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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양c Jun 13. 2022

Ep24. 회사에 퇴사 후에도 도움을 주겠다 해보라니

말이야똥이야방구야뭐야


"아니지 아니지, 거기서 오 차장은 나올 수가 없어. 그는 이미 퇴사해서 딴 데 다니고 있었다니까."

너무나 신나게 들떠 얘기하는 예소의 이야기를 아인이 끊었다.


"아-한참 재밌었는데 왜 끊어!! 답답해서 그래 답답해서. 부들부들 떨리는 손 부여잡고 그냥 그렇게 얌전히 퇴사하는 것보다 이렇게 속 시원하게 한방 먹여주고 나왔어야지. 어휴 답답하다 답답해."


끄덕끄덕. 공감한다는  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렇게 회장실 문에 기대어 부들거리는 손을 애써 감추고, 앞서 예소의 초록빛 바램과는 달리 아인은 그저 쓸쓸한 걸음으로 다시 흔한 동료들의 궁금해하는 모니터 뒤편 눈동자들을 지나,

뭐라도 알려주길 대놓고 기대하는 설 팀장의 눈초리를 살포시 즈려밟고 그저 묵묵히 본인의 자리에 앉아 다시 열심히 일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무심히 손가락을 키보드 위에 올렸다.

결심이 섰기 때문이었을까?

아인의 손가락은  이상 떨리지 않았다.  

그렇게 키보드 위에 아인의 손가락은 별 일 아니라는 듯 초록창에 검색을 시작했다.




'예의와 친철함을 둘 다.., 긍정적인 어조를..,

회사에 고마움을.., 퇴사 후에도 도움을 주겠다는 제의를..'


'하-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돼? 이게 맞아?

입사도 힘들었는데, 퇴사는 더 힘드네..'

퇴사도 내 맘대로 하면 안된다고 마지막까지 명령해대는 사회라는 큰 벽 앞에 무력감이 밀려왔다.



‘음.. 예의를 갖춘 궁서체로 바꾸고.. 사직서 글자는 잘 보이게 굵게 처리하고.. 이 정도면 된 것 같다.

너무 자주 써본 거라 어렵지도 않네. 다행이라 해야 하나..’ 사직서를 작성하는 순간에도 누가 이걸 쓰고 있는 내 모니터를 엿볼까 마음이 쫄려 왔다.

아이러니다.

일하라고  컴퓨터에다  못해 먹겠다고 사표를 쓰고 있는 중이라니. 나이스 한걸?


어떻게 하루가 흘러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평소보다 조금 더 빨리 하루가 간 것 같다는 느낌과 그렇게  모니터 오른쪽 아래 시계가 18:00으로 땡 바뀌는 순간이 보였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마침 아무도 없는 회장실 문을 다시 열고,

빨간색 글씨는커녕, 검은색 레이저로 차갑게 출력된 사. 직. 서. 가 적힌 세 글자의 봉투를 가지런히, 최대한 정중하게 회장실 책상 위에 올려두고 돌아 나왔다.  그렇게 긴 시간, 누구보다 치열하게 겪은 퇴사 과정이 끝이 났다.



현실은 그런 것 아닐까?

그날 아인이라고 해서 예소가 했던 초록빛 이야기처럼 다 때려 부수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우리 보통의 직장 어른이들은 그 순간에도 칠흑의 잿빛 현실을 떠올리게 된다.

그렇게 깽판 치고 나가는 순간, 아니 때려 부수는 그 순간에도 마음 한편에선 즉각적으로, 그리고 자동적으로 이후의 뒷날을 고민하고, 걱정하기 시작한다.

현실은.. 현실이다.


어쨌든 그렇게 퇴사를 해도 아인은 다른 회사에 이력서를 내밀 테고, 그 회사도 결국 이 업계에 떠도는 곳 중 하나일 테고, 이 망할 회사로 아인의 직장생활에 대한 레퍼런스가 들어올 테고. 그럼  개망나니에 검은 머리 짐승이라 평하겠지. 이런 걱정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마치 자연스러운 프로세스로 앞으로 먹고 살 걱정을 본능적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직장생활을 오래 한 장기근속자일수록, 그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게 되어있다.


아인이라고 뭐 달랐을까.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아인의 마음속엔 무력감과 포기, 피로감만 남았다.

본인을 그렇게 대놓고 아꼈던 회장도, 결국엔 회사 사람이었다, 설 팀장과 다를 바 없는.

요즘 말로 결국 뒤에서 조종한 궁극의 빌런 같은 거.

분명 같은 사람이지만, 누군가에겐 한없이 좋은 사람이 될 수도, 누군가에겐 최악의 빌런일 수 있는 거다.

그렇게 대화를 이어갈수록, 설 팀장이랑 전혀 다를 바 없는 그래서 더 이상 이곳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겠다는 생각만 남았다.

회장은 뭐라도 원하는 요구사항을 말해주길 원하는 눈치였지만, 더 이상 이 회사에 아무것도 기대할 것도, 하고 싶은 힘도 없었다. 더 말할 게 없다.

그래,  익숙한 피로감.


회장의 책상 위 사직서를 뒤로 하고 아인은 홀가분한 발걸음으로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처음 설 팀장에게 던졌던 사표의 그때와 달리 그날 그 버스에서의 아인의 손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화도,

슬픔도,

아무것도 더이상 아인의 마음속에 남아있지 않았다.





계속?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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