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27일부터 4월 2일까지의 일주일.
친구와 함께 한 4/1~4/3의 기록은 여행기(먹방 후기)를 참고해주세요.
-週刊 <워킹홀리데이@타이베이> 번외편 타이베이 여행기 (1) 4/1 https://brunch.co.kr/@ryuj/108
-週刊 <워킹홀리데이@타이베이> 번외편 타이베이 여행기 (2) 4/2 https://brunch.co.kr/@ryuj/109
오늘도 아무말 대잔치 시작!
바로 뒤에 Lady M이 생긴 이후로는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는 샌드위치 푸드트럭. 이 집의 샌드위치는 채소가 싱싱해서 씹을 때마다 아삭아삭한 게 기분이 좋다. 땅콩버터가 들어가서 그런지 가끔 달콤함이 예고 없이 훅 하고 들어오는 것도 좋고.
드디어 와 본 아이스 몬스터. 일본인들만 바글바글한 아이스 몬스터. 주말엔 줄이 엄청 길지만 평일엔 줄 없는 아이스 몬스터.
일인당 최저 주문 가격이 정해져 있어 빙수 하나와 음료를 시켜 가격을 맞췄다. 푸딩도 두부도 아닌 것이 들어가 있었고 타피오카 펄(珍珠 쩐쭈)를 직접 부어 먹도록 되어있다. 버블 밀크티의 빙수 버전. 생각보다 많이 달진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가격을 맞추기 위해 주문해 본 디저트. 한국의 수정과와 맛이 비슷했던 것 같다. 다만 내가 수정과를 좋아하지 않아 잘 안 마신다는 게 문제고 함정이지. 생강인지 계핀지가 너무 강해 먹기 힘들었다. 건강해지는 기분은 드는 맛이었다.
일 끝나고 함께 일했던 분과 신나게 수다를 떨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들른 시정부 쪽의 철판 집. 지난주에 처음 철판 요리 집을 가본 것을 계기로 들어가기 쉽게 되었다. 이 집은 꽤 손님들이 많았다. 생선이 있길래 생선으로 주문. 무슨 생선인지는 모르겠지만 연어가 아닌 다른 생선으로.(대구鱈란다) 아무래도 집에선 주방에 환풍기가 없어 생선 요리를 하기 힘들고, 환풍기가 있었어도 생선 요리는 해본 적이 없으니(손질이 귀찮아..) 밖에서 먹을 수 있을 때 먹어야 한다.
양배추와 숙주. 양배추는 좋아하지 않지만 숙주는 나의 사랑. 꽤 맛있게 먹었다. 간이 살짝 셌던 거 같기도 하고.
날이 좋아 동네를 한 바퀴 돌기로 했다. 늘 가던 방향 말고 아예 다른 방향으로 가보기로. 세상에 웬걸. 집 근처에 큰 공원이 있었다. 큰 호수도 있었고. 전에 '그 동네 잠깐 있었는데 밤에 낚시하더라'란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우리 동네에 그런 곳이 있나? 했는데 발견! 와 너무 좋았다. 간 김에 옆 역까지 걸어가 보았다. 식사는 그 근처에서 해결. 내 사랑 구글로 평점이 적당히 좋은 곳으로 대충 들어가 봤다. 오후 2시 반이 가까운 대부분의 식당들이 슬슬 점심 영업을 끝낼 시간이라 선택지가 적긴 했지만 다행히 평점이 괜찮은 우육면 집이 영업 중이었다. 매운 음식을 잘 못 먹기 때문에 종종 홍샤오紅燒 우육면은 망설여지지만 그래도 역시 맑은 국물보단 매운 국물이 땡긴다. 고기도 부드럽고 맛도 많이 맵진 않지만 얼큰해 맛있게 먹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동네에는 우육면 집이 없어 동네에 있었으면 가끔 갔을 텐데- 란 생각을 했다.
쿤양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무래도 나는 이날 상산을 가야겠더라. 그래서 알바 카톡방에 상산에 함께 할 사람을 모집했다. 함께 일하는 언니분과 함께 상산에 다녀와 언니의 추천으로 가본 빙수집.
우리는 종합 경단 빙수로 주문했다. 경단은 안의 고물을 깨와 땅콩 중에서 고를 수 있는데 모를 땐 다 넣어주는 종합~* 애매할 땐 종합~* 이 가게의 빙수는 요즘 유행하는 눈꽃 빙수가 아닌 일반 빙수에 이 집의 특제 꿀 소스와 특제 경단을 올린 빙수다. 와. 너무 맛있어!! 소스 하며 경단 하며!!! 소스는 몸이 나빠지는 느낌이 드는 시럽이 아닌 몸에 부드러운 느낌이 드는 시럽이었다. 나는 다음에 또 갈 거다. 경단은 선물용으로도 판매하고 있었다.
나만 알고 있어야지 했는데 며칠 후에 '타이거에어 타이완' 페이스북 페이지(가장 애정 하는 대만 여행 관련 페이지다. 맛집 정보 유용하게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에 올라왔다. 타이거 에어가 스쿠트 항공에 합병되었다던데 이 페이지는 어찌 되려나.
-御品元冰火湯圓-台北總店 https://www.facebook.com/Ice.Fire.Dumpling/
-타이거에어 타이완 https://www.facebook.com/tigerairkr/
이동하면서 근 처의 줄 서서 먹는 케밥? 노점에도 들러 하나 사서 나눠먹었다. 히힛. 이 사진을 빙수 안에 넣은 이유는 이다음에 들렀을 땐 이 집이 사라졌더라.ㅠ_ㅜ
함께 상산 오를 분을 모집한다고 하자 사장님께서 이날 나의 상산 모임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Shangri-La's Far Eastern Plaza Hotel(香格里拉台北遠東國際大飯店) 38층에 있는 라운지 바에서 칵테일이라도 한 잔 씩 마시라며 인당 NTD 500 후원해주셔서 거절하지 않고 다녀왔다.(사장님 사랑합니다!!! 우리 사장님 최고!!!) 돈 없는 유학생과 워홀러가 언제 이런 곳에 와보겠나 싶은 멋진 곳이었다.(우리 옆 테이블의 한국분들은 관광객 분들인 것 같았다) 각자 칵테일을 주문하고 배도 좀 고프니까 감자튀김도 주문하고. 나는 럼 베이스의 Berry Mud라는 칵테일을 주문했다.
