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자기 자신을 동정하지 마

자신을 동정하는 건 저속한 인간이나 하는 짓이야

by 시루

과거를 뒤돌아보는 것은 멍청한 일일까. 나는 오랜만에 옷장 위의 박스를 꺼내 그 안에 든 것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왜 그런 행동을 했냐고 물으면 글쎄 현재를 생각하다 생각하다 지겨워서 차라리 과거를 뒤적이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박스 안에는 사진과 편지가 가득한데 거의 한 사람의 진심이 채워져 있었다. 2년 전 그와 헤어지고 처음 열어보는 것이다.

100일 때부터 2주년을 넘어 헤어지기 전까지 몰랐는데 그는 참 편지를 많이도 썼었다.

본인은 악필이라며 편지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에게서 친구일 때 첫 편지를 받고 나서 말했던 감상과 같이 그는 편지를 정말 잘 쓴다.

언제나 진심이었고 그것을 숨기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맞다 나는 그에게서 진심으로 사랑받았다.

그리고 사실 운이 좋게도 만났던 모든 이에게 진심으로 사랑받았다고 생각한다.



그의 편지에는 항상 영원이 써져 있었다. 나에게 사랑해 줘서 고맙다고, 때로는 미안했다고, 그리고 다시 고맙다고-, 앞으로도 함께하자고.

하지만 당연하게도 우리는 영원하지 않았고, 그 편지의 마지막 말들은 전부 거짓말이 되어버렸다.

왜일까, 왜 우리는 영원을 약속하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이별을 겪어야만 하는 걸까. 사실은 영원이라는 건 원래 없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닌가.



“내가 인생에서 가장 힘든 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 순간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것 같아.

그때 그 걸 내 손으로 끝내고 나서는 행복해졌거든. 내가 꽤 용기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말이야 “



헤어지기 위한 용기란 어쩜 이렇게 잔인한가 - 예전의 일기에 썼던 문장을 떠올리며, 나는 현재의 그에게 말했다.

말하는 대상이 적절하지 않다는, 그에게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냥 그 문장은 뱉고 싶었던 것 같다.

눈치가 빠른 그는 이별이야기임을 알았을 수도 있겠다.



맞다 나는 그토록 사랑하던 과거의 관계도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이다. 나는 나를 가장 아끼니까.

그렇다면 지금의 관계에는 영원이 있는가- 나는 또 박스 안을 들여다봐야 하는가.




언제까지 이렇게 있어서는 안 돼, 어떻게든 해야 해.
그리고 나는 “자기 자신을 동정하지 마.”라는 나가사와의 말을 갑자기 떠올렸다.

“자신을 동정하는 건 저속한 인간이나 하는 짓이야. “

이런, 나가사와 선배, 당신 정말 대단하시네요, 하고 나는 생각했다

- 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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