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원룸이 좁고, 그리 저렴하지도 않은 주제에 너무 날림공사다. 단열도 영 좋지 않고, 외풍이 든다. 센서가 고장 나 가스가 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누출경보가 계속 울려 그냥 꺼놨다.
2. 한참 예민해질 시기가 오면, 방음 문제가 사람을 미치게 한다. 건물의 공조장치에서 나는 소리가 바닥에 머리를 대고 누우면 잔잔히 BGM으로 깔린다. 누군가의 휴대폰 진동소리,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도 들려온다.
3. 휴대폰 데이터는 왜 이렇게 안 터지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내꺼 5G 휴대폰인데 LTE가 자주 뜬다. 테더링으로 OTT를 보려 해도, 종종 영상이 넘어가질 않아 포기하게 된다.
4. 내 가구들은 대부분 ‘다이소’ 판매상품이다. 그러다보니 구색이 영 안 좋다. 그래도 다이소가 고흥에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하는 편. 처음 내려왔을 때는 올리브영도 없었다.
5. 읍내임에도 불구하고, 저녁이 지나면 식당이 문을 닫는다. 혼자 식사할 수 있는 식당은 더없다. 백반, 회, 고기가 아니면 식당에 대한 선택지도 별로 없다. 결국 대략 한 메뉴 당 두세 개의 가게를 돌려 먹는다. 한 곳 정도는 먹을 만하다.
고흥에 내려와서 불쾌했던 경험들을 떠오르는 족족 바로 나열해봤다. 솔직히 계속 나열할 수 있지만 다섯 개에서 끊겠다. 나열해보니 평소에는 별 감흥 없다가 마음이 조금 우울해지면 이런 것도 마음껏 누리지 못하는 현실이라는 이유에 한없이 짜증나게 되는 것들이다. 아무래도 서울에 집이 있으니, 없는 형편에 이중지출을 꺼리게 되고, 그러다보니 고흥에선 무언가 갖춰 살기가 참 부담스럽다. 고흥원룸 월세, 매주 올라가는 차 값만 해도 그게 얼마냐.
여전히 서울에 적을 둔 채, 외지인의 신분으로 지역에 내려와 지내는 건, 여러모로 가벼울 수밖에 없다. 언젠가 떠날 걸 기다리며, 지역에 기대하지 않고, 겉도는 일상을 기꺼이 살아간다. 내려온 이유인 사업에만 몰두하고, 그 외의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된다. 사람이 어딘가 깊게 뿌리내리지 못하고 바람 따라 물 따라 흘러가는 대로 살며, 참 많은 것을 포기했다고, 참고 있다고, 투덜투덜 한탄만 한다.
최근 종로3가에서 친구와 술을 마셨던 적이 있었다. 살짝 놀랐다. 젊은이들이 노상을 깔고 골목을 빽빽이 메우고 있었던 것도, 누룽지가 깔린 철판 위에 치킨이 놓이고 그 위에 불닭볶음면이 얹힌 것도, 시원한 생맥주와 함께 혀 끝을 울리는 자극적인 맛까지 모두 다. 고흥엔 ‘푸라닭’을 제외하곤 전통적인 치킨 밖에 없다. 후라이드, 양념, 간장, 마늘, 옛날통닭. 친구에게 역시 음식은 서울이라며 또 투덜댔다. 규모도 규모지만 다양성을 정말로 로컬은 도저히 대도시를 따라갈 수 없다.
고흥에서 소상공업은 상당히 단출하다. 그러다보니 제공되는 생활서비스도 서울에 비해서 빈약하기 짝이 없다. 당연한 일이다. 고흥의 인구는 육만 명을 살짝 넘겼다. 은평구 진관동의 인구만 해도 오만 명이 훌쩍 넘는데, 서울 한두 개 동에 살고 있는 인구가 고흥 전역에 분포해 살고 있다는 말이 된다. 당연히 생산 규모도, 소비 규모도 말 그대로 차원이 다를 수밖에. 하지만 이런 차이는 그나마 직관적이다. 정말 아예 다른 것이 바로 ‘비즈니스 논법’이다.