일본에 살 땐 일하는 곳 근처에 PUB HUB이라는 영국식 펍이 있어 자주 가곤 했다. 하도 자주 가니까(...) 레귤러 스탭이 나를 기억하고 주문하려고 하면 "오늘도 첫 잔은 모스코 뮬 연하게로 주문하시겠어요?"라고 할 정도.(이분이 워낙 일을 잘하고 센스가 뛰어난 분이긴 했다. 지인의 지인이라 기억하는 걸 수도 있고.) 누군가와 함께 갈 땐 이곳의 스파이스 포테이토와 마르게리타 피자는 무조건 일단 주문하고 보는 메뉴였다. PUB HUB는 체인점이라 학교에서 걸어서 20분 정도의 거리에도 같은 가게가 있어, 수업이 일찍 끝나는 금요일은 오후 두 시 반 즈음에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을 끌고 니시신주쿠에서 하츠다이역까지 20~30분 정도 걸어 3시가 조금 넘은 시간부터(이 지점은 두 시에 가도 영업 중이다) 수 명이서 자리 잡고 끊임없이 먹고 마셨다. 19시까진 대부분의 칵테일이 50% 할인되는 해피아워라 19시까지 열심히 마시고 대부분은 해피아워가 끝나도 그대로 계속 더 마셨다. 학년 말에는 다들 반이 갈라지는 것이 아쉬워 거의 매주 갔던 것 같다. 포인트 카드가 있으면 5% 할인에 포인트도 적립이 되어 내 포인트 카드로 다들 할인받고 어마어마한 포인트를 쌓았다. 이 포인트는 나중에 귀국하기 전인가에(아니면 귀국한 후 다시 일본에 갔을 때인가) 1만 엔짜리 식사권으로 교환하여 함께 포인트를 쌓은 친구들과 함께 나누었다. 500엔짜리 식사권 20장을 받아서 테이블 가운데에 올려놓고 "얘들아, 누나가 쏜다!"며 팡팡 썼다. 어차피 나는 더 이상 카드도 식사권도 쓸 일이 없었으니까.(친구들은 졸업한 이후에 각자 포인트 카드를 만들었다.)
지금도 일본에 가면 늘 가던 이케부쿠로의 이 가게에서 친구들을 불러 만나곤 한다. 오래 다닌 만큼 그곳에서 정말 별별일이 다 있었는데 이젠 내 기억 속에만 있는 추억으로. 당시 엥겔지수가 엄청났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죽어라 일해서 번 돈 이 술집과 세븐일레븐에 다 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 시간들이 모두 즐거웠고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유학생이었음에도 한국인들끼리가 아닌 일본인들과, 다른 전공이라 친해지기 어려운 친구들과도 친밀하게 어울릴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때의 멤버들은 지금도 모두 연락하며 지낸다.
언니와 칵테일 한 잔은 뭔가 아쉬워 아사히의 병맥주도 주문했다. 아사히 슈퍼 드라이는 내 입에 안 맞아서 안 좋아하지만 이날 마셔보니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역시나 내가 좋아할 맛은 아니다. 일본 맥주가 한국인들에게 상당히 인기인데 이유를 모르겠다. 당시에 맥주는 하ㅇ트와 카ㅅ 밖에 없던 한국이라 그런 걸 수도 있겠지만. 나는 맥주를 마시기 시작한 건 한국으로 돌아와 소주를 함께 넣어 마시기 시작했을 때부터다. 여전히 소주는 목구멍으로 잘 안 넘어가서 안 먹고 한국 맥주 역시 잘 안 넘어가서 거의 안 마시지만 함께 섞으면 그게 그렇게 술술 잘 넘어가더라. 일본 맥주는 개인적으로는 KIRIN사의 필스너 맥주인 이치방시보리一番搾り는 맛있게 마신다. 해외에서 일했던 가게들은 대부분이 아사히 슈퍼 드라이를 제공했던 것 같다. 역시 이름값은 무시 못한다. 일본에선 카라구치辛口라 부르는 드라이 맥주가 내 취향이 아니다.
이렇게 쓰면 무슨 술만 마시는 사람 같은데 (나와 술을 마셔본 사람은 알겠지만) 나는 술을 잘 마시지 않는다. 애초에 주량 자체가 많지 않고 한 잔만 마셔도 온 몸이 빨개지고 이젠 왼쪽 손과 팔의 화상과 수술 부위가 유난히 시뻘겋게 변해 가렵기까지 한다. 다만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술자리를 좋아하는 것뿐. 낯가림이 있어(아무도 안 믿는데 도대체 왜... 나 낯가림 심해요) 모르는 사람들과 술 마시는 자리는 가시방석이 따로 없다. 물론 처음 만난 분들도 이야기가 잘 통하면 가시방석은 사라진다. 무얼 마시든 세 잔이 최대지만 기분에 따라 끊임없이 들어갈 때도 있다. 잘 알고 오래 안 사람들이어도 가시방석일 땐 안 마실 때도 있다.
