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의 내 엄마] 노모와 용문사 나들이... 천 년이 지나도 끄떡없는
[팔순의 내 엄마] 노모와 용문사 나들이... 천 년이 지나도 끄떡없는 은행나무처럼
“그 절 있는데 놀이동산을 아주 잘 만들어 놨다는데. 나물도 싸게 팔고…. 거기 갔다 온 사람들이 다들 너무 좋다고 그러더라.”
“그래요? 놀이동산 있다는 얘기 못 들었는데. 새로 생겼나? 우리도 한번 가볼까?”
엄마와 이런 얘기를 주고받은 것은 올봄이었다. 온 천지에 봄 내음이 가득하고 다래며, 냉이며 봄나물이 막 나오기 시작할 무렵 봄이 가기 전에 용문사를 갔다 오자고 약속해놓고 사느라고 바빠 그 봄을 맥없이 훌쩍 흘려보냈던 것이다.
“엄마 뭐하셔?”
“오늘 고추 튀김 할 거 정리하고 있는데, 왜?”
“언제쯤 끝나는데? 끝나고 용문사 가서 점심이나 먹고 올까?”
“그래도 좋지 뭐.”
아, 엄마 가고 싶구나. 이젠 엄마 목소리 톤만 들어도 엄마의 마음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다. 엄마는 대체로 의사표시를 정확하게 하지 않는다. 특히 당신이 뭘 하고 싶거나, 어딜 가고 싶을 때는 에둘러 표현하는 경우가 많아 엄마의 진의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목소리톤이며 얼굴 표정이며를 잘 살펴야 한다. 먹고살기 바쁜 자식들한테 무엇을 요구하는 것이 미안해서일 테다. 대체로 엄마의 ‘가면 좋지’, ‘사람들이 그렇게 좋대더라’, ‘너 가고 싶으면 가자’라는 말들은 모두 가고 싶다는 얘기다. 또 평소와 달리 사근사근한 말투로 '너 오늘 뭐해?'라고 묻는다면 그날은 엄마에게 차가 필요하거나 우리의 동행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럼 한 시쯤 출발해서 이른 저녁 먹고 오자.”
경기도 양평군에 있는 용문사는 신라 선덕왕(981년)에 대경국사가 지은 절이다. 일설에는 649년 원효대사가 지었다고도 한다. 경내에는 동양권에서 제일 큰 은행나무가 자라고 있다. 가을이면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를 보려고들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든다. 우리 가족도 몇 번을 다녀왔던 곳이라 가족 여행의 추억이 어려 있는 절이다.
평일 낮인데도 주차장은 이미 차로 가득했고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주변에 놀이동산은 없었다.
“엄마 놀이동산은 없는데, 절이나 올라갔다 오자.”
“절은 몇 번이나 갔었는데…” 엄마가 쉽게 놀이동산을 접을 것 같지 않았다.
“엄마 그 놀이동산이 빙글빙글 돌고 하는 놀이기구 타는 데 말하는 거 맞아?”
“그래, 그렇다더라.”
우리는 관광 안내소에서 물어보기로 했다. (그래야 엄마가 깨끗하게 포기할 것 같았다). 그런데 나보다 엄마가 앞서 가서 ‘여기 놀이동산이 있다던데요?’ 하고 묻는다. “아 네, 옛날엔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요. 그냥 공원으로 꾸며 놨어요.”라는 직원의 말을 듣고서야 겨우 포기하는 눈치였다.
“근데 절까지 꽤 걸어야 하는데 엄마 절까지 올라갈 수 있겠어? 셔틀버스도 안 다니는데, 어쩌지?”
그때 마침 절에서 노인들을 태우고 내려온 카트가 우리 앞에 멈춰 섰다. 얼른 다가가서 엄마가 다리가 아프신데 올라갈 때 태워줄 수 있는지 물었다.
“이분들은 장애인들이에요. 여긴 다리 아픈 노인분들이 너무 많으세요. 한 분 태워드리면 다른 분들도 태워달라고 해서 감당이 안돼요. 절에서 운영하는 셔틀버스가 있으니까 한번 알아보세요.”
하고는 쌩하고 가 버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정말 연로하신 분들이 많긴 했다. 양평역까지 전철이 다니고부터 노인분들의 나들이가 부쩍 많아졌다고 한다. 셔틀버스가 언제 올 지 몰라 우리는 천천히 걸어 올라가기로 했다.
“그래 엄마, 갈 수 있는 데까지만 가요.”
진하게 물든 단풍으로 산속이 온통 알록달록하다. 용문사 들머리 길 초입에는 공원 의병 기념비, 포토존, 농업박물관 등 예전에는 없던 것들이 많이 생겨나서 마치 처음 오는 곳 같았다.
“우리 용문사 마지막으로 온 게 언제지?”
“10년도 더 되지 않았니?”
