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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이영 Oct 11. 2022

이응의 우주

26. 정원


“누구에게나 각자의 지옥이 있듯, 모든 이에겐 각자의 정원이 있다고 생각해, 난.”


스스로의 입을 통해 어쩌다 툭 던져진 말에 그 말이 혹여나 어디에도 닿지 못하고 흩어질세라 이응은 얼른 자신의 마음에 주워 담았다. 그러자 어쩌다 이 말이 갑자기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왔을까 놀란 마음은 옆으로 밀려나고 그 자리에 다시 생각이 자라났다.

‘그래, 천국은 몰라도 정원 정도는 있는 거야. 우리 대부분 각자만의 지옥을 견디며 살다가도 때때로 어딘가에서 잠깐씩은 위로받고 쉬어가니까. 그러니까 각자에게 허락된 정원 정도는 있는 거지.’


정원, 정원. 이응은 왜 그런 곳을 스스로 정원이라고 이름하였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어떤 이유에서 그곳을 천국이 아니고 정원이라고 이름하였을까. 분명 이응의 맛대로 멋대로 꾸며졌을 그곳이 왜 스스로에게 천국일 수는 없었던 걸까. 어떤 의미에서 천국은 천국이고, 정원은 정원인 걸까.

그 이유로 이응은 그곳이 이응의 손에 닿을 수 있을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리라고 생각했다. 정원, 이응이 이응의 지옥을 피해 쉬어갈 수 있을 이응의 정원은 이응이 욕심낼 수 있는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을 터였고, 이응에게 허락된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을 터였다. (그러다 문득 욕심낼 수 없는 것, 그래서 허락되지 못할 것은 지옥에서의 위로나 쉼터가 되어줄 수 없는 걸까 이응은 궁금해졌다.) 그런 이응의 정원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이응은 생각에 잠겼다. 이응은 어떤 것들을 갈망하고 원했고, 그래서 이내 어떤 것들이 이응의 손에 쥐어져 이응을 위로하고 쉬어가게 했을까.

이응의 정원에는 한때 바다가 있었고 파란색과 하늘색 양면 색종이가 있었다. 물이 잔잔히 흐르는 강가가 있었고, 다양한 모양과 다양한 색을 한 달들이 있었다. 올드한 재즈 음악이 잔잔하게 흘렀고, 깔끔하게 생긴 다기에 차가 담겨있거나 투명한 유리잔에 얼음조각들과 함께 밀크티가 담겨있었다. 때때로 아늑한 조명 아래 블랙 글레이즈드 라테가 있던 때도 있었다. 요가 매트와 요가복이 꽤 오랜 기간 있었고, 블루투스 스피커들, cd플레이어 등 여러 음향기기가 있었다. 다른 공기를 가진 곳으로의 여행이 있었고, 이름 모를 이들과의 우연한 대화가 있었다. 아늑한 공연장의 뮤지컬과 연극, 전시들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행복을 말이 아닌 삶으로 보여주던 사람들과 보내던 시간들이 있었다.   


얼핏 리을과 나누었던 행복에 관한 대화의 일부가 머리를 스쳤다. 그건 기한에 대한 내용이었다. 행복이라 이름한 것들에는 유통기한이랄까 사용기한이란 게 있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이전과 같은 농도로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고, 그래서 때에 맞게 그때에 맞는 모양의 행복들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고 했던 말이었다. 그러자 행복과 마찬가지로 정원 역시, 오늘의 정원의 모습은 과거의 정원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당연하게 들었다.

  이응은 자신이 앞서 그렸던 과거의 정원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오늘의 정원을 머릿속에 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림을 이어 그릴수록 과거의 정원의 이미지는 또렷해지는데 반해 오늘의 정원의 이미지는 점점 희미해졌다. 이응은 이것이 굉장히 이상하게 여겨졌다. 혹 울적한 기분 비슷한 것이 들기도 했다. 이응의 막연한 느낌에 이응의 오늘의 정원엔 분명 다양한 무언가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가까이 가 들여다볼 때면, 그럴 때마다 그것들은 희뿌연한 연기가 되어 눈앞에서 흩어졌다. 달을 올려다봐도 그랬고, 요가 매트를 내려다봐도 그랬다. 블랙 글레이즈드 라테는 이미 그 정원에서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이응은 초점이 나간 자신의 정원 한가운데 홀로 덩그러니 또렷하게 남겨진 기분이었다.  


문득 이응은 언제부턴가 자신이 자신의 정원을 돌보지 못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렇게 최근 들어 스스로 울적함 비스무리한 감정에 젖어간 게 아닐까 하는 생각 역시. 정원을 이루는 것들이 그토록 희미해진 건 스스로가 그것들을 돌보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희미해진 것들을 헤쳐가며 기억을 과거로 과거로 더듬어 갈수록 자신이 자신의 정원을 들여다보는 일에 꽤 오랜 시간 소홀했음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응은 그 사실에 흠칫 놀랐다. 이응은 스스로 자신은 자신의 정원에 꽤나 공을 들이는 사람이라고, 자신의 정원에 무엇이 있는지 잘 살피는 사람이라고 믿어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몇 달 동안은-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그 사실은 10월의 어느 밤, 오랜만에 재즈 선율을 따라 불꽃이 터지는 영상이 투사된 벽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터져 나온 말로 더욱 분명해졌다.  

“맞아, 실은 나에게 이런 시간이 필요했던 거야.”

탄성처럼 이응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이었다.

처음엔 반사적으로 부정했던 오랜 시간 자신의 정원을 돌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받아들여 인정하자 이응의 오늘의 정원에 다시금 아늑한 빛의 조명이 켜지고 재즈의 선율이 진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이응은 멍하니 응시하던 여러 갈래로 흘러내리는 불꽃잎들을 따라 스르르 눈꺼풀을 내리고 가만히 숨을 골랐다. 숨 끝이 파르르 떨려왔다. 곧 심장이 빠르고 크게 쿵쿵쿵쿵 뛰는 것을 느꼈다. 그 가운데 요가를 하며 울었던 날들이 가만히 떠올랐다. 그 기억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울컥하여 목구멍이 울렁거렸다. 곧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이응은 곧 터져 나올 것만 같은 울음의 정체를 분명히 알았다. 그건 그리움과 상실감 그리고 이름 모를 죄책감이 한 데 섞여 만들어진 감정 덩어리였다. 그건 애써 지켜야 하는 것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생기는 감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 그래서 그곳은 정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곳은 천국이 아니라 정원이었다. 돌봐야 한다는 사실에서 그곳은 천국이 아니라 정원이었던 것이다. 단지 갈망한 것이 모두 주어지는 곳이 아니라서 천국이 아니었던 게 아니었다. 허락된 것만이 존재하기에 천국이 아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곳은 종종 시간을 들여 애써 들여다보고 돌봐야 하는 곳이었기에 정원이었다. 분명 위로받고 쉬어가는 곳임에도 관심을 가지고 돌봐야 하는 곳이었기에 정원이었다. (이응은 어렴풋하게나마 이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스스로 천국이 아니라 정원이라고 말한 것이었다!)


이응은 이응 스스로가 다시 가꿔 나가야 할 자신의 정원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또렷한 지옥이 아니라 희뿌연한 정원에 발을 들여놓아야 했다. 정원을 가꾸기 위해서는 희뿌옇더라도 그 정원에 발을 들여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이응은 분명하게 알았다. 그리고 그렇게 발을 내디딘 곳이 정원이라는 사실을 잘 알아야 했다. 그것이 이응이 생각한 정원을 가꾸기 위해 해야 하는 첫 번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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