취했을 때의 주사는 없다. 다만 가끔 졸음을 참지 못해 잠깐이라도 자야 한다는 단점은 있다. 마시다가 갑자기 확 올라와서 취하더라도 필름이 끊기는 일은 없다. 단 한 번도 필름이 끊겨본 적이 없어 필름이 끊기는 사람들이 신기하다. 어쩌면 애초에 필름이 끊길 정도까지 마시지 않는 걸 수도 있고. 몸 상태에 따라 한 잔만 마셔도 취기가 올라 토하는 경우가 아주 가끔 몇 년에 한 번씩 있는데 그럴 땐 등 두들겨 줄 필요는 없다. 토하고 싶을 때 자유자재로 토할 수 있는 '프로구토러'라 등을 두들기지 않아도 손가락을 넣지 않아도 혼자 알아서 깔끔하게 잘 토한다. 둥을 두들기는 건 전혀 도움도 안 되고 아프기만 하다.
일본에 가기 전까지 한국에선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고, 술 자체를 일본에서 배워서 기본적으로 내 페이스대로 마신다. 그래도 한국의 시도 때도 없이 '짠~'하는 문화는 익숙해졌다. 하지만 익숙해지지 않는 건 회사의 회식 자리가 아닌 사석에서 첫 잔을 건배도 안 하고 받자마자 각자 마시기 시작하는 것. 이게 각 나라의 술자리 문화를 떠나 나는 짠~도 안 하고 마시는 게 너무나도 매정하고 차갑게 느껴져서 늘 "짠 안 해요?"라고 건배 먼저 하게 만든다. 마실 때 시도 때도 없이 종일 짠 하면서 왜 시작하는 잔은 짠도 안 하고 각자 마시기 시작하는 거야.
최근엔 몸에 염증이 심해 안 마신다. 반년 넘게 시달리는 중인데 다 나았나 싶어도 재발해 쉽게 낫질 않는다. 세상에나 미쳤나 봐 술 얘기를 너무 길게 썼어.
바에서 바라보는 타이베이 시내. 역시 타이베이 시내의 야경은 101 타워가 보여야 한다.
이날은 하루 종일 굶었다. 휴일이기도 했고 돈도 없고. 말일까지는 아슬아슬하게 버틸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전날 술 마시는 게 출혈이 컸고(선 지불 후 청구) 추가로 주문한 아사히 병맥은 있는 돈 다 털어서 주문한 거라 지갑에 100원? 정도 남았던 것 같다. 하하하. 쓰고 보니 창피하다. 이날은 오월천의 무료 야외 라이브에 갔다. 너무 배가 고파 기다리면서 근처 모스 버거에 가서 햄버거를 하나 사 먹었다. 하루 종일 굶었는데 햄버거 하나로 배가 찰 리가.
공연이 끝나고 사람들이 너무 많아 다안 공원에서 101 타워까지 걸어갔다. 배가 너무 고파 집에서 컵라면을 하나 끓여 먹었다. 비상식량을 사놓길 잘했다.
전날 밤에도 컵라면을 먹었지만 또 컵라면을 먹었다. 왜냐하면 이젠 정말 돈이 없으니까. 예전에 이럴 때를 대비해 컵라면을 꽤 사놓았는데 이게 마지막이었다.
위의 것과 둘 중 하나가 맛있었다. 아마 이거였던 걸로 기억한다. 다음에 다시 사 먹어 봐야겠다.
새로운 룸메와 만나기로 하여 융캉제로 향했다. 조금 늦을 것 같고 자신은 저녁을 먹지 않으니 나더러 먼저 저녁을 먹고 오라는 연락을 만나기 전에 받아(...) 일단 융캉제의 우육면 맛집인 융캉우육면으로 향했다. 잠시 줄을 섰다가 들어갔다. 비가 와서 다른 날보다 대기줄도 길지 않았다.
융캉 우육면은 50년이 넘은 유명한 우육면 집이다. 내 주변엔 온통 관광객들로 가득 차 있었다. 왜 인기 있는지 알겠더라. 많이 맵지 않지만 깊고 부드럽고 얼큰한 국물이 마음에 들었다. 고기도 무척 부드러웠다. 내게 많이 맵지 않다는 말은 한국인들에겐 다소 매운맛은 부족할 거란 얘기다. 하지만 내 입으로 내가 먹는 거니까 나한테 맞으면 되지.
새 룸메이트가 먼저 도착해 있다고 연락이 왔다. 만남의 장소는 그녀가 가보고 싶었다던 최근 상당히 인기인 말차 카페로. 말차는 호불호가 갈리는 음료지만 나는 싫어하지 않기 때문에 괜찮다고 했다. 다소 긴장되는 자리였지만 즐겁게 대화했다. 이야기하면서 그녀와 함께 지내게 될 생활을 상상했다.
하지만 그녀와의 동거는 불발되었다. 돈을 절약하고 싶은 그녀가 함께 내는 요금들의 긴축을 요구해왔다. 베트남계 미국인인 자신은 고온다습에는 익숙해져 있어 에어컨을 사용하지 않을 테니 함께 사는 사람에게도 사용하지 않을 것을 요청했고, 현재 건물 전체가 계약해서 쓰는 쓰레기 수거 업자도 자신은 쓰고 싶지 않다고 거절했고(쓰레기봉투 들고 쓰레기 차가 오는 시간에 맞춰 나가서 버려야 하는데 나는 저녁에 일하기 때문에 시간이 안 맞는다), 급기야 인터넷 계약 플랜을 속도를 낮추어서라도 가장 싼 금액으로 바꾸어달라고 한 것이다. 함께 살고 있는 집주인은 까다로운 그녀의 요구에 그녀가 너무 타이트하다며 고민이 많았고, 나는 어차피 집주인은 미국으로 가버릴 거고 나와 사는 거라 그래그래 알았어~했지만, 인터넷 속도에서 나는 집주인에게 이건 NO라고 답했다. 현재 사용하는 건 월 999원의 플랜으로 3명이서 나눠서 내고 있는데 가장 싼 금액은 699였나 600원대로 이걸 1/3으로 한다 해도 월 100원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 월 100원을 아끼기 위해 인터넷 속도를 낮춘다는 것은 나는 이해도 납득도 용납도 할 수 없었다. 일본에서 빠른 인터넷을 쓰기 위해 월 6,000엔씩 내던 나다. 심지어 우리가 함께 먹은 저 말차 밀푀유도 100원이 넘었는데.