서울은 실험이 가능하다. 시장에서 돌고 있는 자본규모가 워낙 크다보니, 기업들은 소비트렌드에 따라 다양한 비즈니스모델을 검증하고, 더 큰 자본과 연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다. 더 큰 자본이라 하면, 안정된 채산구조를 가진 몇 가지 영역인데, 부동산 비즈니스, 문어발식 제조업에 기반한 대기업 투자구조, 충분한 소비시장을 바탕으로 공급사슬이 집적·분화되어 가는 생활서비스업체들의 사업풀(pool)일 테다. 게다가 소비시장 규모도 커 단타 하듯 사업을 해도 빠른 시일 내에 손익분기점을 넘겨 ‘피보팅(pivoting)’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그러다보니 창업 횟수도 폐업 횟수도 많다. 서울에선 한두 달만 지나도 상가구성이 꽤 바뀌는 상권들을 자주 접할 수 있다.
흔히 젊은 창업가들은 고흥 상권에서 서비스업종, 특히 마케팅에서 비어있는 부분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나이가 지긋한 사장들이 꾸려가는 낡은 가게들이 즐비하니 무언가 트렌디하게 창업을 하면 나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다. 심지어 서울에 비하면 지가도 낮고, 경쟁도 치열하지 않을 것 같으니 충분히 마케팅전략과 영업 센스로 우위를 확보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고흥은 다르다. 시장 자체가 작아 규모의 경제를 이룩할 수 없다. 그러다보니 실험을 하면 십중팔구 망한다.
예컨대, 고흥에서도 많은 이들이 요식업 관련 창업에 도전한다. 상당수가 서울에서 통용되는 트렌드를 따른다. 1인가구를 상정한 과일가게, 밀키트 상점 따위나, 단순 상품을 파는 게 아닌 컨셉 상품을 엮어 파는 카페, 음식점 등이다. 심지어 그들은 여러 면에서 꽤 유리하다. 가족들이랑 같이 살고 있으니 인적 네트워크도 풍부하고, 건물 자체를 소유하고 있을 가능성도 높다.
추천하고픈 고흥카페 유쟈, 젊은 창업가의 센스가 엿보인다. 트렌디한 창업이 다 망하는 것은 아니다(출처 : 블로그 @까레느).
하지만 마케팅은 잠재소비자들 중 일부를 상품경험으로 유도할 뿐, 소비 규모 자체를 확대할 수는 없다. 고흥에서 애초부터 1인가구가 적고, 다양한 메뉴, 상품, 취향에 맞아 유입될 수 있는 소비자의 숫자도 한정되어 있다. 트렌디한 콘텐츠를 만들어 SNS 홍보를 적극적으로 한다한들, 전국규모의 업체가 각축을 벌이는 알고리즘의 세계에서 경쟁력을 갖추리라 기대하는 건 사실 어불성설이다. 설령 운이 좋게 한 순간 주목을 받았다 한들, 그것이 실제구입으로 이어지기도 난해하고, 그 운을 이어나갈 수 있는 저력을 갖추는 건 또 별개의 문제다.
그러다보니, 사장이 몸으로 때워야하는 건 이미 기정사실이다. 장사체감도가 점차 떨어지고, 자연스레 서비스의 질도 낮아진다. 의기양양하게 벌려놓은 것들이 부담으로 다가온다. 메뉴는 많아, 다양한 재료들을 구비해놔야 하지만 손님이 적어 회전은 잘 안 된다. ‘솔드 아웃’된 메뉴가 부지기수고, 어쩌다 나온 메뉴는 편의점 레토르트와 크게 다르지 않다. 분명 서울에선 빡세도 돈 버는 맛에 장사를 해나가는 것 같았는데, 여기선 생계창업과 다를 바 없다. 오히려 고흥에서 잘나가는 식당은 1차 생산자에게 신선한 재료를 조달받으면서 맛까지 갖춘 곳들이다. 하나같이 나이 지긋한 사장님이 고흥에서 한평생 생계를 유지하며 이끌어 오신 그런 식당들이다.
