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종주 29일차 : 히로시마~이와쿠니
알람 소리도 없이 새벽 4시에 눈이 저절로 떠졌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코감기가 심해져서 숨도 못 쉴 정도로 콧물이 막혀 잠에서 깬 것이었다. 곧바로 침대에서 나와 공용 화장실로 달려가서 코를 풀었다. 새벽 정적에 휩싸여 있던 게스트하우스에 내 코 푸는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퍼졌다. 괜히 다른 투숙객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 큰일 났다…’
어제 조금이라도 나아지길 빌었던 소원과는 반대로, 감기기운은 보란 듯이 더 악화되어 있었다. 기세로 보아 오늘이 그 절정인 것 같다. 물도 삼키지 못할 정도로 목이 아프다. 술을 마시고 잔 것도 아닌데 어질어질한 기분이다. 이 컨디션으로 오늘 과연 라이딩을 제대로 할 수는 있긴 할까?
침대로 돌아와서, 다친 짐승처럼 이불 속에 파고 들어가 웅크려 누웠다.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상태가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사라져 버리자, 어제 결정하지 못했던 오늘 목적지를 쉽게 결정할 수 있었다.
‘이와쿠니까지만 가자…’
이와쿠니는 히로시마에서 고작 4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도시였다. 아프니까 무리하지 말고 조금만 타고, 오늘은 이와쿠니까지만 간 후 내일부터 빡시게 밟자. 내일은 이와쿠니에서 기타큐슈까지, 그 다음날이면 후쿠오카에 도착할 수 있겠지, 라는 계산이었다. 그렇게 모레에 후쿠오카에 도착하자는 목표와 계획을 세웠다.
망설임 없이 어플에서 이와쿠니에 있는 한 호텔을 예약했다. 새벽 6시부터 7시까지의 알람 예약들은 모두 꺼버렸다. 40Km면 오후 4시에 출발해도 오후 6시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일찍 일어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일단 조금이라도 몸 상태가 나아지기 위해서 푹 자야 했다. 그렇게 나는 새벽 4시에 일어났다가 다시 잠에 빠져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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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자연스럽게 알람 없이 눈을 뜨니 9시 반이이었다. 깜짝 놀랐다. 하마터면 체크아웃 시간을 넘길 뻔했다. 물건들을 잽싸게 챙긴 다음 방에서 나와서, 로비로 향해 어제 사 둔 아침밥을 챙겨 먹었다. 레몬에 절인 구이용 연어를 햇반과 함께 먹었는데, 맛은 일반 연어랑 사실 아무런 차이도 없었다.
이와쿠니로 가기 전 먼저 미야지마라는 곳에 들를 생각이었다. 미야지마는 히로시마 근처의 섬으로, 일본의 3대 절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유명한 관광지이다. 특히 바다 위에 떠 있는 붉은 토리이가 유명한데, 만조의 경우 바다 위의 토리이 모습을 볼 수 있고, 간조에는 썰물이 되면서 토리이의 바닥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만조를 보기 위해서는 시간을 잘 확인해서 가야만 한다. 오늘의 만조 시간은 오전 11시 반쯤이었으므로, 자전거로 히로시마에서 출발해도 크게 늦지 않을 시간이었다.
히로시마 시내에는 높은 빌딩들이 많으면서도 동시에 유독 지상철들이 많이 지다나니는 모습이라, 꼭 과거와 현대가 혼합된 것만 같은 인상을 주었다.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도 그렇고, 마치 예전의 과거가 지금의 도시 위에서 아직도 살아 숨쉬는 것만 같았다. 시내를 벗어나 2번 국도를 타고, 미야지마로 가는 페리 승강장이 있는 미야지마구치 역으로 향했다.
미야지마 페리 승강장에 도착했다. 아니, 여기도 수학여행을 온다고? 페리 승강장 앞에 탈 차례를 기다리는 듯한 일본 고등학생들이 우르르 모여 앉아 있었다. 이쯤 되니 이번 종주동안 일본 수학여행 코스는 전부 다 가본 것만 같다.