다른 이야기지만 대만은 말차가 상당히 인기 있다. 흔히들 '맛챠'는 일본의 차라고 생각하지만 중국에서 전래된 녹차의 한 종류로 일본에서는 다도와 함께 유난히 발전한 것 같다. 일본에서는 말차를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본 적 없고 '마실 수 있는가 없는가'로 나뉘는 화제였던 것 같다. 대만에서는 아무래도 일반적이지 않았던 말차가 현재 무척 유행 중인 것 같다. 그 영향인지 말차 전문점도 많다. 이번에 이 글을 쓰면서 발견한 대만분의 블로그. 한국분들 중에 말차를 좋아하시고 대만에 와서 즐기고 싶으신 분이 있다면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중국어를 몰라도 상호명과 주소만 알면 되지.
-'抹茶控-食景ya書菜' http://matcha.tw/
덧붙여 한국에서 일본식 다도를 접할 수 있는 곳이 있다. 서울 안국역 근처에 일본 다도의 최대 유파인 '우라센케 茶道裏千家'의 서울출장소가 있어 일본식 다도를 배울 수도 있고 체험(7인 이상 예약 가능, 예약 필수, 유료)할 수도 있다. 차와 함께 먹는 화가자도 주신다. 나는 대학의 일본 문화 관련 수업에서 교수님께서 특별활동으로 준비해주셔서 참가한 적이 있다. 홈페이지나 sns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 것 같고 인터넷으론 해당 출장소의 전화번호만 찾을 수 있다. (우라센케 서울출장소 02-73구-7사38)
1)
이야기를 나눈 만 19세, 한국 나이 스물한 살의 동료분은 나를 '롤모델'이라고 했다. 자신이 살고 싶은 삶을 내가 살고 있단다. 아마 나이가 들어도 세상이 정해준 가이드라인에 따르지 않고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사는 것을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자유롭지도 않고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사는 것도 아닌데. 나이가 허락하는 한 워홀을 많이 다니고 싶다고 했던 것 같다. 오히려 이 부분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솔직히 책임감 비슷한 게 느껴졌다. 내가 잘 해야 내 다음 사람들이 좀 더 편하고 수월하게 보낼 수 있겠구나. 나 같은 사람이 어딘가에 또 있겠지만, 그 사람들이 살아갈 세상은 편견이나 따가운 눈초리가 지금보다는 조금은 사라진 세상이 되도록 내가 잘 해야겠구나-라는 뭐 그런 책임감.
이미 나보다 먼저 여러 나라에서 워킹 홀리데이를 경험한 분들도 많지만, 많은 나라에서 워킹 홀리데이를 경험한 분들은 극소수이고, 경험한 국가가 모두 다른 언어권인 사람은 더더욱 소수다. 모든 SNS를 완전히 폐쇄적으로 운영하는 내가 브런치에 공개적으로 생활과 내가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공유하고 내 존재를 알려야겠다고 생각한 것 역시 앞으로 워킹 홀리데이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조금은 더 마음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겠다는 고민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앞으로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려고 하는 분들, 워킹 홀리데이로 여러 나라에서 살아보고자 하시는 분들이 '이런 사람도 있었구나'라며 위안을 받고 더욱 용기 내고 힘내서 후회 없는 자신의 인생을 살 수 있도록 좋은 전례로 남고 싶다. 내가 계기가 되지는 않겠지만, 누군가가 등을 밀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면 내가 그 등을 살짝 툭 쳐주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나를 통해서 그리도 내딛기 힘들었던 첫 한 발을 내딛을 수 있게 도와주고 싶다. 그래서 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이가 많음에도, 여자임에도(+나이가 많은 여자임에도),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기는커녕 취업에서 실패해 취직이라곤 애초에 해본 적이 없음에도 그럭저럭 알아서 나쁘지 않게 살고 있다고.
물론 나만 이렇게 사는 게 아니다. 워홀을 두 나라 이상 다닌 분들은 이미 넘치고 넘치고 세 나라까지도 드물지만 꽤 보인다. 하지만 4개국째로 들어간 사람은 지금 시점에선 극히 드물다. 대부분의 나라들이 비교적 최근에 워킹홀리데이 협정을 체결하였다는 점도 있을 테고(대만도 5년 이내에 채결), 어느 나라든 워홀러들이 '늘어나기' 시작하는 건 첫 해에 맨땅에 헤딩보다는 체결로부터 2~3년이 지났을 시점인 것 같다. 4개국 이상하신 분들은 각자의 스타일이 있다. 영어권에서 4개국 지내신 분도 있고, 내 경우엔 내가 워홀을 경험한 네 개의 나라가 모두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곳이고, 최대 6개국에서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활용하신 분까지 봤다.(네이버 블로그의 JK 님, 내가 워킹홀리데이를 경험한 4개국을 모두 이미 나보다 한 발 먼저 생활하시며 클리어하셨다. http://blog.naver.com/ssony1092 )
다만 이 요상한 책임감은 아무래도 나이에서 오는 것 같다. 만 31세 생일 직전에 비자를 받아 만 32세 직전에 입국해 만 33세 직전에 워홀 생활을 끝내며, 4개국에서 워홀을 마친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생각해보면 내 상황이 상당히 특수하다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아마 현재 워킹 홀리데이로 해외에 거주하며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 중 내가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 중 한 명일 것이다.(정말로 최연장자일 수도 있고. 혹시 나 외에도 현재 한국 나이로 33~34세에 워킹 홀리데이로 생활하고 계신 분이 또 있다면 알려주세요. 알고 지내지는 않더라도 존재를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될 것 같습니다..)
