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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이영 Jul 19. 2022

이응의 우주

23. 자신만이 자신을


이응의 생각과 행동은 부와 모가 부재한 다른 상황에서도 결국 또 같은 패턴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이응은 스스로의 안에 정립된 ‘그럴듯한 무언가’에 붙잡혀 생각을 하고 또 그걸 행동에 옮기고 있었다. 결국 같은 결론에 가 닿았다. 이응은 이를 우연히 알아차리고 필연적으로 시인하고 말았다. 그 ‘그럴듯한 무언가’에 스스로가 붙잡혀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친구가 한 프로젝트를 같이 지원하자고 했어요.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는 친구가 하려는 일이 재미있어 보여 크게 고민을 하지 않고 그러겠다고 했고요. 그런데 막상 선발되어 교육에 들어가 보니 그게 아니었어요. 단순히 재미를 찾아 들어올 곳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모든 게 부담스러워졌어요.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느낌이었고, 남의 옷을 빼앗아 입은 그런 불편한 느낌이었어요.”

“무엇이 그렇게 부담스럽고 불편할까요?”

“그냥 생각지도 못했던 목표지점, 지향점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하는 모든 일들이 부담스러워요. 그걸 잘 해내야 한다는 사실이 저를 더 부담스럽게 만들어요.”

“그걸 꼭 잘 해내야 하나요?”

“…. 음…. 머리는 ‘아니요’라고 말을 해야 하는 걸 너무 잘 아는데 입은 ‘네’라고 대답을 해요. 저는 잘해야 해요. 잘 해내야 해요. 직접적으로 말을 한 건 아니지만 친구에겐 저에게 같이 하자고 한 이유가 있을 거고, 저에게 바라는 것이 있을 거예요. 아니, 그 친구는 바란다고 이야기하지 않았고, 이야기하지도 않지만 저는 응당 그 몫까지 해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저께는 그렇게 든 마음이 너무 부담이 되고 그게 무서워서 아주 오랜만에 그냥 이대로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그때 불안하고 초조할 때 먹으라는 필요시 약을 3 봉지나 먹었고요. 잠깐 찰나에 이렇게까지 하면서 해야 하는 일인가 싶기도 했는데, 일단 제 입으로 제가 하겠다고 했고, 거기까지 한다고 말을 했으니까 한 말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해야 해요.”

“그만둘 수는 없어요?”

“네. 그만둘 수는 없어요. 제가 하겠다고 했으니까요. 제 입으로 직접. 음…. 그리고 이걸 그만두면 아무것도 안 하는 상태가 되거나 그전에 하던 것들을 하는 상태로 돌아가야 할 텐데 그게 그럴듯한 무언가를 하는 상태는 아니거든요. 남들 눈에 ‘그럴듯한 무언가’를 하고 있지 않은… 아아.”

“네. 알아차렸네요. 잘 알아차렸어요.”

“네. 아아. 그렇네요. 네. 이것도. 아아. 네.”

이응은 스스로의 입으로 ‘남들’이라고 말을 하면서도 그게 자신의 부와 모를 가리키는 말임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럴듯한 무언가’ 역시 자신의 눈이 아닌 그들의 눈에 ‘그럴듯한 무언가’였다는 사실도. 그래서 이응은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날 스스로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정립한 그들의 시선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사실 저는 처음이거든요. 이 풀이. 그래서 모든 게 낯설고 두려워요. 필요 이상으로. 이 풀에서 사용하는 용어도 모르고 남들이 당연하게 쓰는 말들의 의미도 낯설고….”

“처음 하는 게 낯설고 서툴고 두려운 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에요.”

“네….”

“그런데 왜 이응 씨는 ‘서툰’ 이응 씨를 받아들이지 못할까요?”

“음…. 제가 운이 좋았던 걸 수도 있고, 뭐 그런 쪽에 있어서 영리했어서 스스로 잘할 수 있는 것만 골라 찾아서 하다 보니 그런 걸 수도 있는데, 저는 뭐든지 곧잘 했어요. 무언갈 해도 어수룩하고 서툰 그런 시간이 늘 짧았고 잘 해냈어요. 그게 무엇이든. 그렇지 않은 일은 스스로를 갈아 넣어서라도 해냈어요. 그러니까 그 서툰 기간이 외부에 잘 비치지도 않았거니와 때론 이게 짧은 시간이니까 숨기자면 숨기는 것도 가능했어요. 그게 무엇이든 해냈고, 짠 하고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곤 했죠. 그러다 보니 어떤 일은 너무 두려워요. 특히나 파악이 안 되는 일은 더더욱. 겁이 나요. 음…. 스스로를 갈아 넣으면 결국엔 되긴 된다는 사실을 알거든요? 경험이 말해주니까요. 그런데 이번 일은 저를 갈아 넣어도 ‘이게 될까?’ 싶어서 배로 두렵고 겁이 나요. 저를 어디까지 갈아 넣어야 할까 싶어서 부담스러워요.”

“어떤 일이든, 자신을 갈아 넣으면 안 되는 일이 있을까요? 갈아 넣으면 돼요. 그게 무슨 일이든 갈아 넣으면 그 일은 돼요. 그게 부담스러운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에요. 스스로를 갈아 넣는 일이 어디 간단한 일인가요? 쉬운 일인가요?”