“아버지랑 같이 온 게 마지막이었지, 그러니까 10년이 넘었네”
“맞다 엄마. 그 해는 단풍이 참 안 이쁘게 들었었잖아. 나뭇잎도 다 말라비틀어지고 은행나무도 병들어서 별로였고.”
우리는 그렇게 옛날 얘길 하면서 계곡길을 올랐다. 용문사 계곡의 단풍은 절정은 살짝 지났지만 무척이나 화려하고 강렬했다. 불긋불긋, 노릿노릿 온갖 단풍나무가 다 서 있는 듯했다. 사람들의 감탄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엄마도 어느새 단풍에 빠져서 놀이동산은 싹 잊으신 듯했다.
그때 승합차 한 대가 멈춰 서더니 엄마를 태워주시겠단다. 엄마가 얼마나 좋아하시던지. 반도 안 올랐는데 엄마 다리는 벌써부터 꽤나 아팠었나 보다. 엄마는 오십 대 까지도 매주 주말이면 아버지와 함께 등산을 다니셨다. 두 분 얘기를 듣고 있으면 엄마가 아버지보다 훨씬 더 산을 잘 타는 것 같더랬다. 설악산, 지리산, 한라산까지도 거뜬히 다녀오곤 했다. 조금 더 나이가 드셔서는 동네 아주머니들하고 산으로 들로 나물이며 도토리를 주으러 다니느라 봄, 가을로 무척 바빴었다. 그런데 이제는 절 들머리 걷는 것조차 힘들어한다.
‘엄마가 이제 많이 늙으셨네.’ 그런 엄마가 안타깝고 속이 상한다. 그런데 ‘엄마의 늙음’에 대해 우리와 엄마가 느끼는 감정은 결이 사뭇 다르다. 자식들은 늙은 엄마를 안타까워 하지만 본인은 예전 같지 않은 자신을 한심해하고 창피해하는 것 같다.
“이제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얼마나 한심스럽냐?”
“뭐가 한심해? 다른 사람들도 다 늙어가는데.”
전에는 엄마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토를 달았지만 요즘은 엄마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나도 요즘 눈도 잘 안 보이고 기억력도 떨어지니까 꼭 누가 나를 흉보는 것만 같고 혹여 그런 나를 남에게 들킬까 봐 노심초사한다. 예전 같지 않음이 창피하고 괜스레 의기소침해진다. 엄마도 그런 마음이 아닐까.
엄마는 절에 가면 언제나 대웅전 앞마당에 있는 석탑에 절을 올린다. 불자도 아니면서 한 번도 빼먹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는 아픈 다리를 비척비척 끌고 대웅전으로 간다. 법당으로 올라가 불전함에 다만 얼마라도 보시를 하고 절을 올린다.
엄마, 오늘은 뭐 빌었어?”
“엄마야 늘 똑같지. 니들 아프지 말고 잘되게 해 달라고 빌었지.”
엄마의 말을 듣는데 명치끝이 싸르르 저려온다. 잘 걷지도 못하면서 자식들 잘 되라고 기도하겠다고 다리를 끌고 법당으로 올라가서 앉았다 구부렸다 몇 번이고 절을 올린다. ‘자식들이 뭐라고…’
용문사 은행나무는 한창 절정이었다. 이번처럼 노랗게 물이 잘 든 것은 처음 봤다. 정말 장관이다. 천연기념물 30호인 은행나무의 수령은 자그마치 1000-1100년이나 되고 높이는 39m에 이른다.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으니 뿌리가 내려 은행나무가 되었다는 설과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나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심었다는 설 등이 전한다. 이 은행나무는 불이 나도 타지 않아서 ‘천왕목’이라 불리고, 나라에 큰 위기가 닥치면 큰 소리를 내는데, 6.25 전쟁이 났을 때와 때 5.16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도 이상한 소리를 냈다고 한다.
은행나무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렌즈 안에서 엄마의 얼굴이 활짝 웃고 있다. 꼽은 손으로 하트도 만든다. 아,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엄마는 오늘 유난히도 즐거워하셨다. 먼저 다원에서 차도 마시자하고 밥값도 엄마가 내겠다고 한다.
“늙은 엄마 '데꾸' 다녀줘서 고맙다”
엄마는 자꾸 고맙단다. 하지만 난 그 말이 싫다. 난 그냥 당연한 일을 하고 있을 뿐인데.
“우리 어렸을 땐 엄마가 우리 다 데리고 다녔잖아. 왜 자꾸 고맙대?”
“그때는 진짜 힘들었지. 새벽부터 김밥 싸랴, 니들 챙기랴, 말도 마라. 그래도 그때가 제일 행복했어…”
‘엄마, 사람은 다 늙어. 그러니 창피해하지 말아요. 1000년이 넘은 은행나무도 저렇게 끄떡없잖아.’
<2019.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