나는 내가 이런 상황에서 살고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라는 점이 최근 3년 동안에 가장 외로웠던 점이다. 종종 같은 연령대의 워홀러를 만나도 그들에게는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모아놓은 돈이 있었고 한국으로 돌아갔을 때 재취업이라는 길이 있었다. 그들도 각자 큰 용기를 내어 선택한 것이겠지만 다들 불안은 하지만 되돌아갈 길이 '아예 존재조차도 하지 않음'은 아니라는 알고 시작한 것이니까. 나이 서른에 학사 졸업해서 무경력, 모아 놓은 돈도 아예 없고 돌아가 일자리를 구하는 것도 불가능한 상황이었기에 나이가 같은 워홀러여도 나와 같은 상황에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네가 선택한 거 아니야?'라고 매정하게 말한다면 내가 선택했던 부분도 있지만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도 있었다고 반론하고 싶다. 자신의 사무실에 서른에 대학 졸업해서 여기저기 해외 떠돌던 30대 초중반의 미혼 여성이 신입으로 들어가겠다고 이력서를 냈을 때 뽑고 싶다, 함께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어리지 않은/나이가 많은 신입'은 한국에서 가장 기피하는 신입의 조건 아닌가. 고부 갈등으로 결혼 생활이 힘들다면 그것도 당신이 선택한 것 아닌가-란 말 들으면 서러워지지 않는가. '네가 선택한 거 아니야?'식의 그런 매정한 말은 하지 말자. 난 이 말 싫어한다. 재수 없거든.
덧붙이자면 각자의 워홀에 누가 정의를 내리는가. 나 스스로 정의해 그에 맞게 그리고 끝났을 때 잘 보낸 시간이었다-하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타인의 워홀에 성공이니 실패니 이런 말들로 판단해 버리는 거 좋지 않은 것 같다. 워홀러든 유학생이든 주재원이든 이민 간 사람이든 해외에서 생활하는 이들에게 타인이 해줄 수 있는 말은 응원이 가장 좋은 것 같다.
아무튼 그래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어떻게든 한 자라도 더 적어보려고 시간 쪼개서 블루투스 키보드 들고 다니면서, 휴일엔 노트북 앞에서 열심히 뚜들기고 있어요.
2)
대만을 대표하는 밴드, 국민밴드라는 말이 어울리는 오월천의 20주년 무료 라이브에 다녀왔다. 티켓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에 가까운 밴드가 시내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공원의 작은 무대에서 '사은 라이브'라니. 오월천은 내가 고등학교 때 일본 음악을 접하기 시작할 때 함께 눈여겨보던 밴드였다. 대만에서 워킹 홀리데이 생활을 하며 꼭 하고 싶은 일 중 하나가 이 오월천의 콘서트에 가는 것. 그런데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무료 라이브라니!
지난주 공연을 발표한 다음 날 다안 공원에서 산책을 하고 있을 때 자리를 잡기 위해 철야를 시작한 팬들을 만났다. 당일 공연 시간이 가까워오자 공원 일대는 타이베이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았나? 싶을 정도의 인파가 몰렸다. 어린아이들부터 연세가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들까지. 무대 쪽 말고 중계 스크린은 총 5개. 근처 잔디밭에서도 볼 수 있도록 스크린과 스피커를 설치했다. 벤치에 앉아있다가 오랜만의 콘서트(?)인지라 결국 못 참고 근처 스크린 앞 잔디밭에 자리 깔고 앉았다. 진짜 만 단위로 모인 것 같았다.
나는 멘트는 뭐라 하는지는 하나도 모르니까 함성 지르면 같이 함성 지르고 박수 치면 같이 손뼉 치고. 원래 말 안 통하는 해외에선 눈치껏 주변 사람들 따라 하면 되는 거다. 극장에서도 모두가 웃으면 나도 같이 웃고. 아는 노래 나오면 무척이나 반갑지만 나는 가사를 모르니까 멜로디만 허밍으로 불렀다.
한 밴드의 라이브라고 하기에는 완전 타이베이 시민들의 축제 같은 분위기였다. 그리고 밴드의 20살 생일 축하를 아시아를 대표하는 몬스터급 음악인이 되어 본인들이 음악을 시작한 곳의 시민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건 서로에게 무슨 기분일까. 남녀 편향 없이 교복 입은 학생들부터 백발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모두가 이 기념일을 함께 즐기고 축하하기 위해 모여있다. 좋은 날이다. 좋아하는 음악인과 함께 늙어갈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큰 축복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오월천의 곡은 人生海海.
가사는 ㄴㅇㅂ 등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하면 세상에 둘 도 없는 친절한 분들이 번역해주신 것들이 나온다. 개인적으론 時光機도 무척 좋아한다.
2017.3.29 Mayday五月天20週年 [ 回到 1997.3.29 ] LIVE @7號公園第一天 演唱會 풀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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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의 라이브 공연이었다. 한때는 직업으로 삼고 싶을 정도로 좋아하고 매년 두 자릿수의 크고 작은 공연을 다녔는데, 지금은 1년에 한 번 갈까 말까 한다. 그때처럼 시디를 구입하지도 않고(일본에서 귀국할 때 한국으로 갖고 들어간 시디가 200장 가까이 되었다. 국제 이사해주신 분이 이렇게 시디가 많은 손님 처음이라고), 그때처럼 음악을 끼고 살지도 않는다. 이제는 음악 시장의 동향도 모르고 어떤 새로 나온 음악이 인기인지도 모른다. 유학 시절 없는 돈에서 수 십 만원을 주고 구입한 프로툴즈는 이젠 새 파일을 만들기 위한 설정도 옛날에 사용한 교과서를 봐야 할 지경일 거다. 수 천 만원을 들여 익힌 기술과 지식들은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돈지랄로 끝났다.
