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앉지.", "앉을까요?"
변 회장이 말했다. 동시에 주 과장도 말했다.
이 순간을 얼마나 꿈꿨던가.
그리고 그 순간이 오면 얼마나 심장이 떨릴까 상상했던가. 고민했던가.
하지만 막상 그 순간을 맞닥뜨리니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지는 게 참 이상했다.
주 과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봐"
"설 팀장이 며칠 전 저에게 CEO직을 제안했습니다. 화물 총괄본부를 만들어 그 자리를 저에게 제안하더라고요. 알고 계셨습니까?"
'설 팀장 이 새끼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 하마터면 욕설이 나올 뻔한걸 간신히 참으며 변 회장이 말했다.
"처음 듣네. 설 팀장은 자네 승진시키자고 말한 게 다네."
'결국 설 팀장의 농간이 맞았네. 중간에서 무슨 수작을 부리려 했던 거야 대체'
아인은 사표를 던졌던 그날처럼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화가 나서였던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아직까지도 그때의 그 감정이 어떤 것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아 한 가지 더, 자네가 사표 던졌다는 것도 들었네, 그리고.."
여기서 변 회장의 눈빛이 약간 흔들렸던 것 같다. 하지만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차장이든, 부장이든, 자네가 원하는 걸 말한다면 나도 한번 고려해보겠네."
하지만 변 회장의 말에선 어쩌면 그 순간 가장 중요한 오늘 아침, 그러니까 방금 전 알게 되었다는 말이 빠졌고,
이것은 아인에게 변 회장이 본인의 사직 의사를 진작에 알고 있었음에도 그동안 설 팀장을 시켜 시간 끌기를 했다는 오해를 남겼고, 원하는 것을 말해보라는 말투에서는 CEO는 절대 해줄 생각이 없다는 알 수 없는 위압감을 남겼다.
그랬다. 바로 1년 전 과장으로 승진한, 그때만 해도 대리였던 아인에게, 이렇게 짧은 시간에 차장, 부장의 자리까지 승진시켜준다는 제안도 회장으로서는 아인을 아끼는 마음에서 파격적으로 제안했던 것이었다. 자식 같은 아인의 첫 모습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고 그리고 그래서 그만큼 아낀 직원이었기에.
하지만 이미 CEO가 되어 본인의 팀을 꾸려 이 침몰해가는 회사를 구해 올리겠다는 야망의 끝까지 갔던 아인을 만족시킬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리고 이런 야망을 전혀 알지도, 알아볼 시간도 없었던 변 회장으로서는 아인의 그러한 기대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대화가 이어지는 이 둘 사이에 빠진 게 뭘까?
왜 둘은 좁혀지지 못하는 접점의 끝에서 서로를 노려보고만 있게 된 걸까?
설 팀장.
그 사이에는 설 팀장이 빠져있었다.
그리고 설 팀장의 생각을 그때의 그 둘이 알리가 없었다. 그의 계획은 단순했다.
사표를 낸 주 과장의 평소 성향을 잘 알고 있는 설 팀장은 주 과장에게 CEO라는 회사의 고위직 미끼를 던져 그의 야망을 건드리고, 그렇게 일단 퇴사 시기를 최대한 늦춘다. CEO 제안은 당연히 회장이나 임원진에 할 순 없고, 차장이나 부장 정도 제안해보고 올려주면 사표도 막고, 안돼도 후임자 찾을 시간은 벌 수 있겠지. 그리고 회장도 주 과장을 그렇게 대놓고 아끼니까 차장 정도는 해주지 않을까? 그래 늘 그렇듯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지극히 설 팀장스러운 단순한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때 마주 앉은 주 과장과 변 회장은 이것을 알리 없었고,
그렇게 오해로 가득한 상황만 회의실을 가득 채웠을 뿐이었다.
때로는 아무 의미도 없을 것 같았던 사람 때문에 잘 될 수 있었을 일도 한순간에 무너진다.
그 단 한 사람 때문에.
'내가 사표 낸 것도 알고 있었어!! 그리고 뭐? 차장? 부장? CEO 해준다며!! 설 팀장이랑 다를 게 뭔가? 아니 오히려 설 팀장이랑 짜고 어떻게든 날 최대한 오랫동안 이용해먹으려 한 거잖아! 후.. 그래.. 결국 회사 사람.. 아니 회사 주인이라 이거지? 그동안 회장은 그래도 다를 거라 믿었는데 결국 설 팀장이나 변 회장이나!! 결국 직장생활에서 만난 관계는 어쩔 수 없네 어쩔 수 없어!'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오해가 아인을 둘러쌌다.
'승진 원한다면 차장, 부장 정도 달아주고 일단 잡아야지. 그 정도면 되겠지. 주 과장을 아끼긴 하지만.. CEO? CEO는 뭔 놈에 CEO. 이 놈은 설마 설 팀장 그놈의 그 제안을 기대한 건가? 그렇다면 너무 건방진데 이거. 회사 어려운 거 빤히 알면서.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설마.. 아니겠지. 일단 잘 구슬려보자. 대화가 안 통하는 놈은 아니니까. 설 팀장 불러다 바로 알아봐야겠어.'
변 회장의 오해도 지지 않겠다는 듯 둘 사이에 맴돌았다.
팽팽한 오해의 정적을 깬 건 변 회장이었다.
"그래, 그래서 원하는 게 뭔가? 말해보지."
그 말이 나온 짧은 시간에 아인의 머릿속엔 엄청나게 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CEO를 던져봐? 아니면 회장 말대로 차장, 부장 정도로 만족할까? 내 나이에 그 직급도 대단하긴 하잖아?'
그 짧은 순간에도 참 약삭빠르게 본인에게 조금이라도 유리한 방향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 아인이었다.
우리 직장인은 상급자의 말 한마디에 동물적 본능으로 본인의 살 길을 찾는다.
그 상급자가 회사 최고책임자라면?
두말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아인의 입 밖에서 나온 말은 예상 밖이었다.
"일단.. 알겠습니다. 고민해보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응? 뭐지.. 이 싱거운 놈은? 뭐라도 지를 것처럼 들어오더니만.. 이게 끝?
그래도 어쨌든 내 생각은 잘 알아들은 모양이군.. 차장이든 부장이든 그 정도 해주면 되겠지..'
변 회장은 본인의 생각을 아인이 이해해준 것 같아 내심 만족스러웠다.
아인도 원하는 것을 말하기는커녕, 왜 갑자기 그 순간 마음이 그렇게나 쉽게 차갑게 식고, 원하는 것을 더 요구하지 못하고, 그저 저 묵직해 보이지만 한없이 가벼웠던 회장실 문을 박차고 나가고 싶은 생각만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다시.. 문이 닫혔다.
조금은 허무하고 너무도 허망하게.
그 문을 나와 문 앞에 기대 선 아인은 하마터면 주저 않을 뻔했다.
누구나 천국에 가고 싶어 하지만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 그때 이 말이 생각났는지, 그때의 아인은 알지 못했다. 손이 아직도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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