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박한 삶을 사는 당신을 무료 전시회에 초대합니다. 미술관이나 박물관 초대장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이다.
SNS에는 귀엽고 예쁜 동물의 모습으로 도배가 되어 있다. SNS 뿐이겠는가. 다음 메인의 동물 카테고리를 보라. 이모티콘도 마찬가지다. 동물은 귀여워야만 하고 예뻐야만 한다. 간혹 강아지를 학대하거나 고양이를 사냥하는 잔인한 학대범들의 범죄가 올라오기도 하지만 극히 일부다. 만약 잔인한 학대범들의 범죄가 사라진다면 동물이 살기 좋은 세상이 올까?
동그란 눈망울, 쫑긋 선 귀, 사람을 바라보는 아련한 눈빛, 통통한 엉덩이, 풍성한 털, 짧은 다리, 쭉 뻗은 다리, 세차게 흔드는 꼬리, 몽롱한 눈빛을 비롯한 특유의 행위들. 모두가 그렇진 않겠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이러한 강아지와 고양이의 모습에 미소를 짓는다. 어쩌면 귀엽고 예쁘다고 생각하는 감정은 다분히 자연스러운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나조차도 그런 감정을 매일같이 경험하니까. 하지만 동물을 보고 느끼는 감정이 꼭 SNS 게시 행위로 이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반려동물은 우리 SNS에 전시되고 있다. 동물원, 수족관 등에 있는 동물을 우리는 전시동물이라 부른다. 반려동물이 집에 거주한다는 점하지만 SNS를 통해 반려동물은 자랑거리가 되고 관심을 받는 하나의 도구가 된 것 같다. SNS 활동의 자기애가 반려동물에게도 발현한 것이 아닌지 심히 우려된다. 각종 개량된 품종묘와 품종견의 출현 그리고 이를 소유하기 위해 애쓰는 현실을 미루어 볼 때, 반려동물은 이미 자기애의 표상이 된 것이 아닌지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SNS에서 동물을 전시하는 행위는 또 다른 위험성을 함의한다. 동물은 말이 없다. 그 누구도 동물에게 사진을 허락 맡고 올리지 않는다. 동물에게 초상권이 있냐고 되물을 수 있다. 동물이 초상권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을 것이고 게시물을 올리는 행위로 동물이 입는 직접적인 손해나 불이익은 없어 보인다.
다만 인간이 동물을 대상으로 하여 사진을 맘껏 찍고 올릴 수 있다는 것에는 권력이 숨어 있다는 위험성을 인지해야 한다. 권력 자체가 악은 아니지만 인간 종의 특권이 사회 속에서 인간과 동물 사이에 만들어내는 폭력을 발견할 필요가 있다.
귀여운 사진과는 달리 반드시 알려져야 하는 동물의 현실은 SNS에 잘 보이지 않는다. 펫숍의 존재, 유기동물 증가, 반려동물 사료의 실체와 같은 것들이다. 귀여움과 예쁨을 추구하는 문화는 품종견과 품종묘의 탄생을 만들어냈다. 품종견과 품종묘에 대한 수요는 펫숍과 강아지 고양이 공장을 가동한다. 사람들은 돈을 주고 개와 고양이를 산다. 이 산업에 깊이 깃든 문제의 근원은 동물을 귀여움과 예쁨만으로 소비하는 문화에 있다.
덧붙여 개, 고양이 이외 종은 SNS에서 거의 사라졌다. 개, 고양이 이외 종이 등장할 때가 있다. 대부분 구하기 힘든 동물이거나 반려동물로 익숙지 않은 돼지와 같은 종들이다. 정말로 절망스러운 건, 이 또한 대부분 귀엽고 예쁨으로만 소비된다는 것이다. 다른 종에게도 개, 고양이와의 공통점을 알린다는 점에서 득이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돼지의 삶은 반려동물로서 돼지의 삶과 거리가 멀다. 천지차이다. 그 누구도 사육장과 도살장의 돼지를 들여다보거나 SNS에 게시하지 않는다. 피칠갑, 악취, 괴성 등은 가려진다. SNS를 통해 우리가 동물을 대하는 태도는 실제로 현실 세계에서 우리가 동물을 대하는 태도와 매우 흡사하다.
그게 아니라면, 우리는 긍정적인 것만 보기 원하고 부정적인 건 보기 싫어하는 '초긍정 사회'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SNS와 인터넷 펼쳐지는 강아지와 고양이 무료 전시회. 우리는 이 전시회를 열고 초대받고 초대에 응한다. 전시하는 이유, 전시에 우리 시선이 머무는 이유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반려동물은 정말 반려동물인가
어쨌거나 '이렇게나 예쁜' 개와 고양이 때문인지 애완동물에서 반려동물, 반려동물에서 동거동물이라는 단어까지 생겨났다. 반려동물, 동거동물이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기 있단 뜻이 아니다. 애완동물은 한자로 愛玩動物, 반려동물은 한자로 伴侶動物, 영어로 companion animal이다. 동거동물은 同居動物, cohabitation animal이다.
애완동물의 완(玩)은 '완구'의 완과 동일한 한자다. 애완동물은 동물이 장난감 혹은 놀잇감으로 여겨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애완동물을 제외하고는 동물 앞에 붙인 단어의 뜻이 좋다. 반려동물은 짝이라는 뜻이고, 동거동물은 함께 사는 동물이다. 여기서 역지사지를 해보자. 동물이 인간을 짝으로서, 함께 사는 동물로서 택한 것일까?
애완/반려/동거 동물이 인간의 집으로 들어오는 과정을 살펴보면, 제 발로 들어오는 경우는 없다. (간혹 길고양이나 유기견이 집으로 들어오는 경우가 있지만 극히 드물다.) 이때만큼은 인간이 신이 된다. 반려와 동거를 선택하는 건 인간의 전적인 권리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인간의 마음이 편하도록 만들어낸 단어 아닐까?
네이버에서 반려동물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이 정서적으로 의지하고자 가까이 두고 기르는 동물'이다. 과하게 표현하자면 소수 사례를 제외하고 반려동물은 사람이 정서적으로 의지하고자 '무작정 데려온 동물'이다. 입양보다는 납치에 가깝다.
펫숍이든 유기동물이든 마찬가지다. 길거리의 삶보다는 집이 낫다는 생각도 인간의 생각인 것이다. 그러면 반대가 낫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 수 없다. 확신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함부로 판단하거나 행동해서는 안된다. 특히 생명의 삶을 다루는 것이라면 더욱 주의해야 하지 않을까?
펫숍에서 구매했지만 애지중지 가족처럼 여기는 사람들도 있고 유기동물을 입양하여 알뜰살뜰 보살피는 사람들도 있다. 그럼에도 SNS와 TV 프로그램을 비롯한 각종 미디어에 드러난 반려동물의 모습 속에는 비인간동물에 대한 인간의 권력이 깊이 배어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반려동물 천만이 넘어가고 있다. 카페, 공원, 보험부터 호텔까지 출현하고 있다. 반려동물의 위상이 높아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지금이 바로 반려동물 문화와 그 속에 깃든 인간 종 권력의 위험성을 되돌아봐야 할 적기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