아, 나는 일본에서 음향 전문학교에서 유학, 졸업했고, 전공은 음악 레코딩이었다. 시작은 콘서트 음향이었지만 진로 선택할 때 여러 가지 이유로 전공을 레코딩으로 변경했다. 워낙 학교의 콘서트 음향 행사마다 다 참석해서 덕분에 졸업할 때까지도 내가 콘서트 음향 코스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다. 음향 학교 시절 이야기나 진로 이야기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혹은 기회를 만들어서 이야기하는 걸로. 여러 번 언급했지만 한국에서는 '사학과'를 졸업, 역사를 전공했다. 한국에선 문과, 일본에선 예체능(음악)+공과 전공이 정말 뜬금없는 이력이라는 거 나도 잘 안다. '얘 뭐야' '이 사람 뭐야'하는 것도 다 안다. 놀랍지 않은 반응이다.
3)
시정부의 성품 서점 신의 점에 다녀왔다. 둔화, 반챠오, 신의 세 곳 모두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분위기는 반챠오점이 제일 마음에 들지만 책 진열의 구성은 신의 점이 가장 마음에 든다. 역시 책 구경이 제일 재밌어. 집에서, 일하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큰 서점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인다. 이날 본 한 섹션은 내가 아주 싫어하는 세 글자가 테마였다. 어후 보는 순간 식겁했다. 바로 '모택동'. 한국에서 두 번째 학기 때 발표 주제가 모택도이었는데 교수님이 읽으라고 지정해준 책도 너무나도 어려웠고, 하필 그 학기에서 가장 어려운 주제가 내가 걸려서 정말 뼈를 깎는 고통으로 네 달 동안 700페이지에 가까운 책을 읽었으나, 결국 발표는 욕은 욕대로 먹고 폭망. 발표는 지금 생각해도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오죽했으면 일본 친구들조차도 내가 모택동에 시달렸던 것을 기억할 정도. 그 학기 수강했던 수업은 총 7개. 발표가 10개, 리포트가 13개였던 학기였는데 그중 모택동이 제일이었느니라... 이 학기 끝나고 완전히 번아웃 되어버린 게 문제였지만.
-誠品書店 http://www.eslitecorp.com/Site/Site_List.aspx?a=TW&l=b&sc=TW&sa=N
성품 서점에 와서 책들을 볼 때마다 느끼는데 앞으로 세상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으며 살아가려면 중국어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만에 오기 전에, 중국어를 언어는 권력이다. 언어 하나를 배움으로써 정말 많은 책과 정보들을 접할 수 있다. 좀 더 넓은 세상에서 더 많은 걸 흡수하며 살고 싶다. 물론 온전히 자기만족이다. 기왕 사는 삶, 어차피 한 번뿐인 삶 만족스럽게 살다 가야 할 것 아닌가.
4)
상산 다녀왔다. 타이베이 생활을 시작한 지 두 달 반이 지났고, 집에서도 가까운 곳이지만 한 번도 가볼 생각을 안 했다. 하지만 그날은 날이 좋아서 상산이나 오르면서 땀이나 빼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둘이서 상산에서 땀을 쫙 빼고 근처 통화 야시장에서 군것질하고 언제 와보겠나 싶은 분위기 좋은 호텔 바에서 칵테일까지. 참 좋은 하루였다. 정말 신기한 건 몇 주 동안 부어있던 목이 땀 한 번 흘림으로써 한 번에 나았다.
사실 상산을 오르는 사람들 대부분이 외국인 관광객들이다. 101 타워의 비싼 입장료를 내지 않고 타이베이의 야경을 즐기고 싶거나 혹은 나처럼 101 타워를 포함한 야경을 즐기고 싶거나. 상산의 야경은 추천한다. 101 타워의 전망대, 101 타워의 스타벅스 등 타이베이의 야경을 즐기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101 타워와 함께 온전한 타이베이 시내를 보고 싶다면 역시 상산이다. 하지만 여름엔 비추. 보통 15분 정도 걸린다고 하는데 체력과 평소 운동 상태에 따라 다를 것 같다. 평소에 많이 걷고(휴일 포함 평균 일일 걸음수 12000보 대) 현재 사는 집이 5층에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나는 13분 정도 걸린 반면 동행자는 20분 넘게 걸렸다. 계단이 폭은 좁고 높이는 높았다 좁았다 변덕스럽기 때문에 올라갈 때에도 내려올 때에도 조심해야한다.
5)
올리버 쌤의 '여러분의 영어 실력을 망치는 3가지 생각' https://youtu.be/vmIdketPWcY
유튜브에는 수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어로 말하는 영상들이 많고, 또한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외국어 강좌 역시 고르기 힘들 정도로 많다. 나 역시 유튜브를 이젠 뮤직비디오 보는 용도를 넘어 종종 일반인들이 제작한 영상을 보곤 한다. 그중 제일 좋아하는 건 올리버 쌤. 그중 인상 깊은 영상을 발견해서 공유하고 싶어 써본다.
요약하면 1. 주위 분위기 2. 번역에 집착하기 3. 패턴 영어에 대한 환상
특히 1번 정말 공감한다. 나는 영어도 못하는데 고등학교+호주 1년으로 잘하겠다며 막 해보라고 시키는 게 정말 스트레스다. 나 못하고 하기 싫다고. 제발 시키지 좀 말라고. 영어 쓸 일 있으면 무조건 나 시키고 얼마나 잘하나 보자 식으로 오직 발음이 좋나 안 좋나에만 관심이 있다. 이게 너무나도 피부로 느껴져서 심지어 일본어도 한국인들 앞에서 하게 될 땐 스트레스를 받을 정도다. 이상하게 한국인들 사이에서만 심리적으로 위축이 되어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제 이건 외국어를 넘어 한국어도 한국인들과 함께 있으면 안 하게 된다.