“아니…요.”

“네, 아니에요. 이건 제 지도교수님께 들어서 매번 써먹는 말이긴 한데요. 들어봤을 수도 있어요. 들어봤으면 말해줘요.”

“네.”

“아기가 실제로 걸음마를 어떻게 떼는지 아나요? 실제로 본 적이 있나요?”

“음… 실제로 본 적은 없어요.”

“네, 좋아요. 그럼 이야기해 볼게요. 아기는 태어날 때 가분수로 태어나요. 머리가 차지하는 비율이 성인에 비해 훨씬 높아요. 머리와 신체의 비율이 1대 2, 1대 3 이래요. 아주 크죠? 그래서 아기는 태어나서 목을 잘 가누질 못해요. 그래서 양육자가 아기가 목을 가눌 수 있게 될 때까지 늘 목 뒤를 잘 받쳐주고, 주의를 기울여 줘야 해요.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아기가 목을 가누기 시작해요. 그다음 뒤집기를 하죠. 뒤집기를 하고 기기 시작하면 그 순간부터 양육자는 그 주위에 있는 모든 물건들을 다 치워줘야 해요. 아이가 일어날 준비를 하다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게 아이는 일어날 준비를 해요. 어? 벌써 울면 안 되는데? 왜 눈물이 나요? 어떤 의미의 눈물인가요?”

“아기가 일어나서 바로 잘 걸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서요. 무수히 휘청거리고 넘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서요. 그런데 슬프게도 제가 저한테는 그 휘청거림 한 번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아서요. 그래서 눈물이 나요.”

그렇게 이응은 굵은 눈물을 몇 방울 흘려냈다.

“맞아요. 아주 잘 알았어요. 아이가 한 번에 잘 꼿꼿하게 서서 능숙하게 걷고 달릴 수는 없어요. 수십 번, 수백 번 휘청거리고 넘어지고 주저앉아요. 그걸 이겨내고 걷고 뛰는 거예요. 이응 씨가 걷고 뛰는 데 이런 과정이 없었을까요? 네, 아니죠. 다 있었어요. 스스로를 좀 봐줘요. 휘청거려도 되고 주저앉아도 돼요. 넘어져도 되고 헤매도 돼요. 괜찮아요.”


스스로를 몰아세울 필요 없는 일에도 자꾸만 이응은 스스로를 벼랑으로 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주 익숙한 방법으로 스스로를 낭떠러지로 내몰았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 일에도 이응은 스스로에게 너무 가혹했다. 어떤 일을 할 때 스스로에게 세 번의 휘청거림과 네 번의 넘어짐 정도는 허락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훨씬 괜찮아졌다. 그것이 부담스러운 면죄부가 아니라 어쩌면 당연히 주어져야 했던 기회였다는 생각이 들자 눈물이 멎고 웃음이 돌았다.


“또다시 부모로부터 버려지지 않은 채 버려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두려워서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서 마음속에 정립된 그들이 바랄 거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들어주고, 그것도 또 최선을 다해서 잘 들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싶어요.”

“부모가 자식을 버리는 게 가능한가요?”

“네…? 네.”

“부모가 자식을 버린다고 해서 완전히 버리는 게 가능한가요?”

곰곰이 생각하니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버린다는 행위 그 자체는 가능할지 몰라도 부모나 자식이나 그 마음으로 볼 때 완전히 버리고 버려진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이응의 안에 의문이 생겼다.

“그러게요.”

“그건 아무도 몰라요. 그런데 세상에 딱 한 사람만이 딱 한 사람을 버릴 수 있어요. 그게 누구일까요?”

“….”

이응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또 쏟아졌다.

“네. 누가 누구를 버릴 수 있죠?”

“제가 저를요. 저만이 저를 버릴 수 있어요.”

“네. 맞아요.”

이응의 머릿속에 많은 생각들이 스쳤다. 이응의 생각들이 이응의 머리와 가슴을 들고 나는 동안 상담 선생님은 그 적막을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셨다. 울음이 잦아들었음 즈음 선생님은 이응에게 물으셨다.

“눈물이 갑자기 왈칵 나왔어요. 무슨 마음이었을까요?”

“음…. 일단 제가 저를 버리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에 스스로가 기특하게 여겨졌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제가 저를 버리지만 않는다면, 잘 사는 건 몰라도 그냥 어찌어찌 살아는 가겠구나 싶었어요. 그 말이, 저만이 저를 버릴 수 있다는 말이 정말 제 안에 크게 다가왔어요. 지금까지 그런 말은 많이 들어왔거든요. 저만이 저를 살릴 수 있다. 그런데 그 말은 늘 살아야만 하는 저에게 늘 부담이었어요. 나는 살아야만 하고, 또 그것도 잘 살아야 한다는 말처럼 들렸거든요. 그래서 그 말을 마음에 새기면서도 늘 부담스러웠는데 결국엔 같은 의미의 말이 이번엔 다르게 들렸어요.”


이응은 자신만의 자신을 버릴  있다는 말을 얻으니 스스로의 안에 정말  힘이 생긴 느낌이었다. 자신만이 자신을 버릴  있는 결정권자라는 사실이 스스로를 천하무적으로 만들어주는 것만 같았다.  말이  어느 말보다  어느 때보다 마음을 크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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