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樂 1. 여행
언제부터였을까, 먼 곳에 대한 그리움(fernweh)과 동경으로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은.
아마 전혜린의 책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읽고 나서부터가 아니었을까. 전혜린의 책을 수없이 읽고 한 문장 한 문장을 곱씹으며 상상하고 꿈꾸었다. 언젠가 뮌헨의 슈바빙 지구를 거닐고 그가 다닌 카페에서 펄펄 끓인 그로크를 마시며 고독을 음미하고 싶다는 욕망을 품었다. 책에 나오는 맛있는 음식, 심지어 꼬치에 끼워 구운 청어까지 내가 아는 맛에 환상을 덧입히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고등학교 때 독어 선생님이 이야기해 주시던 독일의 풍경은 목가적이고 낭만적이었다. 바구니 하나 들고 숲 속을 헤치며 버섯을 따는 모습에 엘비라 마디간 같은 흰 원피스를 입은 소녀를 연상하며 외국에 대한 꿈을 부풀렸다.
때는 바야흐로 80년대 후반. 88 올림픽 이후로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루어지면서 배낭여행 붐이 일었고, 신문에 연재되는 대학생 배낭 여행기를 읽고 스크랩하면서 외국을 꿈꾸었다. 특히 유럽을.
하지만, 나는 대학에 떨어졌고 자존심만 강해 마음에 들지 않는 대학은 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그렇다고 직장에 들어가 정착하기에는 너무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자리를 잡지 못하고 빈둥대며 지내다 30대 중반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때 나에게 해외여행이란 꿈같은 것이었고 배낭여행을 떠날 용기도 없었다. 가끔 기차를 타고 바다를 보러 부산에 가거나 성당 친구들과 가까운 곳에 당일치기 구경을 갔다 오는 것이 전부였다. 물론 마음속에는 외국에 대한 아련한 향수가 남아있었고, 여행서를 읽으며 그 마음을 달랬다.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직장에 다니며 아이를 키우느라 바빠서 모든 꿈이 잊힌 것 같았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갈 만큼 컸을 때, 어느 날 인생이 허무하고 뭔가 억울했다. 결혼생활이란 내가 꿈꾸던 것과는 판이하게 달랐고, 내 마음에는 사랑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잘못된 선택을 한 게 아닐까. 제2의 사춘기를 맞은 것처럼 흔들렸다. 결혼도 아이 양육도 직장생활도 모두 쉽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면 현실 도피 같지만, 뭔가 변화가 필요했다. 그때 왜 외국여행을 가게 된 것인지 자세한 정황이나 동기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여고 동창이자 가장 친한 친구와 일본 여행을 떠나게 되었고, 첫 여행은 다다익선 여행이었다.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에 우리는 발에 불이 나도록 돌아다녔고 친구는 넉다운되었다.
그 이후로 나는 혼자서 또는 친구, 친정 식구, 패키지 등으로 해마다 해외로 떠났다. 1년에 한 번 가던 것이 최다 4번 가기도 했고, 컴퓨터에는 여행 사진이 쌓여갔다. 여행은 나에게 일상에서 얻을 수 없는 즐거움을 주었고,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시간이 되었다. 욕심이 앞서 무리한 스케줄로 여행 당시 힘들 때도 많았지만, 중독처럼 다음 여행을 계획했다.
경제적으로 여유롭지는 않았지만, 평소에 알뜰하게 살고 쇼핑을 잘 안 하는 대신 나를 위해 여행을 가는 것으로 변명을 했다. 남편은 해외여행은 물론 국내 여행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 각자가 좋아하는 것을 했다. 남편은 술 먹고 친구 만나는 것으로, 나는 꾹 참다가 방학 때 여행 가는 것으로 각자의 행복을 추구했다.
아직 못 가본 곳이 많고 위시리스트에는 많은 곳이 적혀 있는데,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 무지외반증과 족저근막염 때문에 오래 걷지 못하게 되었다. 빡센 여행은 이제 물 건너갔다. 느린 여행, 국내여행도 좋다. 사람은 상황에 맞게 적응하기 마련이다.
체력의 문제 때문인지 싫증이 난 것인지, 언젠가부터 여행이 예전만큼 재미있지 않았다. 처음 해외여행을 떠날 때처럼 두근거리는 설렘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습관처럼 여행을 계획한다.
눈을 감고 있으면 먼 타국에서의 추억이 스쳐간다. 때로는 기억이 섞여 어느 나라, 어느 장소였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낯선 하늘 아래서 나는 인생에 대한 흥미를 그대로 간직한 반짝반짝 빛나는 청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