그리고 "너 @@어 할 줄 안다고? 함 해봐!" 아 정말 환장스럽다. 도대체 뭘 하라는 거야 뭐가 궁금한 건데. 최소한 자기소개라도 해보라는 주제라도 던져주고 시키든가. 말해도 알아듣지도 못할 거면서 뭘 듣고 싶은 건지. 그저 '네가 무슨 말을 하든 그건 관심 없고 얼마나 현지인처럼 말하는지 내가 판단해주겠어'식이다.
왜 '어디에서 몇 달, 몇 년 살았다'라고 하면 100% '그럼 그 나라 말 잘 하겠네'라고 이어지는 걸까.
1. 외국 살았다고 다 언어 잘하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기간과 어학 실력이 절대적인 비례관계에 있는 것도 아니고
2. 해외 생활에서 얻는 것들에서 사실 언어 실력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을 것이다. 언어 실력'도' 얻었다고, 주主가 아닌 부수적인 요소로 꼽는 사람들이 많을 테다. 그만큼 언어 외의 것들에 더 큰 가치를 두기 마련이다.(물론 사람 차 있음)
그런데 백이면 백 '해외생활=언어'로 생각하는 걸 보면
1) 얼마나 한국 사회가 외국어에 압박과 콤플렉스를 느끼고 있는지,
2) 그 사람의 사고에 녹은 경험 자체보다는 당장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외국어 실력을 해외에서 보낸 시간을 판단하는 최우선 기준으로 잡고 있는지 를 알 수 있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겠지만, 처음 해외 생활을 시작한 게 벌써 10년 전이고, 지난 10년 동안 내가 들은 질문과 이야기들을 종합했을 때 저기서 벗어나는 경우는 0%에 수렴한다.
일본에서 4년 살았기 때문에 일본어를 잘 한 것이 아니라, 일본에 가기 전에도 일본에서도 내가 많이 노력했기 때문에 잘하게 된 것이다. 당연히 4년 살았다고 다 잘하게 되는 것도 아니고, 나만큼('옛날의', '거주 당시의' 나...) 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누구나 성인이 되어 외국어를 배우고 익히는 과정은 그곳이 한국이든 현지든 어디가 되든 쉽지 않다. 현지라면 언어의 장벽도 느낄 것이고 언어를 익히는 그 과정의 긴 시간 동안 말이 안 통해 겪는 트러블, 차별, 무시 또한 겪을 것이다. 정말 죽어라 공부하고 연습해서 이제 좀 대화가 통한다- 싶으면 한국인들은 '너 외국에서 살았으니까 잘 하는 거 당연한 거 아니냐'라면서 후려친다. 후. 나는 타인의 의견에 아니라는 말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이래라저래라 하고 싶지 않지만 이것 만큼은 한 마디 하고 싶다.
아니야. 외국에서 살아서 언어를 잘 하는 게 당연한 거 그딴 거 없다. 환경적으로 좀 더 많은 현지어를 접할 수 있는 것뿐, 그 언어를 잘하게 된 건 온전히 그 사람이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노력, 그 과정, 그 시간 후려치지 말아라. 한국인들이 한국에서 배운 외국어 발음이 토종이라느니 놀리지 말아라. 발음은 일상생활에서 들리는 언어와 말할 때 주로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가기 마련이다. 모국어인 한국어의 영향을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거다. 그만큼 할 수 있다는 것, 노력과 그 노력의 시간을 모두 무시하거나 조롱하지 말아라.
이 코딱지만 한 한국 땅에도 수많은 사투리와 발음이 있다. 넓은 미국 땅은 물론이고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가 몇 개인데. 일본과 중국 역시 한국보다 넓고 사투리도 많고 각자 발음도 억양도 다르다. 미국 동부 발음만이 절대적인 영어 발음인 건 아니다. 발음이 좋을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발음이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 부가적인 요소일 뿐이라는 것. 물론 유창하고 현지인에 가까운 발음이라면 더 좋을 테고 모국어 영향이 강한 발음은 익숙해지는 데에 시간이 걸리기는 한다. 하지만 그건 내가 다양한 발음과 억양을 듣는 실력이 낮은 것일 뿐이더라.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유튜버 'Maangchi 망치'님.
유튜브에서 활동하는 분들 중 영어로 한국 음식 요리를 알려주는 북미 교포분이시다.(관련 기사 http://www.hankookilbo.com/v/da4fd9203d7542eaa67132eeeee548d9 )
조회수가 가장 높은 '닭강정' 조리법. 나 역시 호주에서 닭강정 레시피 찾다가 이 영상으로 망치 님을 처음 본 것 같다. 발음에 모국어의 영향이 있지만 댓글에 그녀의 발음을 지적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딴 말인데 나는 한국식 치킨이 세계 정복도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제발 현지화하지 말고 그대로 진출해줘.)
아무튼. 분노로 시작해서 치느님 찬양으로 끝.
-Youtube 채널 '올리버쌤' www.youtube.com/c/올리버쌤
-Youtube 'Maangchi' https://www.youtube.com/user/Maangchi
또 말이 옆으로 새는데, 요즘은 정말 재밌는 세상인 것 같다. 이미 중장년의 연령이어도 우연히 전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올해 가장 인상적이었던 신예 유튜버는 역시 '막례쓰' 박막례 할머니 님.