고흥 횟집 '바다속으로', 제철횟감으로 음식들이 나오는지라 메뉴가 정해져 있지 않다. 사진은 황가오리, 갑오징어, 꼬록(출처 : 블로그 @뽈쥬).
서울은 휘황찬란한 서비스의 ‘성지’이다. 완벽해야하는 상품, 흠잡을 때 없는 접대, 철저히 기획된 매대 등, 심지어 그것들이 휘발되기 쉬운 것들이라도 거대한 자본규모 앞에선 문제없다. 매우 고도화된 상품서비스는 마치 그것이 당연한 것인 양, 소비자의 당연한 권리인양 우리에게 다가온다. 고도화된 상품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 또한 당연한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업체들은 도시에서 살아남을 자격이 없기에 폐업하는 게 마땅하다. 서울엔 이것들이 실제로 다 있다 보니 창업가들, 소비자들 모두 그렇게 생각한다. 서울엔 그 비싼 성수동에 POP-UP을 해도 막대한 이익을 볼 수 있는 사업체가 버젓이 존재하지 않던가.
하지만 서울은 비즈니스의 엄중함을 보여주는 ‘콜로세움’이기도 하다. 수확체감이 끊임없이 낮아지는 환경에서 사업가, 노동자들은 생존을 위해 끝나지 않는 격투를 벌인다. 연트럴파크에 맥주를 뿌리던 제주맥주도 대규모 구조조정을 했고, 쿠팡, 배민은 경쟁업체를 꺾기 위해 적자를 감내한 무한경쟁을 펼친다. 많은 청년창업가들이 사업을 접는다. 그보다는 정말 훨씬 적은, 잘나가는 창업가들은 더 큰 자본에 이어지기 위해 ‘젊(은)꼰(대)’를 기꺼이 자처한다. 기업가들이 이런 판국에 과연 청년노동자들은? 청춘을 회사에 바치다 취준생, 디지털N잡러, 1인크리에이터라는 이름의 ‘노마드’로서 결국 도시를 떠난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이러한 사태에 문제제기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한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정말 일관되게 도시의 빛을 칭송하고, 어둠을 외면한다. 그 결과는 서울을 숭배하는 것이다. 서울은 정말로 위대한(great) 물신(物神)이다. 그리고 그를 위해 수많은 노동과 시간이 기꺼이 투여된다. 인류가 멸종된 후 외계인이 지구에 찾아온다면, 피라미드가 즐비한 이집트의 옛 수도 기자보다 분명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더 놀라워할 것이다. 고대이집트인들보다 현대인류가 더 노동집약적이고 더 영적인 인류라고 평가하리라.
어느 때처럼 백반 집에서 점심을 먹는다. 이번엔 노부부가 운영하는 곳으로, 오랜만에 개장했다. 고흥의 백반은 밑반찬이 예술이다. 가게마다 반찬 스타일이 달라 비교하는 재미도 있다. 이곳의 반찬은 소세지전, 어묵볶음 같이 젊은 취향의 그것은 아니지만, 다양한 나물 위주의 ‘정통 남도 스타일’이다. 정갈한 느낌보다는 진한 양념이 혀끝에서 맴돈다. 아! 역시나 완벽하진 않다! 식탁이 조금 더 깨끗했으면 훨씬 장사가 잘되겠다는 생각에 미치자 슬며시 웃음이 든다. 고흥의 부족한 생활서비스를 다섯손가락 꼽으며 투덜거리면서도, 서울의 고도화된 서비스들을 비판하고 싶다니, 이정도면 나도 참 까탈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