면 잔인하면서도, 또 어떤 면에서는 강해야만 하는 직임을 그럴 때면 여실히 느끼게 되었다.
'후.. 이제 주 과장인가.. 예상은 했잖아..'
그런 저런 지난 일들을 생각하며 희망퇴직 면담 희망자 리스트가 담겨있는 무심한 모니터를 향해 시선을 두던 서 부장에게 설 팀장이 다가온 건 그때였다.
"어제 보낸 카톡 봤지?"
"네 팀장님, 어쩌시게요 주 과장?"
"뭘 어째. 일단 모른 척 뭉게 봐야지"
‘그럼 그렇지.. 설 팀장..
“나는 아무 생각을 안 할 거야.
왜냐하면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이지”라고 웃으며 술자리에서 참 당당히도 말하는 당신에게 생각이 있으면.. 그게 이상한 거겠지.’
서 부장은 예상했다는 듯 생각했다.
"아니.. 팀장님, 지금 팀장님 3팀에서만 두 달 새 3명의 퇴사자가 나왔습니다. 심지어 그 셋 모두 희망퇴직 명단에도 들지 않는, 오히려 회사 핵심인재풀에 등록되어있어 회사차원에서 지원되고 있었던 직원들이었던 거. 저보다 더 잘 아시잖아요?"
"아니. 그럼 어쩌나. 본인들이 나가겠다는데.
내가 나가라 했나?
일단 좀 기다려봐. 내가 최대한 시간 끌어볼 테니까"
"아니 팀장님, 이건 시간을 끌고 그럴게 아니고 요구사항을 들어보고..."
"됐어. 서 부장은 일단 모른 척하고 있어.
혹시 주 과장이 인사팀 면담 희망하면 알아서 피해 다니라 해. 괜히 일 만들지 말고."
'하.. 역시는 역시다... 그 클라스 어디 가나. 후'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