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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ul Apr 04. 2024

뭣같은 인생임에도 좋은 사람들 덕에,

직박구리가 운다고 메일을 주시다니요,

昨日、家の前で직박구리 (ヒヨドリ)が鳴いていて、去年00さんと教室の前のヒヨドリの名前が分からなくて調べたことを思い出しました。 教室で授業できるというのも、今思えば本当に幸せなことだったのですね。
어제, 집 앞에서 삐약삐약 울어가던 직박구리를 보고 작년 00씨와 교실 앞의 직박구리의 이름을 모르겠다고 조사했던 일을 떠올렸어요.
교실에서 수업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행복한 일이었죠.


이 이야기는 봄날에 유명한 소설, <직박구리가 운다고 메일을 주시다니요> 도입부이다. 주인공이 예전 교수님에게 한 메일을 받는 것으로 시작하는 서스펜스로 뻥이다.


왼쪽) 여러분/ 오른쪽) 머쓱한 나

ㅎㅎㅈㅅ


내가 대학 졸업 후 맞은 두 번째 봄, 즉 이맘때쯤에 한 일본어 교양 교수님께 받은 메일이다.


뜬금없는 이 메일로 나는 생각보다 '사람이 사람에게 주는 영향이 허접하면서도 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필수 교양으로 일본어 수업을 들었을 때(코로나 전) 강의실 바깥에서 새가 울고 있었다. 수업 쉬는 시간에 그 교수님은 그 새를 한국 와서 처음 본다며 궁금해하셨고 나는 직박구리라고 알려줬다. 찾아보니까 원래 산에 사는 녀석인데 요즘 산을 부수고 개발하니까 도시까지 내려오는 듯하다고. 교수님은 그 사연(?)을 듣고 안타까워하셨고 나는 ‘일본 여성 지식인들은 감성적인 면이 있군’하고 귀엽다고 (감히) 생각했다.

후후 큐트데스네 센세

그렇지만 직박구리 때문에 생각나는 수많은 학생 중 하나가 되다니 제법 기쁘고 몽글한 마음이다.

대뜸 꽃을 받아보십시오.

사람들은 의외로 큰 일에 영향을 안 받기도 하고 사소한 일로 인생이 변하기도 한다. 서로에게 주는 영향을 무시할 순 없음을 깨달았다.



사회에 나오자 어른이니 선배이니 하는 사람 중 질이 나빠서 잘 못 걸린 사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신기하게 힘이 되었던 것은 직박구리 같은 기억이었다. 교수님 덕분에 나는 봄에 또 직박구리를 생각하며 힘든 일이 있어도 ‘에고 시이벌 가보자’ 하는 사람이 되었다.

어이씨 반드시 해낸다~

나는 의외로 교수님들이나 선생님들에게 격려를 받는 학생이었다. 그저 남은 자리가 있어서 들어갔던 컴퓨터 공학 전공 교수님의 한마디도 나를 살렸다. 교양 수업일뿐이었고 나의 점수는 처참했다. 시험지를 받으러 연구실로 가서 머쓱하게 웃으며 b0를 겨우 새겨진 점수판을 주시며 교수님은 딱 한마다를 하곤 나를 보냈다.


“자네는 잘 될 거야.”


그리고 한쪽 눈 시력을 잃으셔서 다음 학기에 은퇴하셨다. 그 교수님을 뵐 일은 없었다.



전 직장에서 내 기를 죽이고 싶어서 안달 난 리더가 “네가 잘한다고 생각해? 너는 회사 다니면서 앞으로도 잘할 수 없고 네가 성장하는 모습은 상상도 안돼”라며 지껄일 때도 속으로 뻐큐를 날릴 수 있었다. 

교수님 저는 기죽이는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응 자기소개 잘 들었고. 난 무려 교수! 가 잘된다고 해준 사람이거든, 어중이떠중아.


