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건 친구 생활백서 EP 15: 어디까지 왔나
비나와 나는 여전히 주기적으로 보는 친구이다. 쥬진과 함께 결성한 "파워퍼프걸즈"그룹은 서로의 자존감이 떨어지지 않도록 응원과 칭찬을 아끼지 않는 귀여운 모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포스팅이 점점 뜸하지는 건, 아마도 내가 비나와의 우정에서 '비건'에 점점 더 포커스를 잃어가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그가 비건임을 신경 쓰지 않는다기 보다는 이제 익숙해져서, 대부분의 순간들에 나도 자연스럽게 Vegan-friendly한 옵션의 선택들을 최소한 포함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놀라움의 연속이었던 우리의 우정 초반과는 꽤 다른, 고수까지는 아니지만 중수정도는 된 자세를 갖췄다고 말하고 싶다. 그처럼 비건과 함께하는 삶은 익숙해져 보니 또 아주 어렵지도 않다.
최근에 '또' 한국에 다녀왔다. 한국에 사는 친구들이 이 정도면 독일이 아니라 남해 독일마을에 사는 게 아니냐고 할 정도다. 그렇게 자주 가는 한국은 그럼에도 매번 갈 때마다 휙휙 바뀌는 기분이다. 이제는 낯선 풍경도, 문화도 제법 된다. 그중 하나는 채식주의에 대한 보편성과 표기인데, 꽤나 많은 식당들에서 (물론 나는 주로 친구들이 골라주는 힙한 동네의 식당들에서 모임을 갖게 되긴 한다. 주로 좀 더 어린 문화가 닿아있는 곳들이라는 점을 감안하자.) 채식 메뉴를 보유하곤 하고, 표기해두기도 한다는 점에서 놀랐다. 외국인 관광객이 많아져서일까 했는데, 한국에서도 채식하는 사람이 꽤나 늘었다고도 한다. 그 이야기를 해준 친구는 그러나 채식하는 친구와 회를 먹었다고 했다. 갸우뚱하는 나에게, 한국에서의 채식은 대개 "육"고기를 먹지 않는 것을 뜻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페스코테리안(제일 처음에 설명했던 채식주의의 종류를 참고하자.)이 가장 흔한 형태의 "베지테리안"이라는 것이다. 순간 "그걸 보통 베지테리안이라고 하진 않는데"가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꾸욱 눌러 넣었다. 어쨌든 것도 채식주의의 종류고, 사실 독일이나 유럽 밖의 채식주의 문화에 대해서 내가 뭘 안다고 싶었다. 솔직히 다시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 고기는 피해도 해산물을 피하기란 정말 어려울 거다. 바다가 삼 면인 나라에서, 액젓이 잔뜩 들어간 김치가 주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국가에서. 그래, 이럴 땐 정말 아는 척 금지다.
비나와 어울리며 하나 둘 어쭙잖게 주워 담은 나의 비건/베지테리언 상식은 처음엔 신기한 사실들을 친구들과 공유하는 데에 그쳤다. 그러나 문득문득, 나도 모르게 비루한 우월감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나. 내가 비건의 삶을 살아가는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잘못 표기 되어있는 한국에서의 메뉴판을 보며, 혹은 독일에서도 종종 기만처럼 보이기도 하는 가게 앞의 비건 표시를 보고도 흐린 눈을 하려고 노력한다.
비나와 집을 오가기 시작한 초창기에 나는, 그가 밖에서 먹을 수 없는 한식을 비건 버전으로 해주고 싶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그래서 자꾸만 원래는 비건이 아닌 메뉴를 비건으로 만들어보기도 하곤 했다. 그렇지만 용두사미와 작심삼일이 호가 아닐까 싶은 나답게, 요즘엔 적당히 타협점을 본다. 본래 비건인 메뉴를 선정하거나, 밖에서 보거나. 물론 여름 동안에 우리는 거의 매번 피자를 사먹거나 아이스크림 데이트를 하는 등, 되도록 좋은 날씨를 즐기기 위해 밖에서 만나긴 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지트에 가까운 우리집에서 종종 볼때도 사실 내 열정이 예전만치 못했다는 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알지 않는가.
사실 레시피를 더이상 고민하지 않는다는 것도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고민하지 않는다"에는 앞서 말한 나의 의지의 문제와 함께 익숙해짐도 있다. 3개월 동안 간헐적 채식인이 되었던 뒤로는 신기하게 고기를 사지 않는다. 이전에는 저녁메뉴를 못정하고 있으면 일단 닭고기를 한 팩 집어들곤 했던 내게 이건 나도 신기한 변화다. 건강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고기가 잘 생각나지 않는다. 물론 계란과 유제품은 늘 그렇듯 거진 항상 집에 구비가 되어있지만, 육류가 메뉴에서 사라진 것만 해도, 조금 더 채식주의에 가까운 삶을 취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인지, 무언가를 '대체'해서 레시피를 고안하려고 하던 게 꽤 오래전 일만 같다.
그리고 이제 솔직히 이야기를 하면 소재의 방향성을 살짝 잃었다. 어쩔 수 없이 식생활 위주로 쓰던 글이기에, 매번 새로운 소재로 글을 쓰기가 조금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편의 글을 쓰려면, 긴 에피소드나 함께 엮을 만한 공통점이 있는 짧은 에피소드들이 있어야 하는데, 또 무엇을 다루어야 할 지 잘 모르겠다. 혹시나 궁금한 게 있다면 누가 차라리 댓글로 물어봐 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그렇지만, 다시 독일에 돌아왔고, 비나와 함께 보내는 시간들이 쌓이다 보면 또 자연스레 기록하고 싶은 순간들이 나타나리라.
비건 친구 생활백서를 연재하기로 결심하던 마음을 잊지 말자. 내가 처음에 비나와 어울리기 시작하며 놀랐던 여러 사실들, 그리고 몰라서 조금 부끄러웠던 것들, 비나가 마음을 열고 말해 준, 비건으로 살며 배려받지 못해 아쉬운 부분들에 대해 누군가에게 미리 귀뜸해주고자 했던 그런 취지를 기억하자. 그리고 또 돌이켜보면 내 스스로도 이런 저런 열심히 고민해서 만드는 그 날의 레시피도 적어두고 싶었지 않은가. 기록은 늘 즐거운 일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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