-Youtube 채널 '박막례 할머니 Korea Grandma'
https://www.youtube.com/channel/UCN8CPzwkYiDVLZlgD4JQgJQ
막례쓰 박막례 할머니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계기인 '호주 캐언즈 여행기'
https://youtu.be/9J_9o-ob5hA?list=PLNR8nv7qKtM5CYsfRLvy8tX1-EDiSBJWM
또 한 번 인기를 얻은 것은 '치과 들렸다 시장 갈 때 메이크업 [박막례 할머니] Grandma Make up'
6)
나는 4년의 일본 생활, 1년의 호주 생활, 8개월의 독일 생활, 그리고 현재 진행형인 1년 계획의 대만 생활을 통틀어 내가 얻고 배운 것들이 정말 많고, 해외 생활이나 그 나라에 대해 물어보면 꽤 열심히 내가 아는 선에서 개인적인 견해까지 덧붙여 설명해주는데 나의 선의가 지나쳤는지 종종 일부의 사람들은 물어봐놓고서 답해주면 심드렁하거나 '어, 그래.' 식의 무관심으로 끝난다. 이러니 이젠 답하기도 싫고 내가 자판기인가란 생각까지 들었다. 게다가 100이면 100명 모두 내가 해외에서 무엇을 느끼고 배워왔는지가 아닌, 나의 외국어에만 관심이 있다. 그런데 그것도 내가 어떤 언어를 어느 정도의 레벨로 구사하고, 어떻게 공부했는지 가 아니라 오직 그럼 '몇 개 국어'하는 거야?? 만 존재한다.(답 : 0개 국어)
시험용 외국어에 사로잡힌 것은 현재 한국의 현실이 그러하고 그 현실에서 벗어나려 하는가 아닌가는 개인 가치관 차이니까 어쩔 수 없다 쳐도 요상한 외국어 콤플렉스에서 좀 벗어났으면 좋겠다. 일단 나부터.
7)
대만 생활은 특별히 재밌지는 않지만 소소하게 정말 소소하게 아주 소소하게 즐거움은 있는 것 같다. 이 한 없이 소소한 시간들이 내 취향은 아닌 것 같지만 일 년이라고 생각하면 그럭저럭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호주 생활에서의 만족과 불만족, 독일에서의 만족과 불만족, 그리고 대만에서의 만족과 불만족- 그것들이 모두 각각 달라 결국 어디든 오직 만족스럽기만 한 곳은 없고, 다 장단점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건 내가 가장 오래 산 한국도 그다음으로 오래 산 일본도 마찬가지다. 뜬금없지만 대만이라는 나라의 '작음'에서 느끼는 가장 큰 감정은 '편안함'이다. 한국은 '다이나믹 코리아'. 한국에서 살면 매일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기분이 든다. 하루하루 잠잠할 일 없고 가끔은 멀미가 날 정도의 속도감으로 하루를 보내게 된다. 대만은 매일매일이 잠잠하다. 개인적인 일들로는 여전히 잠잠할 일이 없지만 시간을 보내는 생활면에서는 조용하고 큰 파도가 없이 잔잔히 흐르는 물과 같다.
다만 호주와 독일에선 너도 이방인 나도 이방인이라는 느낌이 컸는데 대만은 나만 이방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언어가 안 되어서 그런가.
'앞으로의 나의 삶에서 어느 부분을 가장 중요시 여기고 싶은가'가 대만 이후에 내가 앞으로 살아갈 곳을 정하는 기준이 될 것 같다. 사실 대만 직후의 2~3년 정도의 거주지는 마음속으로 60% 정도는 정한 상태고 그 이후의 4~5년 정도도 정한 상태인데(두 나라가 다르다는 게 머리가 아파지지만 이런 인간인 걸) 또 그 이후가 미정이다. 뭐 어떤가. 빨라도 6년, 아마 10년 후의 일인데. 계획을 세워서 준비하는 것보다는 그냥 그때그때 유동적으로 대처하고 싶다. 그때까지 살아있을 거란 보장도 없고. 사실 덴마크나 스웨덴 등의 북유럽으로 유학 가도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학비를 보고 바로 머리 속에서 지웠다. 평생 직업이 '학생'이 될 것 같다. 관성도 습관도 참 무섭다. 11년을 학생으로 지냈더니 자꾸 학생으로 돌아가려 한다.
내게 '어느 나라에 살 것인가'는 '어느 나라에서 세금몬을 할 것인가'와 같은 문제.
8)
윤식당에 신구가 아르바이트생으로 오게 된다는 기사에 "신구보다 어린애가 알바로 왔어야 '일 시키기 편했을 텐데'"라는 반응을 보면 역시 알바는 그저 일을 시키는 상대라는 상하 수직적인 존재구나 싶다. 알바는 이래라저래라 시킨 일을 하는 대상일 뿐이고. 고용주가 일손이 모자라 도움을 청하는 대상이라는 생각은 안 하나보다. 그저 도구일 뿐. 그래서 알바 인생 프리터이고 고용주와 아르바이트의 관계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파트너'라고 생각하는 내가 살기 힘든가 보다. 그리고 그놈의 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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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써 놓고 여러 번 시간이 날 때마다 추가, 수정을 한 건데 점점 내용이 삼천포로 빠진다. 쓰고 싶은 이야기는 많고 실제로 쓸 이야깃거리도 많은데 막상 이야기를 시작하려니 어디서부터 실타래를 풀어 나가야 할지 모르겠다. 시간순으로 하기엔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6.5년의 이야기가 되고, 그때그때 써야지 하기엔 내용이 겹치는 걸 기억 못 할 테고. 시간이 긴 만큼 하도 여기저기에서 같은 이야기를 하고 또 하고 했더니 어디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브런치에는 못 먹는 몸뚱이 얘기랑 결혼 안 할 거야 꾸에에에엑~~이야기만 여러 번 한 것 같다. 질문이라도 받을까 싶고. 뭔가 바늘로 톡 하고 찌르면 술술 나올 것 같은데 어디서 찔러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튼 여러 가지로 생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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