그래서 나는 사람들과 만나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서로 어떻게든 영향을 주고받고 그 과정이 누군가를 죽이거나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영향만 줄 수는 없으며 모든 관계에 책임을 질 순 없다. 결국 본인이 살아가기 때문에. 호의가 안 좋게 다가갈 수도 있으며 그냥 지나가는데 뒤에서 칼을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전의 모든 영향들이 나를 이루고 있고 그 사람이 실제로 좋은 사람이었건 아니건 내게 남긴 힘들이 나를 일으켜준다.


이건 여전히 내가 두 자릿수 뺄셈을 하는 방법이다. 


나이 들고 나선 대부분 계산기나 암산을 쓰긴 하지만. 이 방법이 특이한 건 아닌데 나는 좀 특이하게 배웠다. 이 사칙연산의 기본을 알려준 것은 우리 어머니나 아버지도 아니고 훌륭한 초등학교 선생님도 아니다. 우연히 지나가던 아저씨였다.


뉘신진 모르겠지만.

아저씨 뭐여.


우리 엄마는 교사를 그만둔 후 끊임없이 일을 했는데 내가 어릴 때는 책방을 운영했다. 할거 없는 어린이는 학교나 유치원이 끝나면 엄마 책방에서 작은 책상에 앉아 숙제를 하곤 했다. 퇴마록이었나 흔한 판타지 소설을 반납하던 한 아저씨는 내가 뺄셈을 못하고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엄마가 계산을 하는 동안 이 방법을 알려줬다. 그리고 한두 문제를 풀리거나 곧잘 따라 한다며 그냥 가버렸다. 체감상 그 시간은 5분도 걸리지 않았고 어느 이야기에 나오듯이 웃어줬다거나, 머리를 쓰다듬거나, 모를 수 있다며 위로를 하거나 하지 않았다. 진짜 무슨 유튜브에서 필요한 부분만 시청하는 것처럼 알려주고 가버렸다. 

아저씨 아직 세상에 계시죠? 저는 여전히 수기로 두 자릿수 뺄셈을 하는 공학 전공자(그리고 전공 버리고 취직 중인)가 되었습니다.


누군가에게 멋진 사람으로 보이거나 영향을 주려고 안달 난 사람은 멋이 없다. 멋있는 사람은 무심하게 툭 던져서 누군가를 구하곤 한다. 뺄셈 아저씨처럼, 직박구리를 떠올린 교수님처럼, 한쪽 안대를 한 채 궁예 같다고 농담하며 잘 될 거라고 이야기하던 교수님처럼. 자기가 재밌다는 핑계로 우울증에 빠져 문 앞에 나오지 않던 내게 2년 동안 편지와 과자를 보내준, 그리고 이제 연락하지 않는 친구 A처럼. 질 나쁜 새끼들에게 에너지와 시간을 쓰기엔 아까울 정도로 많은 무심한 사람들. 그들은 이제 내 이름조차 기억하지 않을테고 나 또한 그렇다. 그렇기에 또 새로 만날 사람들을 기대하며 봄바람에 센치해지곤 한다.















저는 사칙연산 중 덧셈과 뺄셈을 남들과는 조금 다르게 합니다. 남들은 암산으로 하는데 저는 잘 못해요. 대충 이렇게 하는데 다들 그러신가요? 제 평생 갈 이 사칙연산은 어머니 아버지나 멋진 선생님이 알려주신게 아닙니다. 지나가던 아저씨가 알려준 거였어요.

저희 어머니는 일을 쉬지 않았습니다. 늘 자영업으로 무언가를 일궈내엇꼬 서점을 그 중 오래 하셨습니다. 할일없는 저는 학교가 끝나면 늘 책방으로 가서 엄마 옆에서 숙제를 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빼기가 안되더라구요. 대충 판타지 소설을 반납하던 한 아저씨는(지금 생각하니 내 또래...아니고 ㄹㅇ 50대 넘은 아자씨였음) 저를 보더니 웃었습니다. 빼기가 어렵지? 이렇게 해봐. 한두문제를 풀려주더니 그냥 잘한다며 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저는 그렇게 뺄셈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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