자전거를 어디다가 주차해둬야 하는지 몰라서 페리 터미널 주변을 먼저 돌아다녔다. 승합차 주차장에 나이 많은 경비원이 보여 자전거는 혹시 어디다 주차할 수 있는지 물어보려고 다가갔는데, “저, 자전거 주차장은 혹시 어디에…”라고 물어보자마자 “다메, 다메!(안돼, 안돼!)”하고 내게 손을 절레절레 흔들며 내쫓듯 제스처를 취했다. 아니, 여기 주차하려던 것도 아니고 그저 물어보려 간 건데. 그것보다 ‘다메’라는 것이 반말로 들려서 꽤 기분이 나빴다.
미야지마로 가는 표를 끊고 배에 탑승했다. 자전거는 들고 가기로 했다. 관광지다 보니 예전 2번의 페리 탑승 때보다 탑승객들의 인상이 행복해 보이는 것 같았다. 윤슬로 빛나는 히로시마 앞바다 너머에는 미야지마 섬을 배경으로, 보러 가고 있던 미야지마의 토리이가 저 멀리에 보였다.
가는 것도 사실상 20분밖에 걸리지 않아서 눈 깜짝할 새에 미야지마에 도착해서 내렸다. 얼마 걷지 않아서 오랜만에 다시 봐서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바로 사슴이다. 사슴 하면 일본에서 나라 공원이 가장 유명하지만, 이곳 미야지마에도 야생 사슴들이 사람들 사이를 스스럼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라공원처럼 숲을 거니는 자연스러운 사슴의 모습보다는 바다를 배경으로 사슴들이 돌아다닌다는 것 자체가 꽤 특이한(?) 풍경이었다.
10분쯤 걷자 금방 토리이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넘실대는 바다 위에 우뚝 선 빨간 토리이를 배경으로 많은 사람들이 인증샷을 쉴 새 없이 찍어대고 있었다. 개인 단위로 놀러 온 사람은 물론이고 수학여행을 온 학생 및 단체 관광객까지 인산인해였다.
메고 있던 가방을 뒤편에 잠시 내려두고 나 역시 사진을 찍고 있던 와중, 한 서양인 관광객이 나를 바라보며 놀란 표정으로 내 뒤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돌아보자 사슴이 내 가방에 머리까지 들이밀면서 빵을 꺼내어 봉지 채로 씹어대고 있던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야!”라고 소리치며 손짓으로 사슴을 제지했다. 사슴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신이 팔린 채 빵을 씹어댔다.
빵을 다 먹고 나서도 사슴은 나의 존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먹을 것이 더 없나 하며 내 주변을 어슬렁댔다. 어느 누군가 “미야지마의 사슴들은 나라 공원보다 더 온순해요”라고 구글맵 리뷰에 써 두었는데, 전혀 반대다. 이 놈들은 마치 먹이에 환장한 것 같다. 가방만 보이면 다가와서 냄새를 맡고, 먹이가 눈에 띄면 인정사정없이 사람에게 달려들어서 먹이를 갈취한다. 깡패가 따로 없다. 나라 공원 사슴은 센베이 앞에서 고개도 숙이고 예의 있는 친구도 있는데…
그래도 어디 가지 않는 타고난 귀여움에 가만히 앉아 있던 사슴들과 연신 사진을 찍기도 했다. 일단 미야지마에 왔으니 뭐라도 먹어야지 하고 히로시마의 특산물이라는 굴 요리를 파는 가게에 들렀다. 굴 맛은 거기서 거기였고, 그래도 나름 비싸지만 괜찮은 식사였다.
슬슬 다시 페리로 돌아가는 길에도 많은 학생들이 수학여행으로 미야지마에 내려서 걸어 다니고 있었다.
미련 없이 미야지마를 뒤로 하고 다시 페달을 밟았다. 이와쿠니까지는 히로시마에서 미야지마로 온 것만큼 20km를 다시 밟으면 되었기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꼭 정해진 루틴처럼 호텔에 짐을 풀고 샤워를 한 후, 반팔과 반바지 차림으로 갈아입고 슬리퍼를 신고 걸어 나와 가장 가까운 마트로 향해서 저녁거리를 샀다. 오늘의 저녁은 피자. 감기약도 샀다. 그래도 아침보단 코감기가 많이 줄어든 듯했지만 컨디션 저조로 일기도 블로그에 글도 제대로 쓰지 못한 채 저녁 9시쯤 기절한 것 같다. 오늘 40km밖에 라이딩을 하지 않은 만큼, 내일은 반드시 170km를 달려서 혼슈 라이딩을 끝내고 큐슈로 건너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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