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인저] 낯선사람, 어쩌면 여행에서 최고로 좋은 일
싱가포르 가이드북 취재를 했을 때였다.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쳇 셍 황 하드웨어'라는 이름의 카페인데, 오래된 동네 철물점이었던 건물을 개조해 카페로 만든 곳이었다. 성수동이나 문래동처럼 2014년의 싱가포르도 투박한 공장지역에서 로컬문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카페를 훑어본 뒤 건물 2층에 있다는 작은 편집숍을 구경하러 올라갔는데 문이 잠겨 있었다. 유리문으로 보이는 실내를 한참 쳐다보다 계단을 내려와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하던 참이었다.
"나한테 열쇠 있어."
나한테 하는 말인가 하고 쳐다봤다.
"올라가려고 했던 거 맞지?"
그녀는 내 대답도 제대로 듣지 않고, 성큼성큼 앞장 서 계단을 올라갔다. 정말로 열쇠를 갖고 있었고, 문을 열어주었다. 그곳에서 일한다고 했다. 나는 떠밀리듯 가게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막상 문까지 열어주니 아무도 없는 좁은 가게에서 열심히 구경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어디서 왔어?"
"한국"
"혼자?"
"응"
"왜?"
"가이드북을 쓰고 있어."
"아 정말?"
질문은 주로 그쪽에서 했다. 이름은 네티라고 했다. 짧은 머리에 검게 탄 피부, 양 팔에는 여러 개의 문신이 낙서처럼 그려져 있었다. 아무렇게나 책상 위에 걸터 앉고, 툭툭 말을 내뱉는 네티는 마치 소년 같았다.
"이번 주말에 재밌는 행사가 있는데 올래?"
네티는 핸드폰에 있는 포스터를 내밀었다. 로컬피플이라는 팀에서 주최하는 플리마켓이었다. 많은 로컬 벤더들이 참가할 거고 무척 '쿨'하고 재밌을 거라며 꼭 오라고. 원래 눈 인사 정도는 하고 지냈던 동네 사람에게 말을 걸듯 거침없이 대화를 하는 네티 덕분에 얼떨결에 전화번호를 주고 받고 헤어졌다.
몇 시간 뒤, 카페가 있던 동네에서 좀 떨어진 마리나베이 근처를 돌아다니고 있는데 네티에게 연락이 왔다.
"어디야?"
"마리나베이"
"나랑 친구들이 같이 하는 공방이 있는데, 여기로 올래?"
아까 낮에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계속 다짜고짜였다. 나는 네티의 다짜고짜식 대화에 자연스럽게 휘말리며 한 시간 뒤 하지래인 근처에 있는 공방에 가 있었다. 'Maketh'라는 작은 간판이 붙은 가죽공방은 네티와 그녀의 여동생, 그리고 그들의 오래된 동네친구들이 함께 운영하는 곳이었다. 그날 밤 이후, 나는 싱가포르에 있는 두 달 동안 네티와 네티의 가족들, 그리고 그녀의 친구들과 함께 아주 많은 시간을 보냈다. 싱가포르 가이드북은 망했지만, 내 여행은 그 반대였다.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에게 여행지를 추천하거나, 어느 맛집에 들어가 뭘 시키라거나, 어떤 숍에서 어떤 물건을 사야 싸게 사는 건지에 대한 충고를 해준적이 많지 않다. 여행을 떠나라는 말도 잘 하지 않는다. 여태 떠나지 않은 사람은 그냥 여행이 싫은 건데, 좋아하는 일만 가능한 많이 오래 하다 죽자는 게 신념인 내가 그럴 순 없다. 다만 함께 갈 사람이 없어 주저하는 사람에게는 말한다.
지금 당장 떠나라고. 혹시 같이 갈 사람이 생기기 전에 어서 빨리 떠나야한다고.
그렇게 훌훌 털어버리고 혼자 떠나면, 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리고 그건 너무나 좋은 일이다. 여행의 모든 좋은 순간을 통틀어 어쩌면 최고로 좋은 일이다.
