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스스로를 배우고 안아주던 계절
살다보니 결국 내가 떠나거나, 혹은 어쩌다보니 멀어지는 사이가 생기곤 했다.
그리고 그런 누군가는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한동안 내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런 불편함도 이내 과거의 ‘나’에 대한 아쉬움으로만 남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살면서 없었다면,
앞으로도 없다면 더 좋을테지만
결국 그런 누군가가 생기는 시점이 생기고 만다.
그러고보면 그 모든 관계는
서로를 ‘견뎌내고’ 또한 ‘버티면서’ 유지가 되는 게 아닌가 한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그래서 벌어지기 어려운 사이일수록 더욱 그러할테다.
부모자식 관계는 어떠한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그 관계 속에서
부모의 지겹도록 완고한 무언가를 견뎌내고
자식의 어설프고 답답한 무언가를 견뎌내야 하는 것.
부부 관계는 또한 어떠한가.
부모자식 관계를 견디는 것보다 더
치열하게 버티고 견디는,
뜨겁도록 사랑했던 마음이 믿을 수 없이 다채롭게 변해가는 것을 지켜보고
끊임없이 나를 들키고 서로의 가장 약하고 서툰 부분을 견뎌야 하는.
관습과 자식과 또한 그 무언가로 인하여 지탱되기도 하는 연약하고도 질긴 관계.
우리는 모두 그렇게,
누군가를 견뎌내며 살고 있나보다. 한다.
그 ‘누군가’만 다를 뿐,
각자의 방식으로.
최근 친했던 이와 꽤 멀어지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20년 전쯤에도 있었던 것 같다.
상황은 달랐지만, 결국 그 관계를 좀 더 현명하게 다루며 유지하기보다는
등 돌리고 도망치는 건 내 쪽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유치하고 구차하고 구구절절한 어떠한 일들이 반복되면서 나는 버팀을 포기했다.
그리고 결국 그렇게 견뎌내지 못하는 그 무언가가
나의 한계이고 극복해야 하는 그 무엇임을 역시 알게 되었다.
어떤 이들에게는 갈등과 혹은 관계의 소멸에서 이런 생각을 하고 되새기며 살아가는 것도 꽤나 소모적이고 불필요한 일이라 생각될 수도 있겠다.
나는 그런 소모적이고도 피로한 생각들과 되새김을 하고 사는 쪽에 속한다.
허나 그런 나를 바꾸려 하기보다는 이런 시간들을 의미 있게 쓰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분명히 이는, 훗날 내가 또 한 걸음 커가는데 값진 거름이 되기도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믿기에.
괜찮다.
네가 부족한 게 아니라,
네가 모든 것에 완전할 수 없음이다.
네가 못나서가 아니라,
누구든 모난 것이 하나쯤은 있어야 살아지기 때문이다.
하고 나를 다독이던 그 해,
초여름이었다.
또한 이런 나를,
견뎌주고 있을 나의 ‘누군가’에게도
깊은 감사와 심심한 위로를 건네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