물론 조심해야 할 순간들도 있다.
로마에 갔을 때였다. 비행으로 갔던 짧은 여행이었고, 다른 크루들은 로마를 여러 번 왔었다고 하기에 혼자 시내로 나왔다. 벤치에 앉아 지도를 보고 있는데 젊은 학생들이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혼자 여행을 온 거냐며, 근처에 있는 대학에 다니는데 마침 지금이 공강이라 동네를 구경시켜 주고 싶다면 호의를 베풀었다.
그들이 데려간 곳은 포로 로마노가 내려다 보이는 팔라티노 언덕이었다. 굳이 현지 대학생이 데려다주지 않아도 갈 수 있는 광화문 같은 곳이었다. 푸른 잔디밭이 펼쳐진 언덕에 잠시 앉아 있으라더니 잠시 뒤 그 중 한 학생이 싸구려 와인 하나를 가져와 내밀며 돈을 달라고 했다.
승무원에게 자주 하는 안전교육 중 하나는 해외 체류 중 타인이 주는 뚜껑이 열린 음료는 절대 먹지 말라는 내용이다. 물론 나는 와인을 마시지도 않았고, 그는 음료에 약품을 탈 만큼 큰 투자를 하는 범죄자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이렇게 어처구니 없고, 황당한 방법으로 하루에 몇 번, 몇 유로 정도를 뜯어내는 잔챙이였다.
있는 돈을 다 주고 도망쳐야 하나, 적당한 가격으로 딜이라도 해야 하나 잠깐 고민을 하다 생각해보니 어차피 주머니에 현금 자체가 거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동전 몇 개와 꾸깃한 지폐 몇 장 정도를 준 뒤, 짧게 그들을 노려보곤 (무서워) 자리를 떴다.
나이를 먹고, 두려울 것도 많이 사라진 지금 그때를 떠올리면 그 자식의 코를 주먹으로 한 대 날리거나, 와인병을 바닥에 던져버리고 왔어야 했다 싶지만 그땐 어렸고, 혼자였고 외국인이라 불리했다. 그래도 대단히 큰 일이 아니었고 나는 무사했다. 기분은 좀 상했지만 다행히 그 뒤의 로마 여행은 나쁘지 않았다.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고 있으니 언제든 찾아오라고 했었던 런던에서 만난 할아버지도 생각난다. (물론 할아버지가 사주신 음료수도 나는 마시지 않았다. 뚜껑이 열려 있었다.) 방콕 마사지숍에서 옆 자리에 앉아 발 마시지를 받던 일본 동갑내기와도 좋은 친구가 되었고 뉴욕 타임스퀘어에서 어리버리하게 서 있던 나를 사진도 찍어주고 맛있는 맥주까지 사줬던 커리우먼도, 싱가포르의 역사를 알려주고 싶다며 두 시간 넘게 올드시티를 투어 해준 미래의 가이드를 꿈꾼다던 싱가포르 펀드매니저 아저씨도 모두 따뜻했고, 신비롭다.
잘 생각해면 좋았던 여행은 기대했던 풍경이나 도시의 유명세 때문이 아니었다. 여행의 성패를 좌우하는 건 함께 한 사람이었던 적이 훨씬 많다. 그러니까 그 도시가 좋았는지, 그 나라가 어땠는지 물어보는 건 그리 현명한 일이 아니다. 여행이 어땠는지 대답해주는 사람이 겪은 도시의 인상에는 사실 다른 많은 기억들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일정 내내 비바람이 몰아치고, 가는 곳마다 문을 닫았어도 좋은 사람과 함께였거나, 즐거운 인연을 만났다면 그 여행은, 그 도시는 전혀 다르게 기억된다.
이제 새로울 게 없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여행을 떠나야 하는 이유가 사라질 때도 있다. 그래도 용기를 내 떠나면 만나는 신비로운 인연을 위해 우리의 여행은 계속되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